21세기를 웅비해 갈 여러분에게 오늘은 친구와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작년 입학식에서는 ‘창조적 인간이 되라.’고 요망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오늘은 “창조적 생명”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에 본연적으로 내재하는 창조적 충동과 능력에 관해서입니다.
난해한 철학적 논제나 보편적 정의를 내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여러분이 이 길고도 귀한 인생 여정에 있어서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운 인생의 방랑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앞날에 영광이 가득하기를’ 희망하면서, 내 자신의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온 마음으로 주체할 수 없이 넘치는 ‘창조’라는 말을 실감하고 체험했던 때는 바로 ‘나’라는 ‘존재’를 모두 걸고 한 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비로소 ‘확대된 자아’를 보았고, 내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발하는 승리의 환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창조적 생명’ 이란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연마하는 행동과 실천 속에서 떠오르는 ‘생명의 역동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땀,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이 만들어 낸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생길에는 폭풍도 몰아치고 폭우도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패배의 순간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창조적 생명’은 결코 패배에 짓밟히지도 파괴되지도 않습니다. 이윽고 찬란한 무지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드높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응석 부리는 마음’ ‘안일한 마음’에 창조란 있을 수 없습니다. ‘푸념’과 ‘회피’는 무기력한 겁쟁이의 마음으로, 생명 본연의 창조력을 부식(腐蝕)해버립니다. 창조적 투쟁을 단념한 생명의 말로(末路)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산산이 파괴해버려 나락의 끝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여러분은 결단코 자신의 ‘생명’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노력을 한순간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창조’란 삐걱거리고 무거운 ‘생명’이란 문의 빗장을 여는 작업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준엄한 투쟁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자기 자신의 생명의 빗장’을 여는 일은 ‘우주의 모든 불가사의’한 빗장을 여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며 활동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인간으로서의 증거가 있습니다. 아니, 생명 그 자체의 가장 깊숙한 진리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존재방식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로서의 참된 보람을 느끼게 해줍니다.
생을 창조하는 환희를 맛보지 못한 인생만큼 쓸쓸하고 공허한 인생은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직립(直立)하고, 이성과 지성을 발견하는 것만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새로운 생을 창조하는 투쟁 속에서 비로소 이성을 인도하는 빛나는 영지도, 우주까지 관통하는 직관지(直觀知)의 빛도, 덮쳐오는 사악함에 도전하는 강인한 정의와 의지력도, 번뇌하는 자의 고통을 포용하는 한없는 자비의 심정도, 그리고 우주 본원의 생명에서 솟구치는 자애의 에너지도 모두 융화되어 인류의 생명을 환희의 리듬으로 물들이며 끊임없이 고동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열린 모든 생명의 보석을 갈고닦을 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되어 높은 이상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때문에 현대에서 미래에 걸쳐 ‘창조적 생명’의 주인이야말로 역사 진보의 선두에 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창조적 생명’의 개화를 저는 ‘인간혁명(Human Revolutio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인간혁명의 실천이야말로 여러분의 평생에 걸친 과제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작가인 샤를 페기(1873-1914)는 “교육의 위기는 단지 교육의 위기가 아니라 생명의 위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위기는 바로 학문과 교육의 뿌리까지 침투해 있기에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돌파구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소카대학에 전력을 쏟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