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교육을 통해 인간은 무기력과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교육력의 권리 회복을 위해 내면적 ‘정신성’의 빛을!
21세기 개막 기념 ‘교육제언

2001년 1월 9일

21세기 개막을 기념하여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교육력의 권리 회복을 위해 내면적 ‘정신성’의 빛을”이라는 제목으로 제언을 발표했다. 지난 해 9월에 한 제언(“’교육을 위한 사회’를 지향하여”)에 이어 ‘어린이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21세기 교육을 전망하는 이번 제언은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집단괴롭힘’이나 ‘폭력’ 문제를 들고 학교와 사회의 교육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논하고 있다.

제언에는 먼저 문제해결을 위해 제도적인 환경 정비를 추진함과 더불어 ‘집단괴롭힘이나 폭력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풍을 사회에서 반드시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 이 전제하에 사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모럴 해저드(윤리의 결여)와 이에 수반되는 악에 대한 ‘무관심’과 ‘시니시즘주1(냉소주의)’의 만연을 지적. ‘타인’ 부재(不在)의 병리에 숨어있는 위험성을 언급하면서 인간과 인간을 맺는 보편적인 공감성을 양성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더욱이 현대 교육의 위험성을 극복하는 길은 전통이나 습관에 의지하는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가능성을 여는 ‘살아있는 가치’를 기축으로 한 교육에 있다고 강조. 전쟁(제2차 세계대전) 전으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종교교육 실시를 추구하는 복고주의적인 움직임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 한편으로 인간이 더욱 잘 살아가기 위한 내발적인 정신성과 종교성을 함양하는 ‘인간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함과 더불어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전이나 명작에 친숙할 기회를 늘려 ‘독서를 통한 인격형성’을 그 기반의 하나로 할 것을 제안. 끝으로 창가학회 교육부에 의한 ‘교육상담실’ 등의 대책을 소개하면서 고민을 안고 있는 어린이나 부모를 고립시키지 않도록 가벼운 마음으로 안심하며 상담할 수 있는 장을 지역에 적극적으로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1세기는 ‘교육의 세기’!
학교를 어린이들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장’으로
악을 조장하는 ‘무관심’과 ‘냉소주의’

드디어 21세기가 개막했습니다. 나는 지난 해 가을, 이 새로운 세기를 ‘교육의 세기’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하나의 제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교육을 계속해서 수단으로 삼아 온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를 담아 ‘사회를 위한 교육’에서 ‘교육을 위한 사회’로의 전환을 호소한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행복이라는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교육을 회복시키는 것은 실로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현실적으로 고통을 주고 있는 집단괴롭힘이나 폭력을 없애기 위해 학교와 사회가 착수해야 할 과제에 관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논하고자 합니다. 본래, 어린이들에게 ‘배우는 기쁨을 느끼는 장’이 되고 ‘삶의 기쁨을 느끼는 장’이 되어야 할 학교에서 집단괴롭힘이나 폭력 등의 문제가 심각해진 지 오래입니다.

문부성(한국의 교육부에 해당)의 1999년도 ‘문제행동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공립 초·중·고교의 아동과 학생이 일으킨 ‘폭력 행위’는 3만6천건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또 ‘집단괴롭힘’에 관해서는 감소하는 경향이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3만을 넘는 건수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만,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학교측이 보고한 건수에 근거한 것이고 또 사립학교는 조사 대상에 들어가지 않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건수의 많고 적음도 물론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이상한 상태가 교육 현장에서 절반은 정상적인 것으로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린이는 ‘시대의 축도’이며 ‘사회의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이 어둠에 싸여 흐린 상태라면 밝고 희망찬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도 문부성과 각 자치단체를 통해 다양한 대책이 나왔습니다만, 이러한 제도적인 ‘집단괴롭힘 방지’의 환경 조성과 함께 ‘집단괴롭힘이나 폭력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풍을 사회 전체에 확립해 가는 것이 강력히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창가교육학체계>에 담은 ‘비원(悲願)’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발간된 창가학회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의 대저작 <창가교육학체계>도 사회의 혼미함에 농락당하는 어린이들을 걱정한 마키구치 회장의 “1천만의 아동과 학생이 수라장에서 허덕이고 있는 현대의 고뇌를 다음 세대로 넘기고 싶지 않다”라는 비원에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사회에 희생되지 않고 그 가능성을 끝없이 펼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한 인생을 끝까지 걸어가길 바라는 그 ‘절실한 비원’이 바로 창가교육학의 일체 근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풍요로운 성장의 싹을 어린이들이 서로 잘라내 버리는 그러한 비극만은 기필코 학교에서 없애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일본 동부와 서부에 있는 소카(創價) 학원(중·고교)과 소카초등학교의 창립자로서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집단괴롭힘이나 폭력은 절대 악이고 함께 없애 갈 것을 다 같이 맹세하고 싶다”라고 아동이나 학생들 앞에서 거듭 호소해 왔습니다. 본디 그러한 호소자체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새로운 것도 아니고 어른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치이며 인간이 분별해야 할 당연한 규범, 상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난처하게도 지금은 이런 당연함이 당연한 것으로써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집단괴롭힘이나 폭력, 그리고 비행, 소년범죄만 해도 숫자 그 자체가 이전에 비해 반드시 증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문제는 ‘숫자’나 ‘양’이 아니라 그 ‘질’이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점을 응시해 두지 않으면 ‘집단괴롭힘을 없애자’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어린이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표면상의 슬로건만으로 허무하게 메아리치는 것으로 끝나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집단괴롭힘이나 폭력을 없애기 위해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일 것입니다. 악에 굴하지 않는 용기, 악을 방관하지 않는 용기, 바로 이들이 총결집되었을 때 집단괴롭힘과 폭력도 맥없이 도망칠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그것이 의외로 어렵습니다. 나는 지난 해, <세이코신> 지상에서 평소 중학생을 접할 기회가 많은 청년들과 수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서로 논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통감한 것은 부모나 교사가 대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데의 어려움입니다.

선(善)에 관한 언어 타락의 심각화

일찍이 S. 베이유는 시대의 병리를 “선에 관한 말의 타락”이라고 갈파했습니다. 병리는 그 후에 더욱더 진행하여 용기뿐만 아니라 노력이나 인내, 사랑, 희망 등의 ‘선에 관한 말(언어)’이 어느 것이나 냉소적인 시선에 노출되고, 그 시선에 신경 쓰는 나머지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꺼리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집니다. 그 병리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발본적인 대응은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바와 같이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 텔레비전의 전파를 타서 정곡을 찌르는 타이틀로 종합잡지가 특집으로 편집하고 단행본마저 출판되는 현대일본의 상황은 문제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계종교의 역사와 함께 “죽이지 말지어다”라는 오래된 계율, 덕목조차 이런 모습이므로 집단괴롭힘이나 폭력 등,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생겨 난 배경에는 근년, 사회에 별안간 현저하게 나타나는 모럴 해저드(윤리의 결여)와 이에 수반되는 악에 대한 무관심, 시니시즘(냉소주의, 주1)의 만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특히 강조해 두고자 하는 바는 악에 대한 무관심과 시니시즘은 때때로 악 그 자체보다도 두려운, 사회를 뿌리부터 좀먹어 가는 병근(病根)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전에 대담집을 엮은 식자인 러시아의 훌륭한 아동문학가 A. 리하노프 씨와 ‘미국의 양심’이라고 불린 노먼 커즌스 씨도 입장을 같이하여 그 내용을 강하게 호소했습니다. 무관심이 청소년의 혼에 미치는 죄의 깊이에 대해 리하노프 씨는 에베르하르토의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말을 인용하면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최악의 경우에도 적은 그대를 죽이기밖에 더하겠는가. 우인(友人)을 두려워하지 마라, 최악의 경우에도 우인은 그대를 배신하기밖에 더하겠는가. 무관심한 패거리를 두려워하라, 그 자들은 그대를 죽이지도 않고 배신도 하지 않지만 그 자들이 서로 침묵을 합의한 탓에 지상에는 배신과 살인이 존재한다.”

왜 역설적인가 하면, 무관심은 살인이나 배신을 외면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악을 몇 배로 증장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란 가변적인 실재

또 커즌스 씨가 작가인 스티븐슨의 “나는 악마보다도 시니시즘이 훨씬 싫다”라는 말을 공감하며 원용(援用: 자기 주장을 위해 다른 문헌 등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시니시즘에 영향을 주는 안이함, 자기불신이 이상이나 희망, 신뢰 등의 말을 타락시켜 숨통을 끊을 지도 모름을 우려해서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두 사람이 무관심이나 시니시즘을 악이나 적 이상으로 엄격하게 훈계하는 것은 거기에 생(生)의 보람, 삶의 현실감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관심이나 시니시즘이 지배하는 생명 공간이란 애정이나 증오, 고뇌나 환희 등 인간적인 정념(情念)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 않고 모른척하며 될 대로 되라는 자기 폐쇄적인 세계라 하겠습니다. 악에 대한 무관심은 동시에 선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므로 거기는 선과 악이 엮어내는 갈등이나 드라마가 갖는 생생한 현실감과는 관계 없는 살풍경(殺風景)인 생명공간이며 언어공간입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이 어둠에 흔들리는 일종의 불길함에 어른들 사회가 당혹함과 조바심을 더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거기에는 가치의 공백 시대에 늘 따라붙는 무관심이나 시니시즘이라는 병리를 어린이들의 예민한 마음이 먼저 느끼고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위구심과 경계심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 집단괴롭힘을 비롯한 청소년의 문제행동의 ‘양’보다도 ‘질’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그런 뜻입니다.

무관심이나 시니시즘에 비해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현실감 그 자체고, 악이 없이 선은 없고 선이 없이 악은 없다. 즉, 이 양자(兩者)는 상대적임과 동시에 상보(相補)적인 실재입니다. 또 악도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선으로 바뀔 수 있다 <역(逆)도 또한 진실이다>는 점에서는 가변적 실재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도, 악도 서로 (선이면 악을, 악이면 선을) 그 관계성 위에 ‘타인’으로서 ‘자기’를 성립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아=에고’와 ‘자기=셀프’

불교의 지견(知見)은 그것을 ‘선악불이(善惡不二)’, ‘선악무기(善惡無記)’라고 설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를 들어 석존 <선(善)>이라는 ‘자기’의 불도수행을 완결시키기 위해서는 적대하는 제바달다<악(惡)>라는 ‘타인’의 존재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무관심이나 시니시즘에 치명적으로 결여된 것이 ‘타인’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실한 ‘자기’란(칼 융이 의식의 표층 차원의 ‘자아=에고’와 심층 차원의 ‘자기=셀프’를 구분한 바와 같이) ‘타인’과 밀접하게 연결 지으면서 심층 차원으로 맥동하는 실재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무관심이나 시니시즘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자기’란, 융이 말하는 ‘자아=에고’와 마찬가지로 표층 차원을 부유(浮遊)하는 폐쇄적인 자의식일 뿐입니다. 그러한 ‘자기’는 ‘타인’이 부재하고 ‘타인’의 아픔이나 고뇌, 고통에 대한 불감증이 결핍되어 있는 까닭에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 버리거나, 하찮은 일로 예민해져 폭력적인 직접행동으로 치닫거나 혹은 모르는 체하며 방관자로 되기도 합니다. 다소 대체적인 상황을 든 표현이지만, 이러한 ‘타인’의 부재라는 정신 병리야말로 파시즘과 볼셰비즘주2 등의 20세기를 석권한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낳는 알맞은 토양이었다는 것, 또 현재도 한층 더해지는 버추얼 리얼리티(가상 현실)의 범람으로 ‘타인’의 그림자가 엷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이들의 문제 행동을 ‘강 건너 불’ 보듯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타인’이 누락되어 있으면 대화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평화학계의 중진(重鎭)인 J.갈퉁 박사가 나와의 대담집에서 사용하신 말을 빌면, ‘외면의 대화’는 ‘내면의 대화’를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에 ‘타인’을 빠뜨린 대화는 형태가 대화처럼 보여도 시종일관 일방적인 언쟁이 되어 버립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합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그러한 언어 공간 즉, 어느 식자가 ‘실어증과 다변증의 동거’라고 형용한 언어 공간에서는 말이 생생한 울림을 잃고 마침내는 압살되고 말 것이라 합니다. 말의 죽음이 ‘언어적 인간’으로서 혼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한 현실감이란 그와 같은 자기 폐쇄적이고 표층적인 차원을 뚫고 깨뜨려 ‘자기’와 ‘타인’의 전인격적인 협의,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를 통해서만 발현되고 생생하게 약동하는 정신성이며 공통감각입니다.

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두 번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소프트 파워의 시대와 철학>, 1991년 9월)에는 시대정신으로써 요청되는 소프트파워의 핵을 이루는 ‘내발적인 것’, ‘내발적인 정신성’은 고뇌나 갈등, 망설임, 심사숙고함, 결단이라는 혼의 투쟁을 거쳐 현현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호소했습니다. 살아있다는 데에 대한 확실한 보람, 현실감은 ‘자기’와 ‘타인’이 심층차원에서 엮어내는 입혼과 촉발의 드라마, ‘내면의 대화’와 ‘외면의 대화’의 끊임없는 상호 반복작업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단련되어야만 비로소 만인을 포용할 보편적인 정신성의 빛을 띨 것입니다. 거기에서만이 말은 본래의 정채(精彩)를 되돌립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불리는 인류의 정신적 유산은 모두 그 심층차원에서 양분을 빨아올려 열매를 맺게 한 정화이지만, 여기에서는 한 예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활동에 전환기를 가져다 주었다는 <죽음의 집의 기록>을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젊었을 무렵, 사상범으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고 4년 간을 혹한의 땅에서 지냈습니다.

‘대화’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반
현대사회를 덮고 있는 ‘타인’ 부재의 병리

거기서 체험한 여러 가지 ‘지옥’을 통해 파헤쳐 찾아낸 민중의 미질(美質: 좋은 성품), 인간의 미질을 엮은 보기 드문 르포르타주(기록문학)가 이 작품이고 그 속에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죄인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민중의 마음

“민중은 그 죄가 아무리 엄청난 것이어도 죄로 인해 죄수를 결코 책하지 않고 그리고 죄수가 짊어지게 된 벌과 불행한 처지인 까닭에 죄수를 용서하고 있다. 러시아 모든 민중이 범죄를 불행이라 부르고 죄를 범한 자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깊은 의미가 있는 정의이다. 그것이 더 한층 존귀한 것은 무의식적, 본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은 얼마나 풍요로운 어감과 여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요. 러시아 민중을 깊이 생각한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혼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심층으로 바짝 다가가는 문호의 안력(眼力)을 믿습니다. 범죄를 ‘불행’이라고 부르고 죄인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민중의 이러한 눈빛은 언제나 ‘타인’을 명확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죄수도, 자신도 별개의 인간이 아니라 언제 자신이 같은 처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공감성이 맥박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을 ‘선’, 타인을 ‘악’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경조부박(輕佻浮薄)한 교만함(이데올로기의 악의 연원)과 결별하고 연에 의해 ‘악’으로 타락한 자는 또한 연에 의해 ‘선’으로 소생할 수 있게 하는 정신성이 자기(磁氣)를 띠고 있어 루소가 원초의 사회감정으로 삼은 ‘연민’의 마음이 확산되어 감싸 안을 듯 전해져 옵니다.겉으로 보면 어떠한 괴로운 상황에 처해도 그와 같이 인간의 유대가 유지되어 커뮤니케이션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는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불손한 질문에 사람들이 허를 찔려서 엉거주춤한 태도로 어쩔 수 없이 의논을 하게 되는 사회, 즉 커뮤니케이션 부전증(不全症)을 앓는 사회와는 실로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후의 저작의 기본 내용에 공통을 이루는 테마가 장대한 변신론주3(辯神論)이라는 사실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루소의 교육이론의 근저에 도그마(교조)나 교회의 권위와는 연이 없는 독자적인 종교감정이 자리잡고 있듯이, 보편적인 공감성이나 정신성의 핵심부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종교성, 이를테면 유마힐주4(維摩詰)의 ‘일체중생이 앓는 까닭에 내가 앓는다’라는 말로 응축되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의 극치나 ‘아흔 아홉 마리’ 보다는 방황하는 ‘한 마리’를 친근하게 대하는 예수의 사랑의 정신과 강하게 공명하는 인간 본연의 종교성이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근원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박사가 펼친 비폭력운동은 전쟁과 폭력으로 세월을 보낸 20세기를 뒤돌아보면 유달리 선명한 빛을 발하는 정신성의 투쟁의 결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커다란 파동을 몰고 온 비폭력운동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움직여 가고 있는 큰 이유는 “종교는 다른 모든 활동에 대하여 도덕적 기초를 제공한다”라고 간디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언동이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공고(鞏固)한 종교적 신념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비폭력운동이 보편성과 불변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이 정신성, 종교성이라는 요소를 기축으로 삼아 교육 문제에 깊은 통찰을 시도한 사람으로 미국의 심리학자 A. H. 매슬로가 있습니다.

그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써 “교육은 그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되어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깊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을 현실로 나타내는 것을 도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점이 교육의 목적을 ‘어린이의 행복’이라는 확고한 관점을 갖는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교육학설과 정확히 부합합니다. 매슬로는 그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교육의 ‘장기적 가치 목표’, ‘궁극적 가치’에서 잠시도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그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잃는 본말전도로 빠져들어 버린다”고 계속 경고해왔습니다. 군사나 경제 등의 단기 목표에 우선순위를 계속해서 부여해 온 결과, 현대의 교육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일본인도 정말 귀가 따가울 것입니다. 그리고 매슬로가 말한 부분에서 장기적, 궁극적인 ‘가치목표’란 그가 ‘철학적’ ‘종교적’ ‘인간주의적’ ‘윤리적’ 등으로 형용하고 있는, 인간이 깊이 내포하는 정신성·종교성의 함양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치의 공백이 초래한 ‘교육의 위기’
인간의 행복과 가능성을 열어 주는 정신성의 원천인 종교성

지난 해 가을, 미국 웨즐리대학교의 빅터 카잔지안 학부장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카잔지안 학부장은 그 대학교에 본부를 두는 전미(全美) 3백 50개 대학교 네트워크인 ‘교육변혁 프로젝트’의 공동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본 프로젝트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라는 관련성이 분단된 교육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육에 ‘전체성’과 ‘정신성’의 권리를 회복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학부장은 ‘지성교육’과 정신교육’의 분리가 진척되어 교육을 수단시하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며 미국 소카대학교가 지향하는 전인성을 기르는 인간교육에 따뜻한 기대를 보내주시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전인성 함양’을 핵으로 삼는 인간교육이야말로 마키구치 회장 이래로 부지런히 쌓아올린 창가교육의 안목이며 영원불변의 지침입니다.

교육계의 혼미, 어린이들의 세계를 덮치는 어둠의 깊이는 종교에 한하지 않고 가정이나 지역을 포함하여 사회 전체가 지녀야 할 교육력의 저하와 쇠약을 말해주고도 남습니다. 그런 만큼, 잔재주를 부리는 대응으로 끝나지 않고 아무리 우원(迂遠: 현실과는 거리가 먼)하게 보일지라도 매슬로가 “가치를 뺀 교육을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질문한 바와 같이 정신성 그리고 또 종교성이라는 인간 마음의 심층까지 파고든 근본 요법으로 접근하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저 혼자가 아니라고 봅니다.

종교교육의 강요는 전쟁 전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

단,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내가 ‘종교교육’ 도입의 의도 하에 이러한 내용을 논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공교육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헌법이나 교육기본법에서도 명확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정한 규정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쟁 전, 국가신도가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학교에서도 그 영향을 농후하게 받는 가운데 교육이 군국주의나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 데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근래 들어 청소년을 둘러싼 문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사회에 규율을 되살리고자 종교를 공교육의 장에 들여놓으려는 복고주의적인 색채를 띤 움직임이 일부에서 보입니다만, 나는 전쟁전의 일본이 범한 그러한 내심의 자유나 신교의 자유를 짓밟는 ‘종교교육의 강요’라는 어리석은 행동은 단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신교의 자유’는 단호하게 끝까지 지킨다

우리 창가학회 인권투쟁의 원점은 국민에게서 정신의 자유를 빼앗아 전쟁으로 몰아넣으려 한 군국주의 파시즘에 단호하게 끝까지 투쟁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과 도다 제2대 회장의 정신 투쟁에 있습니다. 두 회장의 정신을 이어받은 나도 창가학회의 사회적 사명의 하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여 행동을 관철해 왔습니다. 그 신조를 나는 27년쯤 전에 연 1회 실시하는 본부총회의 강연에서 이렇게 결의를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교의 자유를 끝까지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한 설령 우리와 다른 사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만약 그 사람들이 포학한 권력으로 그 권리를 빼앗기고 억압당할 것 같은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인간 존엄의 위기’를 염려하여 단호히 그 사람들을 옹호해 갈 것을 결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타종교의 사람이나 또 종교를 부정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사람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구가한 불법(佛法)이 가지고 있는 이념에 귀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헌법이 정한 ‘신교의 자유’는 절대로 등한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 원칙을 밀어 무너뜨리는 공교육의 ‘종교교육’ 도입, 즉 교육기본법이 금하는 ‘특정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 실시에는 강하게 반대합니다. 물론 국공립학교와는 달리 사립학교에서는 저마다의 교육방침이나 교육이념에 따른 형태로 종파교육을 포함한 종교교육을 하는 것이 인정되어 어린이들의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부언하면, 제가 창립한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창가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는 사립학교이기는 하지만 종교교육은 하지 않고 수업 커리큘럼 중에도 일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학교 이념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위해’라는 반성하는 안목을 기르면서 사회를 위해 가치를 창조해가는 풍부한 인간성이나 정신성을 키우는 바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성과 종파성

그런데 한 마디로 정신성, 종교성을 발굴하는 작업이라 해도 그것은 말하자면 인류사를 부감(俯瞰: 전체를 내려다보듯이 개괄하거나 설명하는 것)하는 듯한 문명론적 과제이며 각자, 각 가정, 각계, 각 단체가 저마다의 입장, 방법을 가지고 힘을 합쳐 일을 맡아 가지 않으면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산’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창가학회와 SGI(국제창가학회)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불교운동이 동시에 ‘인간혁명’이라고 항시 말씀드리고 있는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즉, 종교적 사명은 인간적·사회적 사명과 상즉불리(相卽不離)이고 전자는 반드시 후자로 승화하고 결실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양자를 갈라놓아 버리면 종교성은 종파성으로 왜곡되어 자칫하면 종교는 사람들에게 해를 미치는 반인간적, 반사회적인 존재로 타락하고 맙니다. 수많은 컬트 교단이 빠지기 쉬운 미망(迷妄)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강조하는 ‘종교성’이란, ‘종파성’과는 엄격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인간적·사회적 측면에서의 가치창조에 연결되어 가지 않는 종교성은 그 이름의 가치가 없고 어딘가에 거짓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창가학회의 사회적 역할과 사명은 폭력이나 권력, 금력 등의 외적 구속력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계속 침해하는 ‘힘’에 대해 내면의 생명 깊은 곳에서 발하는 ‘정신’의 투쟁이다”라고 위치를 부여했습니다. 이 ‘정신의 투쟁’이란 정신성, 종교성을 개발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신과 아와지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창가학회의 그 지역 멤버가 청년들을 중심으로 자원봉사 활동에 나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그 활약하는 모습이 외국의 매스컴에도 보도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일은 기억에 새롭습니다. 또 그 지역 회관도 대피소로 개방하고 식사를 제공한 것 등도 포함하여 대단히 감사해 하셨습니다. 최근에도 지난 해 9월 도카이 지방을 덮친 집중호우 때에도 피해자 구조활동에 협력하여 그 지역에서 감사해 하셨습니다. 그것은 민중과 고락을 함께 하려는 정신성, 종교성을 나타내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종파성을 초월하여 정신성, 종교성의 보편적인 확대를 가질 수 있는지 어떤지는 그 종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해 가기 위한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야기를 교육차원, 특히 종파성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는 학교교육의 장으로 돌리면, 저는 어린이들의 황폐해진 내면을 일구고 싱싱한 푸르름이 넘치는 옥야로 바꾸어 갈, 고금에 걸쳐 바뀌지 않는 회로는 그러한 정신성, 종교성을 풍요롭게 칭송한 예술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책을 접해가는 것 즉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이 불완전한 사회에 대화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에 정신성, 종교성이라는 생기를 불어넣어 활성화해 가야 합니다. 그 활성화를 위한 가장 좋고 가장 강한 매체가 되는 것이 고전이나 명작 등의 양서가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학교교육에 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도 젊었을 때부터 고전이나 명작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먼 장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되는 법입니다. 현재도 다양한 형태로 문학작품을 접할 기회는 학교에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대개의 경우 ‘국어’를 비롯한 교과목에서 독해력 등을 기르기 위한 교재로써만 쓰여지고 있는 듯합니다.

인생의 진실은 인격을 통해서만 전해져간다
양서를 읽는 것은 좋은 벗과 스승을 갖는 것

근년에 전국 학교가 다양한 형태로 독서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과 그 실천이 부수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위대한 문학작품과 가까이 접하는 시간을 학교의 주된 교육의 하나로 도입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는 교육을 모색하는 가운데 다양한 교재를 이용하여 학생 자신이 직접 능동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방법을 도입한 스웨덴의 사례도 있습니다. 이는 참가형 학습을 통해 현대 문명이 처해 있는 근원적인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통찰력을 배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시에 임해서는 이런 여러 외국의 사례를 널리 참고로 삼으면서 구체적인 방법을 검토해 가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독서’는 ‘인생경험’의 축도!

지금, 왜 독서라는 말을 했는가 하면, 첫째로 그것은 독서경험이 어느 의미에서 인생경험의 축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마모토 슈고로의 작품 <긴 언>에 이런 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길다. 단숨에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나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고 단단히 올라가는 것이나 결국은 마찬가지가 된다. 순서를 밟지 않고 건너뛰어 오르기보다 한 걸음씩 오르는 편이 가는 도중의 초목이나 샘 그리고 여러 풍물을 볼 수 있으며 그보다도 한 걸음, 한 걸음을 확인했다는 자신감을 갖는 편이 강한 힘이 되기 마련이다”라고.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이 예는 독서경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이나 명작은 읽어서 느끼는 보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내용이) 긴 것에 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만화책을 읽듯이 가볍게 읽고 넘겨버릴 수는 없습니다. 난해한 부분에 부딪혀 두 번, 세 번 읽어 가까스로 자기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그 때는 몰라도 자라서 나중에 그 의미가 불현듯 생각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발 밑을 다지고 사방을 살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산 정상을 향하는 등산과 비슷합니다. 고전이나 명작은 다이제스트 책이나 결론만을 요약한 것을 읽어 해치우듯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등반 작업과도 비슷한 격심한 투쟁을 거쳐 비로소 피와 살이 되는 것이 양서입니다. 단지 책상 앞에 앉아 독서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지만, 습관화하는 의미에서도, 우인이나 교사와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하는 독서경험은 한층 더 깊은 의의를 다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도 10대에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초토화된 곳에서 청년들과 독서 모임을 만들었고 무엇보다도 은사 도사 조세이 선생님을 둘러싼 정기적인 독서 모임의 하나 하나가 황금의 추억으로 뇌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책을 읽어라, 책에 읽히지 마라”라고 함은 은사가 자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인생의 달인인 은사의 언언구구(言言句句)에서 배운 것은, 책을 대하는 방법은 인간을 사귀는 방법과 같고 양서를 접하는 일은 좋은 스승, 좋은 벗을 가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귀중한 교훈이었습니다.

가상 현실 범람이 초래하는 폐해

충지금 왜 독서를 다루는가, 그 둘째 의의로 축적된 독서경험은 항간에 범람하는 가상현실이 초래하는 악영향에서 혼을 보호하는 장벽이 되어 줄 것입니다. 영상 등으로 송출되는 가상현실은 어느 정도의 편의성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인간이 인간끼리 또는 자연과 직접 서로 접함으로써 생기는 공감성의 현실과는 비슷한 듯하나 다른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은 그 자극성이 강한 까닭에 현실 세계에서만 배양될 ‘타인’의 아픔이나 괴로움에 대한 공감성, 상상력을 덮어 가릴 수밖에 없는 공통된 폐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만들어진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환경에만 처해 있으면 능동적인 여러 능력 즉, 생각하는 힘, 판단하는 힘, 사랑하고 공감하는 힘, 악에 대항하는 힘, 믿는 힘 등 대체로 내발적인 정신성이 어쩔 수 없이 쇠약해지고 맙니다.

프랑스의 뛰어난 과학자며 철학자인 아르베르 자칼 씨는 말합니다. “정보과학은 정보를 가져다 주는 것만으로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과학이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람을 얕보는듯한 급속 냉동의 커뮤니케이션일 뿐입니다. 침묵과 말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대화는 자연히 창조성이 들어있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정보과학에 의해 그것을 발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사람을 얕보는 듯한 급속 냉동의 커뮤니케이션”이란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까요. 그리고 독서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는 도저히 충족되지 않는 혼의 깊은 곳에 분명 격려와 치료의 바람을 보내 줄 것입니다. 참된 독서란 필경, 작자와 독자의 끈기 있고 친근한 대화에 귀착하기 때문입니다. 독서경험이 인생경험의 축도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셋째 의의로, 독서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일상적인 습성에 매몰되지 않고 인생의 과거와 장래를 숙고하는 좋은 찬스가 될 것입니다. 이전에 읽은 적이 있는 책이든, 처음 읽는 책이든 자신의 전 인격을 걸어 인식하고 느낀 ‘무엇인가’가 없으면, 젊은이나 어린이들과 서로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인생의 ‘진실’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만 전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서경험을 통하여 어린이들 자신의 ‘질문’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면서 시간을 들여 자신을 다시 응시하고 자신의 힘으로 ‘대답’을 찾아내는 힘을 길러 가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그린 회심의 드라마

위대한 문학작품이란, 그런 의미에서 ‘자문의 보고’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21세기 대학교육을 발본개혁
2001년은 ‘국제 자원봉사의 해’

마침 내년은 유엔이 정한 ‘국제 자원봉사의 해’입니다. 이것을 기회로 학교현장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통해 자원봉사 활동에 대한 인식을 넓히면서 21세기 인도(人道)사회의 길을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교육개혁의 초점이라 할 수 있는 대학입시제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재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고등학교가 단지 ‘대학입시 준비기관’이 되어 버린 경향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반면 장래에는 아이를 적게 낳게 되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수가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도기에 해당하는 지금이야말로 대학입시제도를 재고해 보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학생 측에도 대학 측에도 진정 유익한 제도로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유아나 저학년 어린이들에게 미래를 위탁하는 마음으로 ‘읽고 들려준다!’

한 가지만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레빈의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로 시작되는 자문하는 장면입니다. 그 부분에서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하는 레빈이 삶의 규범을 위한 길을 계속 찾아가는 속에서 어느 농부의 말을 듣고 새로운 경지를 열어 가는 모습, 그 과정의 마음의 움직임을 훌륭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느 인간은 단지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살고, 미추하란 자도 그 입으로 단지 배를 채우는 일만 하고 있지만, 포카 누이치란 사람은 정직하고 우직한 노인이지요. 저 사람은 혼을 위해 살고 있어요. 신을 기억하고 있지요.” ‘혼을 위해’ 산다. 레빈의 마음을 번개와 같이 관통한 것은 이런 농부의 무심한 한 마디였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넓은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며 “마음 속에 새로운 무언가를 느낀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종의 기쁨을 가지고 그 새로운 것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본다”라는 처음 겪는 경험을 맛보며 자문자답을 거듭해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나름의 ‘답’에 도달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숲 속의 풀밭 위에 몸을 눕히고 이렇게 마음 속으로 속삭였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인식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과거에 나에게 생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렇게 생명을 주고 있는 그 힘을 이해한 것이다. 나는 허위에서 해방되어 주인을 인식한 것이다”라고. 이러한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회심의 드라마는 톨스토이의 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만, 거기에 구상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자문’에서 ‘타인과의 혼과 혼의 촉발’로, 그리고 ‘내성적인 눈’을 통해 자신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여 창조해가는 정신의 영위라 할 것입니다. 그 건전한 정신의 영위를 회복한 레빈이었기에 전쟁이 덮어 가려버리는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라는 진실을 알아차렸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세르비아 전쟁에 대한 참가의 의거라 여기며 불타오르는 자기희생의 민족적 열광에 찬물을 끼얹듯 “단지 희생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터키인을 죽이는 일이 아닙니까”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라는 불멸의 덕목은 그와 같은 혼의 고뇌와 갈등 끝에 입에 담았을 때 곧 영롱한 광채를 띠어 갑니다. 그리고 내가 <안나 카레리>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느끼는 것은 레빈이 “자신이 실감한 ‘선의 법칙’이 기독교 만의 것인가” “다른 유태교도나 이슬람교도나 유교나 불교의 신도에게는 이 최선의 행복은 빼앗기고 없는 것일까”라고 회의(懷疑)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인간 내면 속의 정신성, 종교성에서 볼 때, 고금의 대문학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전이나 명작과 투쟁하는 청춘을

이런 고전을 숙독하고 음미하는 일이 얼마나 자신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줄지. ‘보물을 두고 썩힌다’라는 말처럼 뛰어난 정신적 유산을 방치한다면 아까울 따름입니다. 톨스토이뿐만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좋습니다. 위고도 괴테도, 몇십 년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의 도태작용을 거쳐 살아 남아온 고전이나 명작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외국의 대문학이 너무 무겁다면 일본의 근대문학, 또는 가와이 하야오 등이 추천하는 코믹한 아동문학 중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활자탈피’라고 해도 아니 ‘활자탈피’ 시대이면 일수록 나는 시류에 저항하여, 고전이나 명작과 한 번도 본심으로 투쟁한 적이 없는 청춘이 얼마나 외롭고 초라한 것인지를 호소해 두고자 합니다. 또 유아나 저학년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도 가능한 자주 ‘읽고 들려주어’그 습관을 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에 불과한 것일까요. 혼자서 독서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부모나 교사가 소리 내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의 의미는 더욱 클 것입니다. 부모나 교사가 목소리를 통해 아이들은 말의 체온을 느끼며 이야기의 정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소리의 울림을 통해 기쁨이나 슬픔, 아픔 등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감성이 풍요롭게 연마되어 갑니다. 또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목소리 상태를 바꿔보거나 때때로 멈춰 서서 아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그러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속에서 서로의 신뢰관계가 착실히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읽고 들려주기’를 할 때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풍요로운 결실을 바라며 씨를 부리는 것과 같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아무쪼록 건강하게 성장해 주었으면”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길러 꿈을 실현해 주었으면”이라고, ‘씨뿌리는 사람의 기원’을 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믿어주고 있다” “마음써 주고 있다”라는 안심이야말로 어린이가 성장하는 데에 모든 기반이 된다고 봅니다.

개설 32년을 맞이한 ‘교육상담실’

마지막으로 ‘사회전체의 교육력’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창가학회 교육부가 하고 있는 활동의 일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창가학회의 교육부에서는 작은 규모입니다만, 지역공헌의 일환으로 ‘교육 상담실’을 1968년에 개설한 이래 오늘까지 32년간에 걸쳐 봉사활동으로 교육에 관한 상담이나 조언을 계속해 왔습니다. 상담한 사람은 이미 약 28만 명에 달하며 현재도 전국 28곳에서 8백 명의 교육부 멤버가 그 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상담원은 현직 교사와 퇴직자로 전원이 상담의 기초부터 배우며, 실제로 매주 상담을 하여 사례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상담실’은 회원, 비회원을 가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도록 사회에 넓게 열려 있으며 조언이나 상담도 교육상의 관점에서 하므로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또 지난 해부터는 지역과 가정의 교육력 향상을 위해 ‘교육 상담장(相談長)’ 제도를 실시하여 각 지역의 창구역할을 맡아 교육간담회 등을 일본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추진해 가는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 교육상담의 착실한 활동으로 어린이들이 밝게 웃는 얼굴을 되찾아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된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갖가지 문제로 괴로워하는 어린이나 부모를 ‘고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학교나 행정의 상담창구 역할에 더해, 가벼운 마음으로 또 안심하고 상담할 수 있는 곳을 지역에 많이 설치하여 함께 극복해 가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교육부의 교육상담실에서 받는 상담 중에는 ‘등교거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70%로 가장 많고, 그 원인의 거의 절반이 ‘집단괴롭힘’이라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언제까지나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지금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집단괴롭힘이나 폭력이라는 문제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단괴롭힘과 폭력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기풍을 확립하여 사회에 만연한 ‘무관심’이나 ‘시니시즘(냉소주의)’의 풍조를 개선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은 ‘어린이의 행복’을 위한 반석

창가학회도 ‘교육을 위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도전의 일환으로, 또 널리 사회에 ‘평화의 문화’의 토대를 조성한다는 관점에서 앞으로도 강한 의지로 의식계발 운동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아닙니다. 교육의 깊이가 사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교육만이 어린이들의 행복을 위한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21세기를 ‘교육의 세기’로. 앞으로도 나는 이 강한 신념 아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간교육의 조류를 끝까지 넓혀 나가고자 합니다.

어구해설

주1. 시니시즘
냉소주의, 견유주의, 인위적인 사회활동을 부정하고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을 주장하는 태도나 사상으로 사회현상을 비판하긴 해도 직접 참여하지 않는 태도.
주2. 볼셰비즘
급진적인 혁명주의를 말함. 러시아어의 ‘볼셰비키(다수파)’에 유래하며,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파가 통칭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에서 이 이름이 붙었다.
주3. 변신론 (=신정론)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 니츠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전능한 신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왜 모든 악이나 불행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변증하기 위한 변론.
주4. 유마힐
석존 재세 시대, 중인도의 비야리(毘耶離)성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재가 불교자의 대표적 인물. 대승불교의 오의(奧義)에 통했으며 웅변으로 솜씨 있게 방편을 사용해, 불교유포에 공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