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를 육성하자.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 빅토르 위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뒤따를 것이다.” - 월트 휘트먼
소카대학교 개교를 앞둔 몇 년 전, 남녀 청년들이 대학의 첫 건물이 들어설 터를 개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거칠고 메마른 땅 여기저기에 나무 그루터기가 튀어나와 있었고,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학교를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 힘든 수작업으로 인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 피가 흐르는 손. 그러나 미래에 이곳에서 공부할 우수한 학생들을 떠올리며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지역의 몇몇 창가학회원들 이 주먹밥과 다과를 준비해 청년들 지원에 나섰다. 자발적으로 봉사에 나선 이들 대다수는 대학에 다닐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이다.
소카대학교와 관련된 그 누구도 수많은 서민의 공헌과 지원으로 학교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민중에 의해 창립된 대학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대학의 사명은 대학 교육을 받아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소카대학교 설립에 대한 구상은 1950년 도쿄 간다의 니혼대학교 구내식당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은사 도다 조세이 선생님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늦가을의 매서운 추위는 하루가 다르게 깊어져 갔고, 어둡고 참담한 나날이 계속되던 때였다.
3개월 전, 도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신용조합이 중지 명령을 받아, 매일매일 화가 난 채권자들이 도다 선생님의 사무실을 에워싸며, 욕설을 퍼붓고 돈을 요구했다. 그들은 근거 없는 혐의와 비난을 쏟아내며, 협박을 일삼았다. 심지어 어떤 채권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도다 선생님 자택으로 찾아가 괴롭히기까지 했다. 상황은 우리에게 극도로 불리해 보였다.
하나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도다 선생님은 지치고 초췌해져 갔고, 나 또한 인생의 스승을 지키기 위한 고독한 싸움으로 뼛속까지 지쳐버린 상태였다. 피로가 극에 달해 때로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잠잠한 시기를 이용해 도다 선생님은 내게 미래의 구상과 목표를 이야기해주시곤 했다. 내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것은 엄숙하고 명백한 현실이었다. 혹시라도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선생님께서는 내가 선생님의 일을 대신 이어가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바로 그날 간다의 구내 식당에 앉아, 국가의 정체성과 경제 동향을 논하며 선생님께서는 대학 설립의 구상을 밝히셨다.
“다이사쿠, 대학교를 만들자, 소카대학교.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될지도 모른다…… 다이사쿠, 그때는 자네에게 부탁한다.” 그 순간, 내 마음에는 ‘소카대학교’라는 꿈이 밝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선생님과 나의 모습이 궁핍해 보였으리라. 사실, 도다 선생님은 내게 월급도 줄 수 없었고, 겨울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따뜻한 외투 한 벌 사 입을 여유조차 내겐 없었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학 설립의 이야기를 꺼냈었다면, 분명 우리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그 구상은 외면당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선생님과 나는 마음 세계의 왕(王)이었다. 도다 선생님은 “세계 제일의 대학교로 만들자!”고 외치셨다. 그날, 선생님의 가슴속에 뜨겁게 타올랐던 ‘소카대학교’라는 불꽃은 그렇게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 마음 속의 불꽃은 창가학회 초대 회장인 그의 스승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에 의해 불타올랐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제자 도다 선생님에게 “장차, 내가 구상한 가치창조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를 반드시 설립하자”라고 말했다. “내 생애 그것을 해낼 수 없다면, 자네가 이루어주게” "또 한 번은 확신에 차서 “젊은 도다군이 반드시 소카대학교를 설립할 것이다"라고도 하셨다.
은사 마키구치 선생님의 강렬한 바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당장 다음 날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한 자신을 돌아보며 도다 선생님은 극심한 괴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그렇기에 선생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깊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테이유 아마노(1884-1980) 일본 문부성 장관은 “교육 개혁의 중요한 핵심은 인간혁명을 실현하겠다는 확고한 투지다”라고 했다. 그러나 확고한 철학적 기반의 부재(不在)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가, 정부 관료, 대기업의 상반되는 이해관계 때문인지 이 숭고한 이상(理想)은 곧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현재 일본 사회 곳곳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막혔을 때 원점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신념이었다. 집필 당시1930년대, 창립자 마키구치 선생님은 일본 교육이 무의미한 관념론에 치우치거나 – 실제 교습 경험이 부족한 학자들이 서구의 새로운 이론을 교사들에게 부과시키거나- 혹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편협한 국가주의를 주입시키고 있다고 깊은 우려를 표했다. ‘(외국에서) 빌려온 이론에 속박된다’ 혹은 ‘정치권력에 영합한다’ 둘 다 ‘도덕적 용기’의 부족을 여실히 증명한다.
독립적 사고를 위한 그 어떤 용기도 확신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이들의 행복이라는 본질적 목표가 사라져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도대체 마키구치 선생님이 부르짖었던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에게 올바른 도덕적 목표와 지도를 해야 한다’고 가장 크게 외친 사람들이 실은 가장 절실하게 그러한 지도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라고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적했다. 그들의 지성과 도덕성의 결함을 마키구치 선생님은 가차 없이 비판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교육과 의학적 치료를 비교한다. 의사가 약을 잘못 처방하면, 환자를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잘못된 교육도 치명적일 수 있다. 질병에 대한 잘못된 치료는 그 결과가 즉시 나타나는 반면, (잘못된 교육의) 부정적 영향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명백해진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당시 일본의 교육 방침이 파멸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의외침은 냉담하게 무시당했다. 대다수의 교육 종사자들은 “초등학교 교장에 불과한 사람"이 새로운 교육학 이론을 제시하는 일은 주제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반응은 근본적으로 감정적 반발이었다. 참으로 민중에 대한 오만함과 우월감이 얼마나 만연해있는지, 그리고 민중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업신여기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해준다.만일 대학이 배출해낸 사람들이 모두 민중을 경시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대학이란 말인가! 결국 자만심 가득한 그런 엘리트들이 일본과 아시아 이웃나라들을 군국주의의 지옥으로 빠뜨리지 않았는가! 이와는 완전 반대로 마키구치 선생님의마음은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그 애정이 너무나 강렬하여 아이들의 고통만 생각하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비통함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의 제자에게 대학 설립의 사명을 물려준 위대한 학자 마키구치도, 또한 그의 제자인 도다도 대학 교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교육에 있어 가장 필수적 단계라 할 수 있는 초등교육에 헌신했다.1900년 도쿄로 이주하기 전, 마키구치 선생님이 살았던 홋카이도의 차디찬 북쪽 섬, 겨울이면 마키구치 선생님은 학생들의 갈라진 손을 따뜻한 물로 직접 씻겨주며 아픔을 덜어주었다.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는 날에는 어린 학생들을 등에 업고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다.
1920년대, 마키구치 선생님이 오랫동안 교장으로 근무했던 도쿄 미카사 초등학교는 가장 빈곤한 구역 중 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수리하지 못한 깨진 유리창은 종이로 덮여 있었다. 많은 아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낮에는 일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을 위해 별도로 저녁 수업이 만들어졌다. 희미한 가스등 불빛 아래서 피로에 지친 아이들은 졸음과 싸워가며 산수를 비롯한 다른 과목을 공부했다. 가난으로 도시락조차 싸오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마키구치 선생님은 돈을 조달하여 끼니와 간식을 준비해주었다. 행여나 아이들이 불필요한 관심으로 창피해하지 않도록 마키구치 선생님은 수위실에 음식을 갖다 놓았다.
학교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절망적인 가정환경 때문에 느끼는 아이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 ‘교사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확실한 이해 - 인류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정신의 빛에서 바로 창가교육은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창가교육이 전 세계 교육자들 사이에서 환영받는 이유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창가교육은 전쟁 중, 차별이 만연한 사회, 다른 나라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나라인 군국주의 일본의 교육정책과 정면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카대학교의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했다. 책을 쓰고 또 쓰고 계속해서 썼다. 그 인세(印稅)를 모두 대학 건립을 위해 기부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신뢰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전 세계 수십 개의 대학을 방문헀다. 도쿄에 태풍이 불어닥치면, 대학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아픈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결코 내 자신의 노력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모두 학생들이 인생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비롯되었다. 기쁘게도 얼마 전 소카대학교 캠퍼스에 新본부동이 준공되었다. 그런데 더욱 커다란 기쁨은 바로 학생 각각의 생명 깊은 곳에 우뚝 솟은 웅장한 승리의 탑을 보는 일이다. 창가의 사제가 계승한 불꽃, 우리의 목숨을 바쳐 지켜온 그 불꽃을 높이 들고, 장엄한 대승리의 인간교육의 보탑(寶塔)을 건설하라! 여러분 각자의 사명의 무대에서. 올해(2000년)는 도다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다. 중대한 전환점이다. 물질적 사회적 혁명이 20세기의 투쟁이었다면, 인류 그 자체의 혁명이 21세기의 과제일 것이다. 낡은 시대의 암흑을 걷어내고 새로운 여명을 알리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실수란 있을 수 없다. 불꽃을 날려 보내야 한다!
청년의 마음에서!
내면의 불빛을 밝히며!
교육이란 정신의 불꽃을 불태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