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1871년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해안가 도시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은 아라하마, “거친 바다의 해변”이라는 뜻이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소박한 출신 배경을 자랑스럽게 언급하곤 했다. 가난했던 가족을 부양했기에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기회가 되는 한 독서와 공부에 열중했고, 교사로서의 자질도 보였다. 그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마키구치의 학구적 성향을 알아차리고, 그가 교육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돈을 모았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은 22살에 졸업하게 된다.
젊은 시절, 마키구치 선생님은 청춘의 에너지와 열정을 혜택받지 못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쏟아부었다. 마키구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학생들은 교사로서의 그의 노고에 무척 감사해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젊은 교사로서 일하던 무렵, 일본은 “국부와 병력”이란 구호를 외치며, 제국주의 확장을 국가정책으로 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교육 분야에서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국가의 목표에 부합하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는 맹목적인 애국심을 주입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반대로,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렇다면 국민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복잡한 이론과 설명 대신 당신 무릎에 앉아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는 편이 낫다. 이 아이가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마키구치의 초점은 국가가 아니라, 항상 사람이었다. 국가 주권이 강압적으로 우선시되고, 강요되던 시대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신성하고 불가침하다”라는 선언은 그의 강한 인권의식을 반영한다.
1903년 마키구치 선생님은 32살의 나이에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인생지리학”을 발간했다. 이 책은 러시아와 일본 전쟁 전날에 출판되었다. 그 당시 분위기를 살펴보면, 도쿄제국 대학의 저명한 일본 학자 7명이 러시아에 대항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라고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 전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이름 없는 교사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세계 시민으로서 “편협한 국가주의”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사람들의 경각심을 높이는데 힘썼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42살의 나이에 도쿄의 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된다. 그 후 20년 동안 그는 교장으로서 근무했던 학교를 모두 도쿄에서 가장 뛰어난 공립 학교로 발전시켰다.
마키구치의 교육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에 미국 철학자 존 듀이가 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듀이의 철학을 적용해 일본 교육체계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거침없는 교육개혁을 거침없이 외치던 마키구치 선생님은 권력의 끊임없는 조사와 압박에 놓이게 된다. 논란이 되었던 그의 제안 중 하나는 중앙정부의 관료가 지역 학교 운영에 직접 관여하는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또, 그는 세력 있는 집안의 아이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는 오랜 관습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결국 마키구치 선생님은 거물급 정치가의 눈밖에 나게 되어, 축출당하게 된다. 학생, 교사, 부모 모두 마키구치를 변호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심지어 수업 거부 시위를 펼쳐가며 마키구치의 전근 명령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전근한 학교에서도 비슷한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또다시 전근 명령을 받게 되는데, 전근을 승인한다는 조건으로 교육당국에 운동장 보수를 요구했다.
마키구치의 이러한 노력은 학생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며, 학생들과 홀로 코스트에서 함께 죽은 동시대 인물, 폴란드의 훌륭한 유대인 교육자 야누슈 코르착이 보여준 인류에 대한 위대한 애정을 떠올린다.
비통에 찬 공습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강력한 B-29s가 낮고 안정감 있게 하늘을 날면서 장엄한 정복자처럼 나타났다. 미군 비행기에서 나오는 맹폭의 짧고 날카로운 소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합쳐졌다. 소이탄은 폭우처럼 떨어졌다. 화염은 이곳저곳에서 마구 불타며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전 지역이 맹렬한 불바다가 됐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큰불에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부모들은 어린아이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아들과 딸들은 나이 드신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죽음과 파괴의 지옥 같은 악몽에 잡힌 이들은 타는 듯한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지금도 그날에 대해 쓰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다음날 아침 태양이 떠올랐을 때, 내가 살았던 전 지역의 지면까지 타버렸다. 도시는 하네다 공항을 제외하고 분멸했다. 내가 사랑하는 초등학교와 국민학교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쯤 나는 생각에 잠겨 혼자서 걷고 있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가족은 어떻게 될까? 나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타지 않은 도시의 작은 구역으로 갔다. 벚나무의 작은 무리가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꿈만 같았다. 다 타버린 땅거미의 광활한 지역에서 벚나무의 아름다운 색들이 횃불처럼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죽음의 한가운데서 반짝이는 생명의 빛이 있었다. “핀다, 핀다, 벚나무가 피고 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1928년에 불법을 만났다. 불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된 지혜를 나타내고자 하므로, 민중교육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교육을 통한 사회개혁과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불법에서 발견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불법에 귀의한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7세, 그러나 이는 그의 인생의 극적인 마지막 국면의 시작이었다.
2년 후 1930년 11월 18일,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도다 조세이와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체계 1권을 발간했다. 그리고 이 날을 창가학회 창립일로 하고 있다.
“소카(창가)”는 일본어로 “가치 창조”를 뜻한다. 마키구치의 관점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가치는 삶 그 자체다. 듀이의 실용주의를 고려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가치는 삶 그 자체다. 그 외의 다른 가치는 삶이라는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교류와 작용에 의해 발생한다”라고 설명했다. 마키구치의 관점에서 가치의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그것이 인간의 상황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혹은 손상시키거나, 전진시키거나 혹은 저해하는 가에 있다.
창가 즉 가치창조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라는 가장 위대한 선을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데 헌신하며, 가장 힘든 환경 속에서도 가치를 창조하는 인격의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다.
1939년 창가교육학회(가치를 창조하는 교육 사회)의 제1회 총회가 열렸다. 바로 나치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였다. 일본군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국면이 심히 불편했던 마키구치 선생님은 군국주의 파시즘을 정면 비난했다. 당시 일본 대부분의 종교와 종교 단체들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철학적 정신적 기반인 국가신도주의를 지지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짓밟는 행위에 반대했고, 그의 종교적인 신념은 평화를 지향하는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일본 사람들의 오만함은 끝을 모른다”라고 말하며,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일본 국가신도사상 강요에 격분했다.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했던 마키구치의 태도는 다른 문화와 종교적 유산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관용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이렇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5개월 후, 소카교육학회의 정기간행물인 가치창조가 국내 안보국의 명령에 의해 출판을 중지 당했다.
파시스트 군사 권력이 일본 사람들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이미 박탈했으므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군사 정권은 순종적인 양과 같은 대중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사자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양을 이긴다.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천 명의 겁쟁이들보다 더 큰일을 해낼 수 있다.”라고 단호히 확신했다. 모든 악과 부당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키구치의 태도는 당시 권력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는 “사상범”으로 낙인찍혔고, 그의 활동은 “비밀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구치 선생님은 그의 종교적, 도덕적 신념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소규모 좌담회를 계속해서 실시했다. 고소장에 따르면, 그는 전시 2년 동안에 걸쳐 240회 이상의 좌담회에 참석했다고 적혀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경찰이 지켜보는 회합에서 군국주의 파시즘을 계속해서 비난했다. 그의 말은 종종 경찰에 의해 중단되었다.
마키구치와 같은 불법을 신봉한 성직자들조차 신도 부적에 기도하라는 정부의 압박에 굴복하였으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끝까지 거부했다.
1943년 7월, 마키구치와 도다 선생님은 일본의 게슈타포와 같은 군국주의자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은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과 황제에 대한 무례함의 “불경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미 72살이었고, 총 500일에 달하는 1년 4개월 동안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독방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지루한지 물어보며,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나쁜 일을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토론을 제안하곤 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고, 격식 없는 대화를 추구하는 인간교육의 거리낌 없는 달인이었다.
심지어 그는 간수와 심문자에게 불법의 원리를 끈기 있게, 알기 쉽게 설명했다. 공식 증언 녹취록에는 “칭찬 혹은 사회의 질책에 너무 민감하여 나쁜 짓을 하지 않지만, 좋은 일도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은 결국 불법에 상반되는 삶의 방식이라는 그의 견해가 기록되어있다.
불법에서는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도 밝아진다.’라고 설한다. 실제로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눈부신 희망의 빛을 밝히는 낙관적이고, 공헌하는 삶의 모범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다른 심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대동아시아 전쟁”이 일본의 근본적인 정신이 그릇되어 발생한 “국가적 참사”라고 선언한 사실이 쓰여있다. 일본의 침략이 “신성한 전쟁”으로 묘사되고, 언론과 여론 주도자들이 이를 미화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을 때, 마키구치의 주장은 굉장한 용기와 투지를 보여준다.
그가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현재 나는 고령이다. 이곳이 내가 마음을 연마하는 곳이다.”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소. 부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잘 지켜다오.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독방에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색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
그의 편지는 가족에 대한 염려와 배려로 가득하다. 그의 편지를 보면 평정심뿐만 아니라 낙관주의까지 느껴진다.
그는 감옥의 한 통로에 한 구절을 적었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지옥에도 즐거움이 있다.”
숨 막힐 듯한 독방, 사방의 벽, 열기와 추위는 이미 노쇠한 마키구치의 몸에 극심한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는 신념의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의분(義憤)에 불탄 마키구치 선생님은 인권 존엄을 거부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증오로 얼룩지지 않았다.
결국 노쇠와 영양실조로 인해 육체는 쇠약해졌고, 어쩔 수 없이 마키구치 선생님은 병실로 옮겨졌다. 그는 예복을 갖춰 입고, 머리를 똑바로 빗었다. 노쇠했지만 용맹한 걸음걸이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병실로 걸어갔다. 다음날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학회 창립기념일인 1944년 11월 18일에 고이 잠들었다.
죽음의 공포조차 마키구치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 공격성을 형성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불법은 삶과 죽음 모두 영원한 연속성의 필수적 양상이며,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개체라고 설한다. 올바르게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며, 삶과 죽음의 본질을 예리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삶과 죽음 모두에서 환희를 느낄 수 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몹시 추운 감옥에서도, 인간적이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때, 두려움이나 후회 또는 증오의 마음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과 정신으로 만든 자신의 위대한 인생을 그렇게 완성했다.
그의 고요한 죽음은 동시에 새로운 시작과 출발을 의미했다.
도다 조세이는 두 달 후 판사가 “마키구치 선생님이 죽었다”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알려줬을 때 참을 수 없는 비탄과 분노가 그를 엄습했다고 말했다. 그는 눈물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혼자서 신음하며 울부짖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깊은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제자인 도다 선생님은 스승이 죽은 감옥에서 살아나왔다. 스승의 인생을 앗아간 권위주의 세력에 대한 분노는 평화를 위한 새로운 대중 운동을 만들겠다는 맹세와 결의로 바뀌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체계에서 “보신을 위한 본능으로, 악의에 찬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박해하며 힘을 늘리고자 뭉친다. 반대로 선의의 사람들은 언제나 고립되고 약해 보인다…… 선의의 사람들이 결속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적었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제자로서 스승과 같은 목적관을 나눈 도다 조세이는 전쟁 후 황폐함 속에서 선한 사람들을 결속할 운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또, 그의 방법론은 풀뿌리 운동 - 일대일 대화와 소규모 좌담회였다.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존엄을 원칙으로 하는 이 운동은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내면의 지혜를 일깨우며, 나아가 정의와 인도적 가치가 부합하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다.
그의 이론 ‘가치론’에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종교의 타당성은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나 덜어주는가 (이의 가치)’ 그리고 ‘사람들을 얼마만큼 행복하게 해주는가 (선의 가치)’로 규정된다고 설명했다. 마키구치의 순수한 인간주의에서 ‘종교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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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구치의 인생은 파시스트 권력에 대항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전면 투쟁이었다.
그의 용기와 지혜는 다음 세기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계속해서 공명하며 울려 퍼질 것이다. 그는 아무리 숭고한 원칙과 신념도 단결된 민중의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SGI 헌장은 이러한 정신에서 인류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초대 마키구치 회장의 정신은 창가학회 속에 살아있으며, SGI 활동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우리는 그 어떤 권위주의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키구치의 신념과 확신을 먼 미래까지 이어갈 것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니치렌불법의 창시자 니치렌의 유명대로, 다가올 새 천 년을 향해 평화 교육 문화의 민중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확대할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21세기 평화의 세기 실현을 위해 그리고 모두의 승리를 증명하는 평화를 위해 용기 있는 행동을 관철할 것을 결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