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하늘과 땅, 마을과 도시 모든 것이 새로운 빛을 발한다. 벚꽃이 활짝 피듯이 학교를 막 시작하는 학생들의 산뜻한 얼굴도 밝고 빛이 난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 기뻐하지만, 꽃이 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뿌리는 초등학교에서 처음 몇 년 동안 접한 교육을 통해 크게 형성된다. “핀다, 핀다, 벚나무에서 꽃이 핀다…” 1934년 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접했던 교과서가 기억난다. 나는 흥분하며 책을 펼쳤고, 벚나무의 벚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봄 풍경을 봤다. 저 멀리 산이 있었고, 전경(前景)에는 아름다운 분홍색 벚꽃이 있었다. 이 초등학교 교재는 일본에서 최초로 컬러로 인쇄되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기 전해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핀다, 핀다”를 큰 글씨로 적었다.
테지마 선생님은 키가 크고 말랐다.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나 또한 테지마 선생님의 옷 색깔과 머리 스타일, 심지어 그의 특유한 몸짓까지 자세히 기억한다. 어느 날, 테지마 선생님은 나와 전체 학생 중 한 사람을 선발해서 글을 아주 잘 썼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지목된 게 조금 민망했지만, 매우 기뻤었다. 모든 사람은 진심으로 칭찬을 받았을 때 행복하다. 칭찬은 자신감을 키워준다. 정말로 테지마 선생님의 칭찬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의 열망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는 논에 둘러싸인 2층짜리 목재 건물이었던 도쿄 제2하네다초등학교를 다녔다. 몹시 추운 겨울날에는 논의 물이 얼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소란스러운 무리가 길을 벗어나, “이쪽으로!” “이쪽으로!”라고 소리치면서, 논을 가로지르며 학교로 갔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일본은 역사상 어둡고 탄압적인 시기에 들어섰다. 내가 세 살 때 일본이 중국 침략을 시작한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 네 살 때는 국무총리가 암살당하는 무산된 쿠데타가 있었다. 다섯 살이었을 때는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우리가 아직 어렸던 만큼,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힘든 시기에 치는 물결은 심지어 우리 교실까지 닿았다. 교과서의 벚꽃이 피는 쪽 몇 장 뒤에는 명령을 부르짖는 장이 나왔다. “진격하라! 진격하라! 병사여 진격하라!”
또 다른 봄이 찾아왔고, 벚꽃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이때 아버지는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 류머티즘의 공격을 받아 몸져 누워 계셨다. 우리는 미역 가공의 가업을 축소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삶이 나날이 어려워져갔다. 큰형은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나는 3학년과 4학년 때 타케우치라는 남자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그는 교대에서 막 졸업해서 젊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특히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네가 원하는 만큼 똑똑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젊을 때 몸을 강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건강이 중요하다. 공부도 중요하다. 진정한 교육은 그 둘을 합친 것이다.” 이것이 교사로서 그의 신조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키가 작은 쪽에 속했고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타케우치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체력을 기르고 건강해지라고 열렬하게 격려하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진다. 또, 나는 선생님이 올림픽의 의의를 가르쳐주며 올림픽이 어떻게 실시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것을 기억한다. 독일에서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던 해는 1936년도였다. 타케우치 선생님은 세계 평화를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4년마다 대규모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분명히 전쟁을 싫어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평화의 중요성을 믿고 아이들이 평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면서, 시대의 군국주의 동향을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세심한 관리 감각을 뜻하는 사쿠라모리를 벚나무를 돌보고 보살피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쓴다. 사쿠라모리는 벚나무를 돌보며 벚나무가 잘 성장하도록 격려하면서 사계절 내내 벚나무의 안녕을 위해 힘쓴다. 그들이 베푸는 보살핌은 벚나무가 성장하고 미래를 향해 발전함에 따라 삶의 힘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다. 그들은 나무에 대해 그렇게 안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벚나무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무의 성장을 상세하게 관찰하지만 나무들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내버려 둔다. 예를 들면, 처음부터 나무에 지주를 대면, 나무는 지주에 의존하게 되어 스스로 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특히 뿌리가 중요하다. 나무에 대한 한 전문가는 벚나무 꼭대기의 길이가 땅 밑 뿌리의 길이와 거의 똑같다고 말한다. 우리가 나무 몸통 주위에만 물을 주면, 그 나무는 게을러져서 물을 찾기 위해 뿌리를 뻗지 않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는 불굴의 집요함,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나무에 단단한 뿌리가 내리면, 그것은 강한 바람이 뒤흔드는 바위 산의 표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나무는 생명체다. 나무는 기계가 아니다. 모든 벚나무는 개성이 있다. 그들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번창한다. 그러므로 벚나무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에 대한 설명서가 없다. 성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특정 나무의 성질과 특성을 잘 파악하고, 고려해서 나무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 또한 개성이 있다. 각자 자기만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나무를 기르거나 사람을 육성할 때는 그들의 가능성이 잘 자라기 위해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현재는 성적도 저조하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행동이 불량한 아이가 나중에는 훌륭한 일을 해내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갑자기 바뀌며,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이에게 믿음을 가지고 보살핀 만큼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넓혀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들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데 힘을 준다. “자연환경에 대한 보호”에서 보호는 자연이 약하므로 우리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관리는 한없는 성장 가능성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을 나타낸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경외심과 존경이 교육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5학년, 6학년이었을 때의 선생님은 히야마씨였다. 그 당시 그는 25살, 26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의 넓은 이마와 맑고 밝은 눈은 지성과 예리함을 보여 주었다. 그의 수업은 때때로 어려웠지만 항상 흥미로웠다. 그는 휴식 시간 때마다 에지 요시카와의 사무라이 소설인 무사시를 과장된 몸짓으로 포즈를 취하며 각본을 생생하게 낭송해주었다. 우리는 소설에 묘사된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우리는 무사시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과 경쟁자 검객인 코지로가 우리 바로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히야마 선생님은 1년이 걸렸지만 소설 전부를 우리에게 읽어주셨다.
한 수업시간에서 선생님은 큰 세계지도를 우리 앞에 펼쳐놓고,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의 중간을 가리켰다. 선생님은 “그렇군!” 하고 대답했다. “너는 둔황을 가리켰구나. 거기에는 굉장한 보물들이 많이 있단다.” 그 순간부터 유명한 실크 무역로에 있는 사원(寺院)과 페인트칠이 된 동굴이 있는 오아시스 도시 둔황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가장 큰형이 군인으로 보내진 곳이기 때문에 중국을 가리켰을지도 모른다.
형은 내가 4학년 때 선발되었다. 다른 두 형들도 병역을 위해 소집되었다. 아버지의 류머티즘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세 형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도움이 부족했기에 우리 가족의 재정 상황은 더 악화되어갔다. 5학년 때는 살던 집을 팔아서 같은 지역에 있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원래 집에는 큰 연못과 벚나무가 있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내가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벚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종 모양의 꽃들이 푸른 눈부신 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큰 나무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이사 때문에 학교를 옮기지 않게 되어서 기뻤다.
가족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나는 신문 배달을 하는 일을 구했다. 여전히 밖은 어두웠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 김 양식 일을 도왔다. 그 일을 마치고, 신문을 배달한 뒤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노리 해초의 말린 판을 선반에서 잡아당기는 일을 하며 다시 가족 사업을 도왔다. 그리고 나서는 야간 신문을 배달했다. 밤에는 불순물을 제거하며 김을 닦는 일을 했다. 나는 바빴던 나날을 기분 좋게 회상한다.
내가 6학년이었을 때는 간사이로 수학여행을 갔다. 우리 가족은 4박 5일 동안 떨어져 있었다. 집을 떠나 처음으로 여행을 가게 되어 나는 매우 흥분했다. 어머니가 어떻게든 어렵게 구하신 약간의 용돈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그 돈을 친구들에게 한턱내는데 썼다. 그러자 첫날 막바지에 돈이 거의 없어졌다. 히야마 선생님은 여행 내내 나를 지켜보셨던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머물고 있었던 숙소의 계단을 올라갈 때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고는 “다이사쿠, 네 형들 모두 전쟁 때문에 떨어져 살고 있으니, 네가 부모님에게 여행 기념품을 사드려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했다. 물론 그의 말이 맞았다. 내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히야마 선생님은 웃으면서 나를 아래층으로 불렀다. 그는 내 손바닥에 약간의 돈을 쥐어주셨다. 내 생각에 1엔 지폐 두 장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아주 큰 돈이었다. 나는 행복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선물을 드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로 “히야마 선생님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가 나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신 거라고 느끼지 않는다. 많은 학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선생님이지만,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학생이 있었던 선생님이셨다면,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하셨을 것이다. 우리를 키워준 “토양”이었던 가족 상황에 대해 잘 아셨고, 우리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시며, 모두를 똑같이 보살피셨다. 선생님이 졸업식 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눈물이 뺨에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선생님의 따뜻한 애정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1940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네다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갔다. 앞으로 2년 동안의 선생님은 우리가 “해적 씨”라고 부르던 오카베 선생님이었다. 그는 일본 서부지역의 오카야마에서 오셨다. 그는 자신이 과거세에 고향 근처에 있는 내륙 바다를 항해하는 해적의 리더였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웃음 짓게 하셨다. 그는 칠흑 같은 머리색에 키가 컸으며, 잘생기고, 지적인 외모를 가졌다.
우리 교실에는 여자아이들 없이 약 40명의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오카베 선생님은 자주 나에게 신체적으로 강해지도록 운동을 권장하셨다. 선생님은 스모 레슬링을 좋아하셔서 우리에게 다양한 스모 기술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몸집이 작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여름에는 셔츠를 벗고 타마강으로 달려가 수영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오카베 선생님이 아주 무섭게 보였지만, 그를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내가 다소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생전 그가 나를 꾸짖은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 번은 우리 학급의 학생 중 한 명이 다른 선생님에게 맞았다. 오카베 선생님이 그 소식을 듣자마자 교원실으로 뛰어들어가, “누가 우리 학생을 때렸습니까?”라고 소리치셨다.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겉보기에 거칠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배려와 애정을 느꼈다.
내가 하네다 심상 소학교 2학년이었을 때, 학교 이름이 하기나카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이것은 아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군국주의의 함축으로 가득한 법인 국민학교법에 규정된 것이었다. “황제에 충성하는 국민들”, “훈련”, “집단 훈련”과 같은 용어들은 학교생활의 주요소가 되었고, 많은 학교의 체육관은 무술 훈련소로 전환됐다.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더 처참한 태평양 전쟁의 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 당시 지도자들의 오만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그들은 일반 시민의 안녕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위협과 잘 짜여진 구호로 나라를 전쟁의 깊은 구렁 속으로 몰아넣었다. 삶은 나날이 더 어려워져만 갔고, 잘 타는 나무인 벚나무는 연료로 쓰이기 위해 하나둘씩 베어졌다. 내가 많이 좋아했던 우리집 정원에 있던 오래된 나무도 베어졌고, 그 자리에 군용물자 공장이 세워졌다.
교육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주문을 거는 굉장히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국민학교”의 학급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중국 본토에 군인이나 민간 식민지로 입대를 지원했다. 학생들은 새로운 시대의 개척 영웅이 되는 것이 애국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나 또한 졸업한 뒤 해군에서 학생 조종사가 되길 원했다. 가족들이 나 없이 어떻게 잘 지낼지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몰래 지원서를 보냈다.
해군 대표자가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 남자를 내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 아들 모두 군대에 있다. 넷째도 이제 곧 간다. 정말 내 다섯째 아들까지 데려갈 계획인가? 더 이상은 안 된다. 이걸로 충분해!” 내가 집에 귀가하자, 아버지는 나를 강하게 질책하셨다. 나는 전에도 또 이 이후에도 이렇게 엄하게 꾸짖음을 당한 적이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그동안 아버지 마음속에 간직했던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졸업 후 나는 니가타 제강소에서 일을 했다. 전쟁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갔고, 패배가 임박해 오는듯한 강렬한 느낌도 받았다. 전쟁의 마지막 해였던 1945년, 도쿄 공습이 설날에 시작됐다. 우리의 일상은 전쟁과 공습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봄이 왔을 때 남아 있던 벚나무들은 자신의 본질에 늘 솔직하고 진실했듯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4월 15일의 밤, 벚꽃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도쿄 남쪽에 거대한 공습이 있었다.
비통에 찬 공습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강력한 B-29s가 낮고 안정감 있게 하늘을 날면서 장엄한 정복자처럼 나타났다. 미군 비행기에서 나오는 맹폭의 짧고 날카로운 소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합쳐졌다. 소이탄은 폭우처럼 떨어졌다. 화염은 이곳저곳에서 마구 불타며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전 지역이 맹렬한 불바다가 됐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큰불에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부모들은 어린아이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아들과 딸들은 나이 드신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죽음과 파괴의 지옥 같은 악몽에 잡힌 이들은 타는 듯한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지금도 그날에 대해 쓰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다음날 아침 태양이 떠올랐을 때, 내가 살았던 전 지역의 지면까지 타버렸다.
도시는 하네다 공항을 제외하고 분멸했다. 내가 사랑하는 초등학교와 국민학교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쯤 나는 생각에 잠겨 혼자서 걷고 있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가족은 어떻게 될까? 나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타지 않은 도시의 작은 구역으로 갔다. 벚나무의 작은 무리가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꿈만 같았다. 다 타버린 땅거미의 광활한 지역에서 벚나무의 아름다운 색들이 횃불처럼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죽음의 한가운데서 반짝이는 생명의 빛이 있었다. “핀다, 핀다, 벚나무가 피고 있다…”
그 당시에는 심지어 벚나무가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후회의 속삭임 없이 바람에 용감하게, 황급히 흩어지는 벚꽃처럼 되는 얘기를 들어왔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벚나무들은 그러한 왜곡을 거부하고 삶에 대해 강하게, 장엄하게 말했다. 벚나무들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아라! 완전하고, 깊이 있는 인생을 살아라! 절대 삶을 멈추지 마라! 겨울보다 오래 살아, 네 고유의 본질을 꽃피워라!고 내게 말했다. 강한 감정이 샘솟아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는 다 타버린 공장 건물의 벽에 분필 한 자루로 시(詩)의 메시지를 적었다. 그 당시 긴급 상황이 일어났을 때 가족들이 그들을 찾을 수 있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분필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시(詩)에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내 시(詩)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어떤 시인은 “뿌리치는 꽃, 남아있는 꽃. 심지어 이것들도 다 흩어질 것이다.”라고 썼다. 나는 흩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17살이 되었다.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학교와 배움에서 멀어지게 했다. 나는 공부하고, 배우고, 책을 읽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나는 청춘 시절의 사랑하는 선생님들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는 오늘날까지 많은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오카베 선생님은 나에게 모든 역경 속에서도 강하게, 끈기 있게 살아가라고 촉구하며 편지를 쓰신 적도 있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나무가 더 크게 자랄 때마다, 그것에 저항하는 바람도 더 크게 분다. 바람과 눈을 견뎌내기 바란다”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1973년 토치기에서 히야마 선생님과 재회할 수 있었다. 선생님과 사모님이 나를 보기 위해 버스로 한 시간 반을 이동했다. 나는 선생님을 30년 넘게 보지 못했지만, 많은 아이들을 육성하며 멋진 일을 해내신 훌륭한 교육자라는 아우라가 여전히 있었다. 그는 “전혀 쉴 시간이 없는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그의 시선은 오래전 수학여행 때처럼 따뜻하고 상냥했다.
그의 앞에 앉자, 나는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학생에게 있어서, 선생님은 항상 선생님이다. 선생님에게 있어서, 학생은 언제나 학생이다. 진정한 스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지식을 전해주는 스승을 만나기는 쉬우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다.
초등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초등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어려운 일을 잘 해내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굉장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가 초등학교 교사보다 더 중요한가? 대학교수가 고등학교 교사보다 중요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론가가 종종 자신이 현역보다 낫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잘못된 사고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건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는 건축가는 실제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보다 결코 뛰어나지 않다. 농업 전문가는 실제로 야채나 쌀을 농사짓는 농부보다 더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론을 세우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벚나무와 다른 꽃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육자의 삶 또한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르치는 것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눈에 띄지 않는 일이자, 끊임없는 성실함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미래를 육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 덕분에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이 강하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초국가주의 당국의 권력이 일본 사회를 강하게 억누르는 어두운 시기에, 나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위해 인류의 중요한 빛을 떠받쳤다. 자신의 직종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오늘날의 교사들과 같이 정권의 교육 분야 침해에 대항해 싸우면서도 학생들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학생들을 확실히 포용해갔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복이 인생의 기쁨 중 하나라면,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