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논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인생에 철학을 적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고한 미국 델라웨어 대학 철학과 교수 데이비드 노튼 박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간 사람이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1871-1944) 창가학회 초대 회장의 교육과 교육철학에 대해 논하며, 노튼 박사는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을 전한다.
“마키구치 회장은 ‘모든 인간에게는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는 타고난 갈망이 있다.’라는 심오한 진리를 연구했습니다. 이것을 어린아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걸음을 처음 배워 첫 발걸음을 내디딜 때, 아이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히 빛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의 걸음을 멈출 수가 없게 되지요. 아이들은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합니다. 배우려고 합니다.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마키구치 회장의 인식은 바로 교육이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는 타고난 갈망’을 죽이거나 억눌러서는 안 된다. 반대로 교육은 그 열망을 키우고 고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 일본의 교육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 미국의 교육도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는 그 타고난 갈망’을 으스러뜨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튼 박사는 현재 일본교육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일본의 엄격하게 규제된 교육제도는 아이들의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망을 파괴하고 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전해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수업을 듣는 여학생 한 명이 다른 학생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학생은 매일 책상에 앉아 바닥만 쳐다봤다. 표정 없는 얼굴과 흐리멍덩한 두 눈. 느릿느릿한 움직임…… 학급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무시했다.
교사는 그 학생을 돕기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그는 자신에게 태연히 말을 건넨 동료 교사 때문에 화가 났었다: “인간은 과일과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20-30%는 항상 쓸모가 없어.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차피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는 ‘정말 그럴까? 지능검사 결과도 매우 낮은 걸로 미루어보면 진짜로 이 학생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일까?’라고 고민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교사는 그 학생이 플라스틱 조각을 한 데로 모아서 박스에 깔끔하게 맞춰 넣는 퍼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창문을 통해서 보고 있자니, 학생이 퍼즐 맞추기를 꽤 힘들어하는 듯했다.
도와주려고 학생에게 다가간 그 순간, 그 학생은 모든 조각을 박스 안에 완벽하게 맞춰 넣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만세! 만세!”라고 외쳤다. 학생의 얼굴은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런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 아이도 웃을 수 있었구나! 빛날 수 있었구나! 누구보다 간절히 이해하고 싶고, 성공해내고 싶었구나!’
선생님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 ‘어떻게 감히 학생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교사가 아닌가?’ ‘전문가가 아닌가?’ ‘모든 학생들이 졸업할 때 자신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교실문을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닌가?’
그런데 자신은 그만 이 어린 학생에게 열등감을 심어줬던 것이다. 학생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학생의 잘못이라고 정하고, 교사인 자신은 학생을 포기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학생이 수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6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있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교사는 저학년 때부터 똑똑한 학생이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느끼는 공포와 부끄러움 그리고 절망감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 선생님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라고 말했을 때,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 못한 것인지조차 모른 채, 어쩔 수없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그 당황스러운 느낌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쩌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저 어떤 학생들은 똑똑하지 못하다, 따라서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믿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는 일류 대학의 졸업생인 학생의 부모님이 집에서 그 학생을 항상 ‘멍청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학생은 “제가 세어 봤어요. 저는 하루에 20번씩 멍청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라고 고백했다. 당연히 학생은 자신이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는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매일 적어도 5번 이상 학생을 칭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학생의 마음속에 있는 비난의 얼룩을 다 씻을 때까지 계속해서 “똑똑하구나, 영리해!”, “아주 잘했어!”라고 격려해주었다. 또, 그는 학생의 부모님에게도 딸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심지어 아주 작은 성취에도 학생을 아낌없이 칭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부단히 노력한지 1년이 지났을 때, 학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과정은 굉장히 어려웠지만,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간 학생은 마침내 배움의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학생이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그것을 정말 성취할 수 있다는 자각이었다. 나중에 그 학생은 대학을 졸업하였고, 현재는 약사이다.
그 교사는 회상한다. “아주 작은 실패도 아이의 자신감을 무너뜨릴 수 있고, 아주 작은 기폭제가 아이의 폭발적인 성장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 교사의 도전은 모든 아이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시험 점수는 학생들이 특정 방식으로 빠르게 질문에 답할 수 있는지 만 보여준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느리게 생각한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특정 흥미가 있는 분야에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능가하기도 한다. 누가 정말로 “똑똑한지”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학교가 학생들은 단지 시험 점수로 평가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을 저버린다면, 또 학생의 자신감을 약화시키고, 학생들의 특별한 개성을 파괴시킨다면, 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당하신 말씀이다! 아이들은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의욕으로 가득하다. 노튼 박사는 아이들이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기쁨에 대해 묘사한다. 확실히 이 성취의 기쁨은 아이의 정신을 완벽하게 나타내는 상징이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기쁨을 “가치 창조의 행복”이라고 했다. 노튼 박사는 이것을 “자기실현의 행복”이라고 묘사했다.
행복으로 가는 문은 안에서 열 수 있다. 인간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것은 불법의 목적인 동시에 인간 교육의 목표이다. 교육의 진짜 의미는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에 있다. 불법의 본질 또한 우리 마음에 내재된 선량함을 기르는 것이다.
노튼 박사에게 있어서 철학 연구는 관념적인 지적 추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철학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신념 때문에 노튼 박사는 자신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명령만 내리고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개탄했다. 그는 교육자, 정치가, 혹은 종교 지도자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박사는 창가학회가 창립 이래로 일본의 모든 탄압적인 권력에 저항하여 싸워온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창가학회가 일본이 50년, 60년 전의 권위주의적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세력에 저항해 오늘날까지도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창가학회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 민주주의를 강화시키는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박사는 민중의 내적 동기와 독립적 사고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민중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게 하는 움직임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권력은 마키구치 철학의 우월함 때문에 그를 억압한 것이다. 마키구치 교육 철학의 근본은 아이들이 권력의 요구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독립적인 정신을 기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노튼 박사는 창가학회에 계속 가해지는 박해가 민중의 독립을 추구하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권력의 반발로 보았다. 미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창가학회와 같이 ‘내적 자발성’을 추구하는 세계적 단체는 현재 일본의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볼 때, 그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것 같다고 인정했다. 박사는 타인을 혹은 특정 그룹을 단지 다르다거나 전형적 틀에 맞지 않는다 해서 위협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 독선적인 마음이라고 역설했다.
교육, 정부, 종교 그리고 학문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노튼 박사의 신념이었다. 그는 인간주의를 실천하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박사가 대학에서 가르쳤을 때, 학생들은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곤 했다. 결코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학생들을 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박사에게 무엇이라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확실히 물은 위로 흐르지 않듯이, 사람들은 자신을 경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노튼 박사는 학생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관점에서 보는 기술을 연마했다.
작년 7월 노튼 박사는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이미 너무 늦어져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65세로 생을 마감했다.
노튼 박사는 다른 학자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아마도 그가 인간주의의 본질을 깊게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의 교육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성격과 일치했다.
마키구치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업을 지속했고, 그 당시 일본에서 학자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필수였던 유명 제국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처음 창가교육학체계를 발간하려 했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쉽지 않은 위업인 교육 이론을 감히 초등학교 교장에 불가한 사람이 제안하다니! 무모하고 오만하다고 맹공격을 받았다. 정부의 교육 관계자들은 연구는 은퇴 후 취미생활로 하라고 경멸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오로지 천만 명의 아이들과 학생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어려운 현실과 ‘시험지옥’, 그리고 졸업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지금의 이 개탄스러운 상황이 다음 세대까지 계속되는 것을 막고 싶다!”
‘아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으로 모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교육을 하고 싶다!’ 이것이 마키구치 선생님 동기(動機)였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이들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그들이 현재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의 길”이라는 실험 증명된 교육 방법을 만들어냈다.
나의 은사 도다 선생님이 마키구치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신 말씀에는 창가교육의 본질이 담겨 있다. “저는 가장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을 훌륭한 학생으로 만들겠습니다.”
이 말은 성적이 나쁜 학생으로 시작한 아이는 없으며, 아이에게 스스로 추론하고 판단하는 사고의 기본을 가르친다면, 어떤 아이도 뛰어난 학생이 될 수 있다는 도다 선생님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불요불굴의 믿음을 보여준다. 또, “앵매도리”의 다원적 철학과 매우 대조되는 행위 즉 학업 성적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못 따라오는 학생을 냉담하게 잘라내는 평준화를 향한 뿌리 깊은 경향에 대한 불타는 분노였다.
노튼 박사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교육자들이 종종 쓰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는 구절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들이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행위라고 했다. 이는 범죄이기도 하다. 노튼 박사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배움의 기쁨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들이 유아기 때, 첫 발걸음을 뗀 순간 빛나는 얼굴처럼, 우리는 아이들이 배우는 기쁨을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튼 박사는 우리의 가치창조 운동이 이러한 도전에 기여한다고 확신했다. 박사가 소카학원을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모든 아이들의 눈이 빛나고 있어요.” 라고 그는 말했다. 박사는 “창가” 또는 가치 창조라는 이름을 아주 좋아했고, 창가학회와의 만남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영광이라고 여겼다. 박사는 마지막까지 깊은 긍지를 가지고 소카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와 함께 받은 소카대학교 배지를 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