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이셨던 마키구치 도다 선생님과 달리, 나는 교육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실제 교실에서 가르쳐본 경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창가교육기관을 창립하여, 이제 창가교육의 사상과 원칙을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키구치 그리고 도다 선생님의 제자로서의 나의 사명입니다.”
- 이케다 다이사쿠
이케다 선생님의 교육관 형성에 영향을 두 가지 요소는 첫째,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 겪었던 그 자신의 교육경험과 둘째, 그의 스승이자 교육자인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영향이다.
“하네다 고등 소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을 때, 학교의 이름이 하키나카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어린이들을 군인으로 바꾸려는 군국주의 사상에 물든 ‘국민학교법’에 의해 명해졌다. ‘천황의 충성적인 국민’ ‘교련’ ‘집단 교련’ 등과 같은 용어가 학교생활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고, 많은 학교 강당이 무술을 연마하는 훈련장으로 탈바꿈했다.”라고 이케다 선생님은 수필에서 1930년대 후반 군국주의가 학교에 미친 영향을 묘사한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위해 청년들을 준비시키는 교육을 시행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이케다 선생님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28년에 태어난 이케다 선생님에게는, 어린이들을 국가의 맹목적 도구로 만들어 내기 위한 군국주의의 부정적 교육 경험이 그의 교육관과 관심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국가가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체제를 아이들에게 강요할 때, 참된 교육자의 역할을 보여준 몇몇 교사의 인격과 모범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었다.
“그 어둡고 참담했던 시절, 극단적인 국가주의 권력이 일본 사회 전체를 강압했을 때, 나의 선생님들께서는 학생들을 위해 위대한 인간성의 불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선생님들은 교육계에 침범한 정치의 힘에 투쟁하는 동시에 학생들을 포용하고, 생명을 교류하셨습니다.”
교육자 회의 강연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인간주의 교육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으로 인간적 교류의 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교사들이 학생들과 성실하고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짧은 말일지라도 ‘정말 잘했구나!’ ‘포기하지 마라!’ ‘나는 너에 대한 기대가 크단다’ 등과 같은 칭찬과 ‘고맙구나’ ‘절대 잊지 않을게’ 등의 감사의 표현은 어린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아직도 선생님 으로부터 들었던 그러한 말들을 나는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간의 깊이 있는 교류를 강조하는 것이 아마도 창가교육을 실천하는 해답이라 하겠다.
청년 시절 이케다 선생님(왼쪽)과
스승 도다 선생님 (1955년)
전후 이케다 선생님은 야간학교(현재 도쿄후지대학)에 등록한다. 동시에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도다 조세이 밑에서 일하게 된다. 도다 선생님은 뛰어난 사업가인 동시에 교육자였다.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 직제자로 스승인 마키구치 선생님과 함께 창가학회를 창립한다.
전쟁 후 초인플레이션의 상황 속에서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심각한 경영난에 부딪혔을 때,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의 사업재건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 이후 거의 10년간 도다 선생님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매일 아침 이케다 선생님에게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교습한다. 도다 선생님은 최고의 학부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수준의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도다 대학”이라고 부르는 이 가르침을 통해 창가교육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도다 선생님에게서 받은 이케다 선생님의 훈련은 SGI 운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재육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청년 육성에 헌신하는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독서와 활발한 사회참여를 통해 거시적인 시각을 가질 것을 격려하며, 그의 스피치에 자주 세계문학작품의 교훈을 인용하고, 역사적인 인물의 삶을 소개한다. 또한 주목할 일은 이케다 선생님이 끊임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특히 청년을 격려 하고, 직접적인 만남을 가지려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