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리고 있는 지구정상회의(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 환경개발서밋)에 즈음하여 세계1백83개국의 국제창가학회(SGI)를 대표하여 저의 소감 일부를 말하고자 합니다.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지구서밋)’가 있은 지 어언 10년
‘지속가능한 개발’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어 몇몇 분야에서 개선이 있었지만 약속한 합의가 충분히 달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환경이 악화되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21세기에도 바뀌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기술’ 그리고 ‘자금’ 등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감’이며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 아닐까요.
지난 6월, 태평양에 떠 있는 ‘바다의 보석상자’라고 일컫는 파라오공화국의 토미 레멘게사우 대통령을 뵈었을 때도 이 문제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지구온난화는 파라오 국민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져 바닷물이 내륙까지 들어옵니다. 아름다운 섬의 자연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또 엘리뇨현상으로 가뭄이 일어납니다. 산호초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수온이 크게 높아져 산호가 하얗게 죽고 맙니다.”
대통령은 파라오가 직면한 위기를 이렇게 말하면서 온실가스를 삭감하기 위한 대체에너지의 연구와 도입에 대처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눈앞의 위기를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행동’을 개시하는 21세기는 이런 의욕적인 도전을 국가차원뿐만 아니라 풀뿌리 민중차원에서 힘차게 추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지구정상회의(환경개발서밋)를 위해 지구평의회가 제작한 영화 ‘조용한 혁명’에서는 그런 도전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는 인도의 니미마을에서의 수자원문제와 슬로바키아의 젬플린스카 시라바호수의 환경오염문제, 케냐의 삼림보호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SGI도 취지에 찬동하여 제작에 협력해 왔습니다. 영화의 일관된 내용인 ‘한 사람이 세계를 바꾼다’는 메시지야말로 곤란한 과제에 정면으로 대항할 ‘용기’와 ‘희망’을 준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21세기를 ‘환경과 공생하는 세기’로 만들기 위해 그 기반이 될 ‘행동계획’의 채택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정상회의는 각국 결의의 척도를 평가하는 리트머스시험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그 성패는 국익의 대립을 초월한 ‘인류의 이익’ ‘지구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얼마나 결실 있는 토의를 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겠지요.
또 이들 제안에 맞추어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계몽의 중요성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구환경문제 해결에 대처하기 위한 글로벌한 ‘민중의 연대’를 어떻게 구축하고 더욱 강고한 것으로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논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환경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통된 미래를 위해 마음을 합하여 노력한다 - 그 원동력이 되는 것은 뭐라고 해도 ‘교육’입니다. 그래서 우리 SGI에서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의 10년’의 제정을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유엔의 ‘인권교육을 위한 10년’을 잇는 형태로 2005년부터 10년간을 통하여 ‘지속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교육을 추진함과 동시에 환경교육을 보급하기 위한 국제협력을 강화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실시된 서밋의 제4회 준비회합에서 이 제안은 ‘행동계획’의 최종 초안에 포함시켰습니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을 추진하는 일의 중요성은 유엔환경개발회의(1992년 리우) 성과인 ‘의제21주1’로 발표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5년 전 그리스의 국제회의에서 채택한 ‘테사로니키선언’주2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지속가능성’에 있습니다. 선언에서는 “지속가능성 이라는 개념은 환경뿐만 아니라 빈곤, 인구, 건강, 식량확보, 민주주의, 인권, 평화도 포함한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환경문제는 다른 문제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인간의 삶의 자세’나 ‘문명의 본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문제해결의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교육의 10년’을 ①지구환경문제의 현상을 알고 배울 것 ②지속가능한 미래를 목표로 삶의 자세를 재정립할 것 ③문제해결을 위해 함께 일어서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임파우어먼트(empowerment: 힘을 주는 작업)의 3단계를 거쳐 종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상을 알고 배운다 첫째는 이해와 인식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삼림이 얼마나 훼손되고 대기와 물 그리고 토양이 얼마나 오염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을 하나하나 알고 배우는 것에서 일체는 시작합니다.
그 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원인과 사회적 배경을 함께 생각한다. 또 현실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고 느낀 고통을 가슴에 새긴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결의가 나오는 법입니다.
가장 감성이 풍부하고 흡수력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창조성이 크게 신장하는 어린시절이야말로 학교교육현장에서 환경교육을 실시하는 의의는 참으로 큽니다.
‘자연과 환경’이나 ‘환경’이라는 과목을 설치하여 환경교육을 실시하는 나라의 예도 있습니다만, 어린이들에게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지구를 지키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어린이들의 미래’를 지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창립한 간사이소카학원에서도 ‘NASA(미항공우주국)’의 어스캄(국제우주정거장에 탑제한 디지털카메라를 학생들이 원격 조작하여 지구를 촬영하는 교육프로그램)에도 참가하고 있어 지구가 처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면에서 큰 효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부터 각국의 정책담당자뿐만 아니라 교육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교류를 위해 ‘세계 교육자 서밋’의 개최를 호소해 왔습니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의 10년’을 시작할 때는 각국의 교육자가 서로 환경교육의 대처를 소개하고 의견을 교환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사회적 대응으로서도 지구환경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기회를 갖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 SGI에서는 유엔환경개발회의(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의 공식관련행사로서 브라질에서 개막한 ‘환경과 개발전시회’를 비롯하여 미국에서의 ‘환경과 인권전시회’, 일본에서의 ‘에코 에이드’ 등 각종 순회 전시회를 통하여 의식계몽활동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둘째는 윤리관의 확립과 삶의 자세를 재정립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여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환경교육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규모가 너무 크거나 너무 복잡한 경우는 정보와 지식을 습득했다고 해도 자신과 관련성을 찾기 힘들어 현실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전부 환경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지구적 규모에서 플러스(긍정적) 변화를 일으키는 ‘힘’과 ‘사명’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다는 자각을 촉진시키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앞서 언급한 ‘테사로니키선언’에도 “지속가능성은 최종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규범이고 거기에는 존중해야 할 문화적 다양성이나 전통적 지혜가 내재되어 있다”라고 있습니다만,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배양된 정신유산이나 문화적 전통에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철학과 윤리를 배워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작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사무총장을 역임한 모리스 스트롱 씨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 온 ‘지구헌장’은 그 성과의 집대성이자 환경교육의 교재라는 면에서도 대단히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구헌장은 ‘생명공동체에 대한 존엄과 보호’ ‘생태적 온전성’ ‘사회적·경제적 정의’ ‘민주주의, 비폭력 그리고 평화’의 4가지를 축으로 하여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 가치와 원칙을 망라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과 함께 특필해야 할 것은 지구헌장이 민중헌장(People′s Charter)이라 불리는 것처럼 작성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와 전통의 정수를 파고드는 노력을 거듭함과 동시에 민중의 풀뿌리 차원의 대화나 토의를 끈기 있게 계속하는 가운데 조문을 정리했다는 점입니다 SGI에서도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지금까지 심포지엄이나 세미나 등을 각지에서 개최하면서 지구헌장의 이념과 의의를 소개하고 그 보급에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지구헌장을 더욱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학교와 지역에서 저마다 특성을 고려한 환경문제의 제재(題材)를 언급하며 헌장을 배우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케냐의 그린벨트운동에서는 “사막화는 북쪽에서 번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뜰에서 시작한다”라는 말을 모토로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어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묘목을 심는 등 지금까지 2천만 그루를 식수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식들도 묘목을 돌본다거나 혹은 누가 심은 나무가 가장 많이 성장했는지를 서로 경쟁함으로써 묘목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문제를 생각하고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는 의미는 큰 것이 아닐까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창가학회 초대 회장은 “향토는 세계의 축도(縮圖)다”라고 하여 인간의 역사와 자연과 사회의 교차점이라 할 수 있는 ‘향토’에 뿌리를 둔 학습을 통해 ‘세계’로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향토(지역)’에서 ‘세계’를 보고, ‘세계’에서 ‘향토’를 보는 순환작업이야말로 실제생활에 뿌리를 둔 자연관과 윤리관을 양성하는데 불가결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는 구체적(具體的)인 행동으로 한발 내딛는 ‘용기’와 ‘힘’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통(共通)의 행동규범을 정했다 해도 그것을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어 실천하는 사람들이 증가(增加)하지 않으면 힘든 현실을 뚫고 나가는 힘은 되지 않습니다. ‘정해진 것이니까 따른다’는 수동적인 자세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표면적인 규율’이나 ‘타율적(他律的)인 의무’로 받아들여져 버리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무너지고 마는 나약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윤리를 자신의 ‘맹세’로 고취하여 그것을 실천할 것을 ‘사명’으로 하고 ‘환희’로 만들어 가는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와 대담을 진행하고 있는 미래학자 헤이젤 핸더슨 박사가 환경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한 원점(原点)은 대기오염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걱정한 점에 있었습니다. 박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의 미래를 좋게 해 주고 싶다는 강하고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거기에 어떤 박해에도 지지 않고 철저하게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자연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앞에 두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심정의 발로로써 행동한다’ 바로 그런 자발능동의 내발적인 정신의 뒷받침이 있었을 때 비로소 윤리도 ‘인간의 얼굴’을 하고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에토스(도덕적 기풍)의 원천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공간적으로는 온갖 생명과 이어지고 시간적으로는 앞으로 태어날 미래 세대나 생명과의 일체성으로 이끄는 ‘생명존엄’의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명의 일체성’이나 ‘생명의 연관성’에 대한 관점은 고래로 여러 전통문화 속에서 성장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현대에도 많은 원주민 사이에서 살아 있는 지혜로 계승되고 있어 겸허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미 아마존의 데사나족은 ‘어떤 종류의 살아 있는 것도 고립(孤立)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 아래 생태계와 조화를 도모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또 북미(캐나다)의 원주민 이로코이족 사람에게는 “모든 사물은 지면 밑에서 아직 얼굴이 보이지 않는 7세대 뒷날의 자손까지 배려하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있어 모든 동물이나 식물을 ‘형제’로 부르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많은 종교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불법(佛法)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멀리 사는 것도, 가까이 사는 것도, 이미 태어난 것도, 지금부터 태어나길 원하는 것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복하여라”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열리는 리우+20회의에 세 가지 각도에서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생명의 연관성을 설하는 ‘연기(緣起)’라고 불리는 세계관에 근거합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복하여라’로 끝맺고 있는 점입니다. 즉 그 핵심은 환경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기를 ‘변혁의 주체’로 받아들여 다른 생명과 의식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환경을 다이나믹하게 변혁하려는 강인한 의지력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자애’의 일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과 타인의 생명이 풍요롭게 서로 촉발하면서 자타 함께 ‘생명의 환희’를 일으킨다. 타인에게 문을 여는 ‘생명의 확대’ 즉 자기 생명을 ‘대아(大我)’에 입각시키는 것에 불법(佛法)의 생명관의 안목이 있습니다. SGI의 ‘인간혁명’운동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내면의 변혁에 도전하면서 ‘생명존엄’의 사상을 사회에 꽃피워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키구치 초대 회장은 ‘창가교육학체계’에서 ‘수력(受力)의 생활’ ‘의타적 생활’도 ‘자력의 생활’ ‘독립적 생활’도 아니라 ‘수력(授力)의 생활 - 공헌적 생활’이라는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의타적 생활’이란 확고한 자신을 갖지 못하고 환경에 좌우되고 마는 삶의 자세입니다. 또 ‘독립적 생활’이란 자신의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에 대한 눈길이 약한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것에 비해 ‘공헌적(貢獻的) 생활’이란 자연환경을 포함한 타자(他者)와의 관계성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타 함께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삶을 말합니다. 또 수력(授力)은 요즘 말로 말하면 임파우어먼트라는 뜻으로 일대일의 대화에 의한 생명과 생명의 촉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도 완전할 정도로 끌어내어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목표로 함께 걸어가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30년 전에 ‘성장의 한계’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로 지구환경의 위기를 세계에 알린 로마클럽의 창시자 아우렐리오 펫체이 박사가 저와 함께 엮은 대담집 ‘21세기에의 경종’에서 말씀하신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 잠자고 있지만,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여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실로 막대한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최대한 인적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능력을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상황에 합치하도록 연마하고 개발할 때 오직 이 방법으로만 자연과의 관계도 포함하여 인류의 현상에 다소나마 질서와 조화를 회복하고 안전하게 앞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만인이 평등하게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한 보배인 ‘인간생활의 가능성’을 자타 함께 최대한 개척하여 ‘모든 생명과 연결하는’ 방향으로 감성을 연마하는 인간교육이야말로 21세기의 교육에 필요한 요건입니다. 지구환경문제에 아무리 복잡한 요인이 내포되어 있어도 인간이 만들어 낸 문제인 이상, 인간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인간에 귀착하여 인간생명의 개척과 변혁에서 출발하는 ‘인간혁명’이야말로 ‘지구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왕도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지구정상회의(환경개발서밋)의 대성공을 진심으로 염원(念願)하면서 둘도 없는 우인(友人)인 계관시인 故 에스터 그레스 박사의 시와 나이지리아의 작가 벵 오크리 씨가 신세기에 바친 시(詩)를 들어 이 제언을 마치고자 합니다.
“세계를 바꾸겠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을 바꾸겠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레스 박사
“자신을 새롭게 만들지 않고 세계를 새롭게 창출할 수 없다. 신시대는 반드시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내면의 일로 누구도 생각한 적이 없는 내면의 해방을 시사하는 가능성이다.”
- 벵 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