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언젠가는’이라고 하여 아직은 미래의 일로 생각합니다. 청년은 물론 나이를 먹어도, 아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을 외면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상은 어떠한가. 인간이란 다음 순간에 바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지진, 사고, 급사병, 그 밖에 죽을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은 자기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등뒤에서 접근합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노력해야지’ ‘이 일이 끝나면 노력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앗 하는 순간 세월은 갑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무엇 하나 생명의 재보(財寶)도 쌓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의 인생이지요. 후회해도 그때는 늦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3일 후가, 3년 후가 되어도 그리고 30년 후가 되어도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영원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백년도 일순간입니다. 문자 그대로 '임종 지금에 있도다'인 것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사실은 죽을 때를 위하여 신심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한 그 무엇을 말합니다면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바로 삼세 영원에 걸친 ‘마음의 재보’를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 중요한 것을 ‘뒤로 미루고’ ‘먼저 보내면서’ 인류 대부분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라고 하는데, 인생에서 생사만큼 ‘일대사(一大事)는 없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에 비합니다면 나머지 것은 모두 작습니다. 그것은 ‘임종’할 때 분명히 실감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병구완해 온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인생 마지막에 문득 파노라마처럼 자기 인생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은 자신이 사장이 되었다, 장사가 잘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 누구를 어떤 식으로 사랑했는가, 상냥하게 대했는가, 어떤 식으로 차갑게 대했는가, 자기 신념을 관철한 만족감이나 배반당한 상처라는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부분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의식이 인생을 높여 주는 것이 됩니다. ‘죽음’을 자각함으로써 ‘영원한 것’을 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순 일순을 소중하게 쓰자고 결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죽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필시 인생은 김이 빠져 지루하지 않을까? ‘죽음’이 있기에 ‘지금’을 소중하게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은 ‘죽음을 잊은 문명’이라 합니다. 그것이 동시에 ‘욕망을 방치한 문명’으로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문명도 ‘생사’라는 근본대사(根本大事)를 피하고 있습니다면 그날 그날만 살아가는 타락한 생활에 빠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