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자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전 인류의 숙명전환도 가능케 합니다.

  • Words of Wisdom 희망찬 내일을 위한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명언

  • Dialogue with Nature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사진 작품, 자연과의 대화

  • The Life Story of Daisaku Ikeda 이케다 다이사쿠 생애

법화경의 지혜 법화경의 지혜에서 발췌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알기 쉽게 설하고자 했던 것이 법화경이며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체득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이 말법의 법화경행자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여하튼 법화경은 무력감을 타파하는 우주대의 마음의 비보(秘寶)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주의 대생명을 호흡하면서 발랄하게 사는 인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변혁이라는 참된 대모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는 모든 사람을 평화로 감싸주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있습니다. 언제라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살고 어디서나 아차토안온(我此土安穩)으로 살아갈 수 있는 대경애를 열어줍니다.

법화경에는 사악함과 싸우는 정의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지친 사람을 격려하는 따뜻함이 있고 두려움을 제거하는 용기의 고동이 있습니다. 삼세를 자유자재로 유희하는 환희의 합창이 있습니다. 자유의 비상(飛翔)이 있습니다. 찬란한 빛이 있고 꽃이 있고 숲이 있으며 음악이 있고 회화가 있고 영화가 있습니다. 최고의 심리학이 있고 인생학이 있으며 평화학이 있습니다. 건강의 근본 궤도가 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일체가 바뀐다는 우주적 진리에 눈을 뜨게 해줍니다. 개인주의의 황무지도 아니며 전체주의의 감옥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 보완하고 격려하며 사는 자비의 정토를 현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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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란 스스로 생명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사람의 생명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부처의 지혜이자 법화경의 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화경이 누구를 위해 설해졌는가? 모든 인간을 위해서이며 그들의 자립을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승속, 남녀, 빈부, 귀천, 노약 등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성불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누구나 반드시 절대적인 행복 경애를 만끽할 수 있다'. 이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민중성이라는 점에서 석존이 어떤 언어로 불법을 설했는가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가다어라는 ‘민중의 일상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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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혁명은 결국 사회혁명 환경혁명이 됩니다. <제법실상초>에서 대성인은 묘락의 <법화문구기 >에 나오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항상 묘경(妙經)을 말함이라” (어서 1358쪽)는 석(釋)을 예로 드시고, “의보(환경세계)도 정보(주체가 되는 생명)도 언제나 妙法蓮華經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보도 정보도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불이(不二)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변혁이 국토와 사회의 변혁에 통한다는 원리가 생겨납니다. 제법실상이라는 불안(佛眼)으로 보게 되면 삼라만상은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정보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의보만의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만의 행복도 없으며 타인만의 불행도 없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준 만큼 자신도 행복해진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한, 나 자신의 행복도 완전하지 않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제법실상입니다. 그러므로 ‘현실변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 제법실상의 마음입니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을 쓰신 심경을 “다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며 사람을 위해서이지 자신을 위해 이를 말함이 아니로다”(어서 35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대난의 폭풍우도 이 민중구제를 향한 불꽃을 꺼뜨리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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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부처의 설법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상황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기근도 다른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성불시킬 수 있을까? 개개의 인간이라고 하는 ‘현실’에서 일보도 물러서지 않고 성불로 가는 길을 밝힌 것이 법화경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이야말로 법화경의 ‘인간주의’이자 ‘휴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부처의 마음’입니다. ‘일체중생의 성불’이라는 법화경의 근본목적도 바로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철저하게 해 가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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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품에서는 ‘구원의 부처’를 설합니다. 그 부처란 누구를 말하는가. 대성인은 "나는 실로 성불한지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佗刧)이 되었노라"(법화경 496쪽)의 ‘나(我)’란 "법계(法界)의 중생이며 십계(十界) 각각(各各)을 가리켜서 아(我)라고 하느니라"(어서 75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량품의 ‘구원(久遠)의 부처’는 일체중생을 말합니다. 우리를 말합니다. 범부는 범부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생명에 차별은 없습니다. 평등합니다. 평등하게 부처입니다. 다른 것은 그것을 자각하는가 아닌가, 그 ‘마음’의 차이일 뿐입니다.

32상(相) 80종호(種好)로 몸을 장식하는 것이 부처는 아닙니다. 우리 생명 자체가 본래 부처입니다. 우주 자체가 본래 부처인 것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자비. 달이 비치는 것도 자비. 푸른 나무가 아름답게 숨쉬는 것도 자비입니다. 우주 전체가 무시무종(無始無終)에 걸쳐 자비의 활동을 계속하는 대생명체인 것입니다. 그 대생명을 구원의 부처라 합니다. 그리고 십계의 그 어떤 생명도 이 수량품의 부처와 일체입니다. 그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아가는 열쇠가 신심입니다.

대성인은 "수량품(壽量品)이란 십계(十界)의 중생의 본명(本命)이니라. 이 품(品)을 본문(本門)이라고 하는 것은 본(本)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는 것이니라."(어서 799쪽) 하고 명쾌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