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의 만남 (베이징, 1974년 12월)
저우언라이 총리의 부고를 받았을 때, 나는 간사이에 있었다. 슬펐지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온종일 총리의 명복을 기원했다.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평온히 영면(永眠)하십시오.”
1976년 1월 9일, 그날 나는 회합 참석을 위해 오사카에서 교토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회합에서 천 명의 회원들과 함께 진심을 다해 저우언라이 총리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1월 8일에 서거하셨고, 서거 소식은 다음 날 발표되었다.)
젊은 시절, 저우언라이는 교토에서 수학했다. 일본을 떠나기 전, 스물한 살의 저우는 교토의 아라시야마와 마루야마 공원에 들렀다. 때는 1919년 봄. 아라시야마 언덕은 비구름으로 덮여있었다. 공원 주변을 따라 흐르는 강둑 위로 짙은 초록의 소나무가 줄지어있었고 그 위로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고통받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젊은 저우는 생각했다. 그 해결책을 찾아 일본까지 왔지만, 일본의 눈부신 번영 뒤에는 지치고 무력해진 민중의 그림자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다른 아시아인을 차별하고 멸시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는 결심했다,
청년 저우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비는 그쳤고, 짙은 녹색 벚나무 사이로 아름답게 피어난 벚꽃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다.
마루야마 공원도 마찬가지로, 한밤중 벚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곳의 벚꽃은 만개하여, 밝은 분홍 빛깔이 등불에 비춰져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총리를 만난 날, “부디 벚꽃이 필 무렵 다시 일본에 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고 싶지만 아마 힘들겠지요.” 라고 답하셨다.
이 만남은 저우 총리가 돌아가시기 약 1년 전, 1974년 12월 5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총리의 병세는 이미 심각했다. 만나자마자 총리는 (나의) 첫 번째 방문 때는 병세가 심해 만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병에 차도가 생겨 만날 수 있다고 기뻐하며 자신의 병도 숨김없이 얘기했다.
부인 가네코 여사와 함께 중국 첫 방문 중 광저우역에 정차한 이케다 선생님 (1974년 5월)
나의 첫 번째 중국 방문은 반년 전이었다. 내가 베이징에 도착하고 이틀 후인 6월 1일, 저우 총리는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2년 전인 1972년 여름, 암 진단을 받았고, 1973년 바쁜 일정와중에 72일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1974년 초부터 건강은 불안정해졌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하루 18시간씩 일하는 나날이 이어졌고, 때로는 30시간 동안 철야로 일한 적도 있다.
4월 급성 호흡 곤란으로 힘들었고, 5월에도 세 번의 호흡 곤란이 일어났다. 매번 산소호흡기를 끼고 휴식해야만 했다. 결국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 6월 1일 입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몸 상태에도 세심하게 방문 준비에 신경 써 주셨다. 보다 편안한 방문이 되도록, 수행원을 통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담배는 피우는지 등 세밀한 사항까지 자상하게 배려해주셨다.
나는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총리님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중국에 왔으니 중국의 관습과 안내에 따르고자 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심지어 총리는 내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묵었던 방의 커튼까지 두꺼운 것으로 교체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곳곳마다 총리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총리의 다정한 친절과 배려에 감싸여 그렇게 중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몇 달이 흘러 9월이 되자, 나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 소련의 알렉시스 코시긴 총리을 만났다. 중국과 소련 연방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하지만 코시긴 총리은 자신의 상대인 중국 총리의 도량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존재하는 한 중국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키던 위대한 나무는 병으로 쓰러졌다. 처음 입원했던 6월부터 서거하기까지 약 18개월 동안, 저우 총리는 열다섯 차례 수술을 받았다. 평균 40일마다 한 번 수술을 받은 셈이다. 그중 일곱 번은 큰 수술이었다. 수혈받은 회수 또한 100회가 넘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 입원실을 사무실로 삼아 10억 중국 인민을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혹독하게 자신을 분기시켰다.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생각할 수 있다.”라고 단호하게 의지를 피력했다. 명석한 사고를 위해 진통제 복용도 거부했다. 강철 같은 대단한 의지와 정신력으로 그는 참기 힘든 통증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냈다.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중국이 그를 필요로 했다. 4인방은 총리와 수많은 동지들이 목숨 걸고 투쟁하여 힘겹게 건설한 신(新)중국을 파괴하려고 했다. 4인방은 모든 책략을 다 동원했다 폭력, 반역, 강탈, 인신공격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인민의 신음이, 절규가 총리의 귀에 맴돌았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인민을 위해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인민이 기댈 사람은 오직 저우 총리뿐이었다. 그들은 4인방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총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4인방에게 저우는 매우 성가신 존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골칫거리였다. 저우만 없었다면 중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4인방은 총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온갖 음흉한 계략을 꾸몄다. 그 당시 린뱌오와 공자에 대한 가차없는 선동은 사실 총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4인방이 비난했던 공자는 실제로 저우 총리를 의미했다.
4인방은 총리의 치료까지 방해했다. 한 번은 수혈 받고 있던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당장 총리를 바꿔주시오. 급박한 사안입니다.” 의료진은 어쩔 수 없이 수혈을 중단했다. 그리고 진정제를 투여받고 잠들어 있던 총리를 깨워 전화를 받도록 했다. 또 한 번은 4인방 한 명이 병원으로 찾아와 치료받고 있던 총리와의 면회를 요청했다. 알고 보니 계략에 불과했다. 별로 다급하지도 않은 문제에 관해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다 나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투병중인 총리의 몸과 마음을 기진맥진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저우 총리를 만났을 때, 정치적 폭풍은 절정에 달했다. 12월부터 총리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1975년 1월, 10년 만에 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고, 4인방은 절대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전부 수포가 되고 만다. 총리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지만,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을 불사한 총리의 노력과 불사의 헌신을 알고 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부인 덩잉차오 여사다.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이케다 선생님,
부인 가네코 여사. 총리 옆에 앉은 이는
통역 린 리윈이다.
우리의 만남은 마지막 순간에 결정되었다. 아마도 저우 총리의 몸 상태가 호전되길 기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국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말았다.
신세 진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연회를 베이징에서 열었는데, 연회가 끝나갈 무렵, 랴오청즈 중일우호협회 회장이 조용히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이케다 회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방으로 회장을 따라갔고 거기서 알려주었다. “사실은, 저우 총리께서 회장 님을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총리의 병환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무겁다고 들은 터라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우 총리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만나면 건강에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만이라도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총리의 정확한 상태는 몰랐지만, 그날 아침 덩샤오핑 부총리와 나눈 회담에서 총리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고 들었다.
총리에게 헌신적인 랴오 회장은 나의 반응에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우 총리께서 결심을 굳히신 것 같으니 요청을 받아주십시오." 사양할 상황이 아닌 듯하여 나는 총리의 초대에 응했다. "알겠습니다. 만나뵙겠습니다. 하지만 2분 3분 정도만 뵙고 바로 나오겠습니다. 총리에게 부담을 드리면 안되니까요."
랴오 회장의 안내로 나와 일행은 차로 빠르게 달렸다. 15분 정도 달렸을 무렵,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저우 총리가 입원한 305병원이었다.
훗날, 덩 여사는 한 일본인 친구와의 대화에서 그날 저녁을 회상했다.
“그 때, 언라이 동지는 이케다 회장을 정말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305병원 모든 의료진이 회견을 반대했습니다. 결코 회견을 할 수 없던 상황이었기에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회견을 꼭 한다면 생명을 보증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우 총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케다 회장을 만나야 한다고 의연하게 말했지요. 그 말에 난처해진 의료진은 나에게 총리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언라이 동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회견을 허가해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실제로 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저우 총리와 덩 여사 간의 이해와 신뢰는 그만큼 깊고 돈독했다.
베이징의 공기는 살을 에는 듯이 차가웠다. 린리윈 통역이 아내에게 외투를 입으라고 건넸다. 어둠이 내리고 기온은 영하일 듯싶었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저우 총리는 병원 입구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잘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리는 팔을 뻗어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총리는 오랫동안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꿰뚫는 듯한 깊은 눈빛에는 친절함과 따뜻함이 배어있었다.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 그런 눈빛이었다. 온몸에서 발하는 장절한 기백과 존재감이 느껴졌다. 첫 만남이었지만, 전에 이미 만났던 적이 있는 듯한 느낌, 생명과 생명이 맞닿아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총리는 내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먼저 다 함께 기념촬영을 합시다.” 총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고, 나와 일행은 총리와의 사진 촬영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이케다 선생님 부부와 저우언라이 총리의
공식 기념 촬영
실제 만남이 성사되기 전 약 10년동안, 저우 총리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경제계 대표 다카사키 타쓰노스케 경제심의청 장관과 인기 작가 아리요시 사와코를 통해 따뜻한 전언을 보내며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다카사키와 아리요시 모두 중일우호관계 증진을 위해 오랫동안 노고한 인물이다.
저우 총리는 창가학회가 민중 속에서 일어난 단체라는 점에 주목하며, 그 진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과 함께”- 저우 총리의 좌우명 이었다. 총리는 전쟁 중 창가학회가 군국주의와 투쟁했고, 그 결과 정부의 탄압을 받은 역사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총리는 일본과 관계를 맺을 때도 ‘관련된 개인이나 단체가 국가주의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에 예리하게 주목했다.
총리는 중일 우호관계의 결정적 요소를 민중이라고 믿었다. 조약이나 서면상의 협약은 국익의 관심사가 바뀌면 언제라도 파기되거나 묵살될 수 있다. 참된 중일 우호관계는 민간차원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와 우정을 맺어갈 때 이루어진다는 점을 총리는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신념으로 1968년 ‘중일국교정상화’를 촉구했다. 당시 현실은 ‘두 나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두 민족’간의 문제였다. 민중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화해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중일국교 정상화제언’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고 냉혹했다. “왜 종교인이 갑자기 ‘빨간’ 넥타이를 매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후 1970년 3월, 일본 정치지도자 마츠무라 겐조씨가 내게 중국 방문 동행을 요청했다. 거듭된 요망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사양했다. ‘나는 종교인이고, 창가학회는 재가 불교신도단체이다. 국교정상화는 기본적으로 정치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내가 중국에 가는 것 보다는 내가 창립한 공명당 측에서 동행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라고 제안했다. 마츠무라씨는 나와 공명당에 대해 모두 저우 총리에게 자세히 전하겠다고 답했다. 공명당 창립자로서 나는 저우 총리가 공명당 대표를 믿고, ‘국교회복의 가교’라는 중책을 맡겨 주셨던 일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한다.
사진촬영이 끝나자 총리는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라고 일어나 안내했다. 튜닉 정장에 가려진 너무나 쇠약한 총리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 했다. 그는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총리가 피로해질까 봐 사전에 협의한 대로 아내와 나만 회견실로 들어갔다. 방은 소박하고 정결했다. 방안의 조명은 총리의 눈의 피로를 막기 위해 어둡게 조절되어있었다. 나는 총리를 피곤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말을 아꼈다.
총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무엇을 논하더라고 가장 힘주어 강조한 부분은 바로 미래 즉 다가올 세기에 관한 일이었다. 자신의 죽음 뒤에 펼쳐질 상황을 깊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25년간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 평등한 처지에서 도우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 25년 동안 아시아와 세계를 위해 보다 견고한 평화의 길을 닦겠다는 총리의 결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가올 세기에 중일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기를 갈망했다. 나는 유언을 듣는 심정으로 총리의 말을 경청했다
오래전, 한 연설에서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주게 될 것입니다. ‘어디 출신인가?’ ‘피부색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모든 나라가 독립을 쟁취하는 그 날이 오면, 제국주의는 사라지고 조화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21세기가 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날을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젊은 여러분은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총리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관계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당시 저우 총리는 일흔여섯 살이고, 나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중국은 초강대국은 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만일 언젠가 그렇게 된다면, 만약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면, 전 세계 사람들 모두 일어나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그 정권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총리는 또한 “또 지금의 중국은 아직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씀 이면에는 ‘중국은 변화할 것이다.’ ‘중국의 미래는 다를 것이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1975년 1월, 우리의 회견 한 달 후, 저우 총리는 21세기를 위한 중국의 “네 가지 현대화” 계획을 발표한다. 총리가 남긴 정치적 유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사랑하는 인민의 삶을 더욱 번영시키겠다는 그의 각오다.
저우 총리는 거시적 차원에서, 인류 역사의 광대한 파노라마를 멀리까지 내다보는 안목과 동시에 미묘한 인간의 마음을 간파하는 미시적 안목도 지닌 분이다. 나는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 에 등장하는 뛰어난 영웅이자 명재상인 제갈공명을 떠올리며 종종 저우 총리를 현대의 제갈공명이라 불렀다. 총리는 자신의 권력이나 지위를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막중한 책임을 다하는 데 열중했다. ‘천하무적의 장군’ ‘유연하고 노련한 외교관’ ‘무상(無上)의 행정가’ – 모두 확고한 사명감과 헌신에서 비롯된 업적이다.
그는 신(新)중국을 이끌 중심축이자 동력이었다. 그에게는 “혼돈의 중국”을 “평화와 번영의 중국”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막중한 책임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지만, 총리는 의연하게 흔쾌히 그 무게를 떠안았다. 개인적 영예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모든 것은 오로지 인민을 위해!’ 인민을 위해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불살랐다.
회견 중, 총리는 “저는 미래를 위해 중일평화우호조약을 하루 빨리 체결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총리님의 의사(意思)는 마땅히 전해야 할 곳에 반드시 전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냥 “평화조약”이 아닌 “평화우호조약” 이라고 말씀하신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가 바로 소설 인간혁명(1969년 6월)을 통해 내가 그러한 조약 체결을 제안한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 회견 이후 4년이 지났을 무렵 실제로 조약은 성사되었다.
회견 내내, 총리의 놀라운 기백과 강인한 정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활력이라면 한 두 시간쯤은 거뜬히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시계를 확인하며 랴오 회장에게 회견을 일단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여러 번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랴오 회장은 그때마다 ‘아직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회견은 약 30분에 이르렀다. 특히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깊은 병세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해주셨고, 게다가 끝나고 돌아갈 때도 일부러 현관까지 배웅해 주셨던 일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 평생에 단 한 번 만남)”라는 유명한 말처럼 우리의 첫 만남도 마지막 만남이 됐다.
저우 총리에게 방문 기념으로 그림을 증정했다. 총리는 그동안 방에 걸어두었던 그림을 내리고 그날 밤에 내가 선물한 그림으로 바꿔 걸었다고 한다.
몇 달 후, 1975년 봄, 소카대학교는 일본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정식 유학생들을 맞아들였다. 청년 시절, 저우 총리가 일본에 왔을 때는 일본대학에서 공부하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총리의 이루지 못한 꿈을 보상하고 싶었다.
6명의 중국 유학생이었다. 나는 유학생들과 소카대학교 학생들에게 제안했다. “저우 총리께서는 벚꽃이 피었을 때 일본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실 수 없는 사정입니다. 우리 모두 총리를 위해 캠퍼스에 ‘저우 벚나무’를 심읍시다! 이를 시작으로, 만대에 걸치는 중일우호를 만들어갑시다. 세대 세대에 걸쳐 변함없이 지속하는 그런 우정을 쌓아갑시다.
그 해 11월, 그 마음을 담아 저우 벚나무를 심었다.
두 달 후 저우 총리의 서거 소식이 전 세계로 퍼졌다.
그의 시신은 안치되었고, 가슴에는 “인민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진 휘장이 꽂혀있었다.
수술대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쉴 때조차 저우 총리는 한 지방의 탄광 노동자들의 건강과 복지 문제에 관해 지시했다고 한다. 위대한 인물에겐 사심이 없다. 저우 총리의 마음에는 늘 인민을 위한 걱정뿐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담당 의사들에게 말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봐주시오. 그들이 더 당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테니까요.”
총리의 서거 소식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통곡했다. 인민의 ‘아버지’ ‘어머니’와 같았던 저우 총리, 이제 누가 그토록 마음을 다해 인민을 보살펴줄 것인가? 중국 인민의 슬픔이 강을 휩쓸고 산을 흔들었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대지위로 흐느꼈다. 아무리 4인방이 저지하려 해도 애도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고, 그 물결은 대지를 휩쓸었다.
고인을 기리는 4월 청명절, 수많은 사람들이 저우 총리를 추모하기 위해 화환을 들고 천안문광장으로 모여들었다. 4인방은 화환을 치우라고 명령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화환을 만들어 다시 찾아왔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친애하는 저우 총리님, 우리가 만들어 온 화환이 보이시죠? 사랑으로, 감사함으로 만든 이 화환은 우리 마음속에 있답니다. 그러니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어요!” 인민의 혼의 외침이었다.
4인방이 저우 총리를 공격하면 할수록 인민의 분노 또한 극에 달했다. ‘절대로 총리의 명성만큼은 더럽힐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4인방을 무너뜨리자는 함성이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깨어난 민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총리는 마침내 죽음으로 살아있는 그의 적들을 물리쳤다. 인민에 대한 사랑이 그의 삶 자체였다. 그의 전 혼(魂)을, 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인민을 위해, 오로지 인민을 위해 바쳤다.
1962년 일본에서 가장 차별받는 소수민족 동맹 단체인 부락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다. 대표단의 단장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준 저우 총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자, 총리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일본 전체에서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곳 중국까지 방문했는데,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는 중국 총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저우 총리에게 “인민”은 단지 중국인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이 중국에 끼친 전쟁 피해 배상 문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일본의 중국침략은 3500만명의 중국측 사상자, 총 6000억 달러라는 경제적 손실을 야기했다. 만약 이 엄청난 손실액 중 일부만이라도 일본정부가 배상했었다면 황폐해진 중국에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었겠는가! 전후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의 중공업을 자유롭게 재건하게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산업단지 70퍼센트를 해체시켜 중국으로 보내, 중국 산업 토대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저우 총리는 반대했다.
“중국은 배상 청구를 포기하겠습니다. 일본인도 중국인도 모두 똑같이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배상을 요구한다면 중국 인민이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일본인민에게 가하는 격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느 통계에 따르면, 일본이 최소한의 50억 달러를 배상했을 경우 50년은 걸렸을 거라 추정한다. 만일 그렇다면 일본은 결코 오늘날의 경제강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감사의 마음을 영원히 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일본이 경제대국 이라는 우월감에 빠져 뽐내는 행위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큰 도움을 받은 중국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소카대학교 캠퍼스에 저우 벚나무를 나타내는 기념바위. 1975년 11월 2일 당시 병중인 중국 총리의 건강을 기원하며 심은 이 나무는 중일우호와 평화를 향한 바람을 상징한다.
1978년 저우 총리가 서거한 후 약 2년이 지났을 무렵, 베이징에서 덩 여사를 다시 만났다. 마치 돌아가신 총리와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총리의 마음이 곧 여사의 마음이었다. 여사는 미소를 띄우며, “벚꽃이 활짝 필 무렵 일본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여사는 부군의 소망을 꼭 이루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일본 방문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남편이 활짝 핀 교토의 벚꽃나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정확히 60년이 지난 1979년 봄, 덩 여사 는 국빈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그 해 도쿄의 벚꽃은 일찍 개화했고, 강한 봄바람 때문에 덩여사가 방문했을 무렵에는 꽃이 거의 지고 없었다. 그 해 벚꽃의 아름 다움을 전하고자, 늦봄에 개화하는 활짝 핀 왕 벚꽃나무 가지를 영빈관 으로 가져갔다. 또한 소카대학교에 심은 저우 벚나무와 저우언라이, 덩잉차오 부부 벚나무 사진을 앨범에 담아 선물해드렸다. 앨범 속에는 소카대학에서 유학하는 중국학생들의 행복한 모습도 담겨있었다.
소카대학교의 벚나무 사진을 본 덩여사는 활짝 웃으며 벚나무는 아름다운 우정의 상징이라고 기뻐하셨다.
저우언라이 덩잉차오 부부 벚나무는 다정하게 나란히 서있다. 먼 옛날, 저우 총리와 덩여사의 정원에도 한 쌍의 벚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그루가 시들어 결국 죽고 말았다. 덩여사는 그 나무아래에서 남편과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을 매우 아쉬워했다. 조금이라도 두 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나는 소카대학교에 두 분을 기념하는 한 쌍의 나무를 심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여사를 만났다. 마지막 만남은 1990년 베이징의 자택에서였다. 내가 선물했던 저우 총리와 여사의 그림이 벽에 걸려있었다. “언제든 외국 방문객을 이 방에서 접견하면 이 그림을 보여주며 저우 총리에 대한 나의 추억과 이케다 회장과 총리의 우정에 관해 이야기하지요.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습니다. 저우 총리도 나만큼 기뻐할 거예요.” 라고 설명해주셨다.
새롭게 찍은 저우 벚나무와 저우언라이 덩잉차오 부부 벚나무 사진을 보여드리자, 나무가 많이 자랐다고 깜짝 놀라셨다. 그리고 내가 떠날 무렵, 여사는 총리의 애장품인 상아로 만든 종이칼을 선물로 주셨다. 너무 소중한 선물이기에 정중히 사양했지만, 여사는 말씀하셨다.“저우 총리는 당신과의 우정을 매우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케다 회장께 이 개인 소장품을 드리고 싶군요. 부디 이 유품을 우정의 징표로 받아주세요. 그리고 총리를 기억해주세요.” 또한 여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옥으로 만든 연필꽂이도 선물로 주셨다.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 보다.
“사람과 소통할 때는 마음으로 소통하고, 나무에 물을 줄 때는 뿌리에 물을 주라.”는 중국의 격언이 있다. 저우 총리는 참된 정권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인민의 마음을 소중히 하고, 인민의 신뢰를 얻는다.’였다.
나는 아직까지도 저우 총리의 목소리, 그의 눈빛, 그의 정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거센 탄압의 폭풍에도 거침없이 전진한 “아시아의 거인,”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사방팔방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저우 총리는 최후의 승리자다. 그는 조국의 내부 개혁과 해방을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거듭하는 동시에, 일본 및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설 자리를 만들어갔다. 이 위대한 업적을 모두 이룬 후 비로소 총리는 우리 곁을 떠났다.
지금 드디어 중국은 백 년 동안의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 번영의 21세기를 향해 거대한 도약을 하고 있다. 저우 총리가 생명을 불태워 개척한 그 길로 나아가고 있다. 총리는 승리했다! 모든 고난과 시련을 헤쳐나간 그의 사심 없는 헌신이 결국 승리했다.
소카대학교의 저우언라이 벚나무를 가리키는 기념비는 중국을 향한다. 광활한 대륙의 서쪽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저우 총리와 덩여사의 밝은 미소가 환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