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오랜 세월 극심한 류머티즘으로 고생하셨던 아버지의 병세도 마침내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바로 그 무렵 큰형이 군대에 징병되었다. 형의 이름은 키이치. 나 보다 12살이 많았으니, 징집 당시 형은 21살이었다. 나는 진지하고 성실한 형을 매우 존경했다. 아버지가 몸져누워 있을 때, 형은 우리 가족의 중심이자 기둥으로서 가족을 열심히 보살폈다.
우리 가족은 큰형을 시작으로, 인생의 한창때였던 다른 세 명의 형들까지 모두 군대에 빼앗기고 말았다. 따라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피는 책임은 결핵으로 병약했던 나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병 또한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국수주의는 그토록 잔인하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뭉개버렸다.
징병되고 2년이 지난 1939년 이른 봄, 큰형은 해외전선에 투입되었다. 파병되기 전에 면회가 가능하다는 통지서를 받고, 어머니와 나는 형을 보기 위해 서둘러 도쿄 역으로 향했다. 내가 5학년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주먹밥과 몇 가지 음식을 준비했는데, 전시상황의 일본에서는 진수성찬과도 같았다. 주먹밥을 푸짐하게 김에 싸며, 어머니는 말했다. “한동안 키이치를 볼 수 없을 거야.”
우리가 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전선으로 출동할 약 300명의 군인들이 있었다. 군인들의 가족도 역전 광장에 모여,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청년들이었기에, 어쩌면 그 순간이 마지막 작별인사일지도 모른다. 많은 어머니들과 젊은 아내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의 파병은 너무나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야마가타와 아키타처럼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던 가족들에게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도쿄로 갈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역 바깥 콘크리트 바닥에는, 말을 건 낼 사람 하나 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조용히 앉아있던 군인들이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들 중 몇몇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아 다가오지 못할 것 같은 군인들에게는 나를 보내 주먹밥을 건네셨다. 쓸쓸했던 그들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어머니가 진심을 담아 만든 식사를 함께 하며, 다정한 동지애를 느끼고 담소를 나누었다.
결국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고, 우리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형은 행전을 다시 동여매고, 허리띠에 검을 확인한 후 분대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나도 집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타고 시나가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형이 탄 열차가 시나가와역을 지나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군인을 가득 태운 열차 한 대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황급히 차창으로 달려가 여기저기 형을 찾아 보았지만,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나이가 지긋한 한 역무원이 다가와, 우리의 상황을 애처로워하며, 확성기를 들고 크게 외쳤다. “이케다 키이치 씨를 찾습니다. 이케다 키이치 씨를 찾습니다. 키이치 씨, 어머니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역무원은 우리를 위해 플랫폼을 오르내리며 형을 찾아 다녔다.
열차가 막 떠나려고 할 때, 형의 전우 한 명이 역무원의 소리를 들었다. 도쿄역애서 우리와 함께 주먹밥을 먹은 야마가타 출신의 소년이었던 것 같다. 그는 열차 반대편에 앉아있던 형에게로 달려가 말했다. “키이치, 너희 엄마가 저기 계셔!”
한편 열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형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 창문 쪽으로 한 걸음에 달려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키이치, 키이치, 몸조심해라, 우리 아들!” 속력을 내는 열차를 따라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어머니가 말했다. 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어머니와 나도 열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키이치 형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1941년, 형은 임시 휴가를 받아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때 형은 내게 말했다. “일본군의 잔인함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단다.” 형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은밀하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언제 다시 키이치를 전방으로 보낼지 몰라. 기회가 있을 때 결혼시키는 편이 좋겠는데 말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형에게도 말했다. “너는 우리 집의 장남이다. 그러니 빨리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니?” 형의 결혼 문제는 우리 가족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군국주의로 물들어버린 당시 일본 사회에서, 행복한 결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국가를 위해 영웅처럼 싸우다 죽는 일이 가장 위대한 영광이라고 세뇌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은듬해, 큰형은다시 징집되었다. 전선에서 형이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김 양식업 집안의 아들로서 [매섭게 추운 환경에서 일한 것처럼] 추운 지방으로 파견되길 바랐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열대지역인 버마로 파견되었다!” 형이 한 말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사무칠 정도로 아려온다.
그리고 얼마 후, 큰형은 일본군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임팔 전투(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어난 전투, 일본군은 인도 북동부 임팔 지대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무산되어 버마로 후퇴)의 희생자가 되었다. 큰형은 1945년 1월, 버마(현재의 미얀마)에서 전사했다. 당시 형의 나이는 29살이었다.
나는 전쟁을 반대한다!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군사정권은 우리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명예롭게 최전선으로 나가 목숨을 바치라고 선동했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국군의 어머니' , '최전방 용사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가족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비참하고 심란한 고통이, 비통함과 처절함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이 마음의 혼돈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꾸며낸 듯한 칭찬과 사람들의 동정이 그 어머니들과 아이들의 아픈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가했는가!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지혜는 '국가를 위해'라는 그릇된 말로 유린당하기에는 참으로 위대하다.
전쟁 중에는 모든 계절이 겨울과 같았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태양이 고요하지만 밝고 강한 빛을 비추며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8월 15일, 피난 와있던 도쿄 오타구 마고메의 친척집에서 나는 종전을 알리는 천황의 발표를 들었다. 내 나이 17살. 그 순간 느낀 복잡한 감정은 ‘나’라는 존재의 핵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나는 결사적으로 전쟁을 반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군사정부에 의해 투옥당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최고로 존경하고, 두 분을 진실과 정의의 투사라고 생각한다. 이는 또한 내가 흔쾌히 창가학회의 이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나는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신앙하기 위해 사심 없이 목숨을 바친 초대 그리고 2대 회장의 뒤를 이어가는 일이 자랑스럽다.
나는 전쟁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사람 그 누구와도 맞서 싸우겠다고 단연코 결의한다. 나는 음흉하고 사악한 파괴의 세력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내 곁에는 천만에 달하는 대단한 부처의 세력이 함께한다. 강인한 정신의 힘으로 무장한 그 부처의 세력은 나와 함께 항구평화를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헌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