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총리와의 만남 (1974년 9월)
스케일이 큰 지도자였다. 코시긴 총리에게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중국은 소련의 태도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생각이 있습니까?”
솔직한 것이 나의 재산이다.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생각도, 고립화시킬 생각도 없습니다. 이를 중국의 수뇌에게 그대로 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크렘린에서 이케다 선생님과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 (모스크바, 1974년)
크렘린의 총리 집무실, 회의용 테이블 맞은편에는 풍설에 단련된 바위 같은 얼굴이 있었다. 당시 70세, 1974년 9월 17일이었다. 나의 첫 소련 방문도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련 방문 10일간 나름대로 소련 사람들의 평화에 대한 비원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한 것을 느낀 뒤 던진 질문이었다. 소련을 방문하기 3개월 전, 나는 중국도 방문했다. 북경에서는 지하 방공호에도 안내받아 들어간 적이 있었다. 긴급 피난용으로 만들어진 그 방공호는 시민이 스스로 참여하여 만든 것이었다.
얕은 곳이 6m, 깊은 곳은 11m, 지하에는 전화실, 방송실,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지하도는 모든 도시의 모든 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각 가정과 학교에서도 지하의 거리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다. “침략을 위해 이런 방공호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 지하 방공호는 모스크바까지 파지는 않았습니다.”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정 밑에 지하 방공호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이 아이들에게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대로는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중·소 대립 분위기가 매우 험악한 무렵이었다. 서로 비난하며 '소련과의 이론 투쟁은 1만 년이나 계속될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한편, 중국과 미국, 일본의 접근으로 소련 시민의 위기감은 더해 가고 있었다. 서로 침략의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불신감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 작더라도 ‘대화’를 위한 일석(一石)을 던지고 싶었다. 중국은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됐다. 또한 소련은 나치와 파시즘에 희생됐다. 몇천만 명의 사망자. 몇억 명의 비극. 그들이 흘린 한없는 눈물은 다음 세대가 ‘평화’를 즐기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흘린 눈물이란 말인가! “중국은 침략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코시긴 총리의 눈이 빛났다.
코시긴 총리는 감정을 거의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각료에 기용(1938년)된 이래 연이어 정부와 당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당에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혼자서만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자칫 판단을 잘못하면, 아니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간단히 '숙청' 당했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 이었다.
'야심이 없음'과 '뛰어난 실무 능력', 무엇보다 '행운'의 결과였다고 하셨다. 벼랑 끝을 계속 걸어온 사람이 깊은 주의력을 몸에 익힌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총리 스스로 마음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련의 물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걸어 다니는 컴퓨터'라고 불리던 기억력으로, 구체적인 숫자를 들면서 물가 안정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다만 예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물가 인상이 있었습니다. 보드카와 알코올 제품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 웃음이 감돌았다. 웃음을 띠자 총리의 엄한 얼굴이 인품 좋은 할아버지처럼 일변했다. 코시긴 총리의 철저한 성실함과 자제(自制)는 때로는 차가움이라고 오해받았는데, 총리를 아는 사람은 모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
실각(失脚)한 요인의 가족들을 그늘에서 원조한 적도 있었다. 매일 16시간씩이나 일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에 충실한 분이기도 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부부동반으로 방문했을 때는 선상(船上)에서 크라우디아 부인과 댄스를 즐겨, 그 격의 없음에 이집트 사람들은 놀라며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수개월 후였다. 1976년의 메이데이(노동절), 부인은 갑자기 위독한 병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총리는 붉은 광장에서 군의 퍼레이드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체의 감정을 바위와 같이 가슴속에 묻어둔 채 레닌의 묘 앞에 총리는 계속 서 있었다. 결국 그는 부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중국과의 평화를 바란다는 총리의 말애 ‘총리’임을 나는 직감했다. 인간의 진실한 외침마저 정치적인 발언으로 왜곡해서 받아 들인다거나, 당파성의 틀에서만 포착하려 하는 현대의 풍조를 나는 슬퍼한다. 그 교활한 ‘정신의 나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막힌 사회에 대한 희망을 향한 창을 열 수 없지 않을까. 더욱이 책임 있는 사람의 말이었기에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결실 있는 대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총리는 진지했다.
“우리는 평화를 소중히 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체코 침공(1968년) 등의 모든 군사 행동에 대해서도 총리는 언제나 반대했다고 전한다.
“핵은 전 세계가 멸망할 정도로 충분히 있습니다.” 음미하는 듯한 어조였다.
“히틀러와 같은 인간이 언제 또다시 나타나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지상의 문명을 지킬 방법은 없습니다. 인류는 조만간 핵 군축을 결정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놀랄만한 발언이었다. 당시는 ‘소련의 핵무기야말로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한 보장’이라는 것이 공식 견해였다. 회견에서 나는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나치의 ‘몰살작전’으로 900일 동안 포위된 ‘인류사상 최악의 전투’였다. 300만 시민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아와 추위로 죽었다고 한다. 기온은 영하 수십 도, 종이가 섞인 빵의 배급이 하루에 125g. 전등도, 통신 수단도, 수도도 없다. 네바강으로 물을 먹으러 가면 방치된 채 굴러다니는 시체 냄새가 났다. 밤낮 없이 귀를 찢을 듯한 폭음(爆音)이 계속되었다. 하루가 몇 개월이 흐르는 것처럼 더디게 생각되었다. 가족이 죽어도 묘지로 운반할 체력이 없었다. 마루에 놓여 있는 시체를 밤에는 쥐가 갉아 먹었다. 그 쥐도 먹었다. 귀여워하던 애완동물까지 먹었다. 인육(人肉) 매매까지 출현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 곳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나치와 끝까지 싸웠던 것이다.
이케다 선생님이 피스카렙스코예 묘지에
화환을 놓고 기원하고 있다.
나는 회견 4일 전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피스카료프 묘지 내 200개의 공동 묘비에는 ‘1941년 12월’ ‘1942년 1월’ 이라고 연월만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자가 너무 많아 그 대부분은 이름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누구 한 사람 잊은 적이 없다. 무엇 하나 잊은 적이 없다.’
평화를 원하는 절규였다. 한 마디 말이 무의식중에 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일본에서는 왜 이러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가!”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2,500만 명이라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인구의 10% 이상이다.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내 숙소를 관리하는 부인도 외로운 듯이 말했다.
“제 남편도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조금 통통한 러시아 부인, 사람 좋게 생긴 그녀의 슬픈 눈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전쟁의 희생자는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어느 곳의 민중이나 이제 절대로 전쟁만은 안 된다고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평화에 대한 비원(悲願)’을 ‘국가’가 분단시켜서는 안 된다. 국경을 초월하여 결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전쟁’ 그 자체를 평화로 포위하는 것이다.
“일본인은 소련에 대해 더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레닌그라드에서 받은 충격을 이야기하자 총리는 말했다.
“그 무렵 나는 마침 그 마을에 있었습니다…”
총리는 그 말뿐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 무언가 말하면 넘쳐흘러 버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닌그라드는 총리의 고향이다. 시정(市政)의 책임까지 맡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시민의 소개(疏開) 담당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레닌그라드의 기념 자료관에서 나는 <타냐의 작은 일기>를 보았다. 일곱 장의 작은 쪽지. 11세 소녀의 국어 노트였다. 러시아어의 알파벳 연습 종이로, 그 글자에 맞는 글이 써 있다.
첫 장에는
‘Z-제냐(러시아어로 자매)는 1941년 12월 28일 정오에 죽었습니다
두 장째부터는 –.
‘B-바브시카(할아버지)는 1942년 1월 25일 오후 3시에 죽었습니다.’
‘L-료카(동생)는 1942년 3월 17일 오전 5시에 죽었습니다.’
‘D-댜댜(아저씨)인 료 와샤는 1942년 5월 10일 오후 4시에 죽었습니다.’
‘M-마마(엄마)는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30분에 죽었습니다.’
‘S-사비체와의 일가는 죽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타냐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타냐도 소개지(疏開地)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타냐가 소련에 있었다. 중국에도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오키나와에, 일본 전국에, 세계에 무수한 사비체와가(家)가 있었다.
총리가 말했다. “먼저 전쟁이라는 사고(思考)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전쟁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면 무장(武裝)하지 않고 식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식량 문제에 대해 내가 ‘세계 식량은행’의 구상을 말했을 때의 일이다. 총리의 지론(持論)은 ‘군비보다 경제를’이라는 것이었다. ‘미사일에 빵이 폭격당하는’ 현상에 저항했다. 취임 직후 시장(市場) 메커니즘의 사고를 도입한 ‘코시긴 개혁’으로 사회에 활기를 주었다. 그러나 경직된 권력 기구에 의해 개혁은 사장되어 버렸다. 코시긴 총리는 일체의 환상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현실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관념론이나 허풍을 싫어했다. 형식적인 회견이나 의식을 좋아하지 않고, 시간을 아껴 일하고 싶어했다. 그런 만큼 소련의 기구에 대한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의미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선구자였다.
“당신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는 무엇입니까?” 총리의 질문에 나는 즉시 답했다.
“평화주의이고, 문화주의며 교육주의입니다. 그 근저는 인간주의입니다.”
“그 원칙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 사상을 우리 소련도 실현해야 합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출현하기 11년 전이었다.
총리는 도량이 넓은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마음은 항상 ‘보다 좋은 무언가’를 향해 개방되어 있었다.
나는 일∙소 관계에 대해서도 기탄 없이 말했다.
“일본인은 소련에 친근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러시아 문학이나 러시아 민요에는 친숙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소련에 대해 ‘무서운 나라’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정치나 경제만의 교류로는 참된 우호는 없습니다. 또한 친소(親蘇)파라고 불리는 분들과의 교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욱 폭넓게 민간 교류, 인간 교류, 문화 교류를 활발히 추진해 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따뜻한 상호 이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국가 간의 복잡한 문제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먼저 우호의 ‘태양’을 뜨게 하는 것이다. 서로 아무리 비난의 ‘북풍’을 계속 보낸다 하더라도 여행자는 망토를 벗고 흉금을 열기는커녕 더욱더 망토를 굳게 여미고 말 것이다. 나의 제안을 총리는 불쾌한 얼굴도 하지 않고 듣고 계셨다.
이윽고 크게 수긍하며 말씀하셨다.
“찬성입니다.”
탄력 있는 커다란 소리였다. 이 순간부터 우리와 소련의 문화∙교육 교류의 다채로운 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총리와는 다음 해(1975년) 5월, 제2차 방소(訪蘇) 때에도 회견했다. 마침 덴마크 여왕이 소련을 방문하고 있어 무척 바쁜 총리셨지만 “시간을 만들었습니다.”라며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해 주셨다.
첫 회견 후, 나는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나고(1974년 12월), 미국에서 키신저 국무장관과 대화했다(1975년 1월). 일개 민간인이기 때문에 이해(利害)에도, 입장에도,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단지 ‘같은 인간으로서’ 입장이라고 하면 이 입장만을 관철하여 나는 세계의 ‘평화를 향한 의지’를 조금이라도 결집하고 싶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런 노래를 배웠다.
러시아인에게 전쟁을 하고 싶은지 물어 보세요/
이 넓은 대지와 자작나무 숲에/
그 밑에서 잠자는 병사들에게/
러시아인에게 전쟁을 하고 싶은지 물어 보세요/
러시아의 어머니들에게/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게/
‘인간으로서’ 지니는 이 생각을 누가 억누를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억누를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을까?
코시긴 총리의 부보(訃報)를 접한 것은 1980년 말이었다. 10월에 병 때문에 막 사임하셨던 참이었다. 끝까지 일을 위한 생애였다. 국민이 마음으로부터 애도하는 모습은 총리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 해(1981년 5월) 참배(參拜)를 했다.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으로 많은 국가들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등 세계적으로 반소(反蘇)적인 무드였다. 일∙소간의 기류도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소련을 방문하려고 결심했다. 230명의 많은 교류단과 함께였다. 참배 후 故코시긴 총리의 따님인 구비샤니 여사를 예방했다. 근무처인 국립 외국문학도서관이었다.
크렘린에서 이케다 선생님과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 (모스크바, 1974년)
나는 ‘인간으로서’ 총리와 만났다. 돌아가신 후에도 같은 마음으로 가족 에게 조문(弔問)하고 싶었다. 여사는 총리께서 회견 첫날밤, 나와의 대화를 기뻐하시며 여사에게 말씀하셨다고 전해주셨다.
“일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 전원이 상의하여 이케다 선생님에게 꼭 아버지의 유품을 드리자고 정하였습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곁에서 무언가 큰 역할을 다해온 것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라며 물건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것은 크리스탈 제품의 장중(莊重)한 꽃병이었다. 총리가 ‘사회주의 노동 영웅’으로 표창 받으셨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또한 가죽으로 만든 두 권의 책은 총리의 최후의 저작이며, 서거하신 순간까지 서재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손의 온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가 증정해드리겠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말씀하시던 여사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 여사도 9년 후 61세로 서거하셨다. 계속해서 시간은 흐르고, 시간은 달려간다. 소련도, 세계도 격변했다.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끝나고 냉전도 끝났다. 소련은 ‘민주화’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 나의 귓전에는 총리의 힘찬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21세기는 밝다고 보아도 좋습니까?” 라는 나의 질문에 총리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 21세기는 멀리 4반세기 후의 일이었다. 지금은 지호지간( 指呼之間 )으로 다가왔다.
‘단지 인간으로서’ 세계는 곡절을 더듬으면서도 인간주의의 확대를 향하고 있다고 나는 보고 싶다.
일본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