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쟁한다 비폭력 전쟁을
폭력은 ‘거짓’으로 꾸며져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권력”
“식민지 지배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잔학”
어떤 일이 있어도 평화!
“어린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라”
“두 마리 코끼리가 싸우면 괴로운 건 풀잎”
잠비아 루사카문화회관에서 잠비아
SGI 회원들과 함께 노래하는 카운다 박사
(2002년 11월)
투쟁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끝까지 철저히 투쟁한 사람의 미소였다. 그렇다, 카운다 초대 대통령은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투쟁을 계속하셨다. 스스로 ‘비폭력의 전쟁’ 이라고 부르는 투쟁을.
협박을 받아도 투옥되어도 식민지 지배와 투쟁했다.
“말이 내 무기다.”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이웃 여러 나라의 해방을 계속 지원했다.
“만델라를 구하라!”
“로디지아(현 짐바브웨)를 해방하라!” 그 결과 억압정권 등으로부터 자국(自國)이 경제봉쇄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때 잘 알았어? 해방투쟁 따위는 그만둬라. 이쯤에서 우리 말을 듣는 게 어때!”
카운다 대통령의 대답은 “노(No)”.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국민들도 또한 참으면서 대통령을 지지했다.
잠비아공화국.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이다. 도쿄올림픽(1964년)에서는 ‘개회식과 폐회식에서 국명이 바뀐’ 나라로 화제가 되었다. 개회식에서는 ‘북로디지아’라는 나라로 입장행진을 했는데 회기말(會期末)인 10월 24일에 염원하던 ‘독립’을 이루어 폐회식 때는 ‘잠비아공화국’으로 입장. 상쾌하게 걷는 기수에게 관중석과 세계는 축복의 대갈채를 보냈다. 그 ‘독립’의 아버지가 카운다 초대 대통령이다. 채식주의자.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날 있었던 일은 확실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아프리카 여성 한 무리가 백인이 경영하는 정육점에서 난폭하게 쫓겨나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들은 정육점이 강매한 ‘부패한 고기’의 지독함과 가격에 항의했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우리 동포가, 아프리카인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는 것만 먹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대통령이 독립 후 가장 먼저 손댄 일은 자신들 정부 각료의 급료를 낮추는 일이었다.
“이래서는 너무 많다.” 식민지 시대의 급료 체계는 격변했다.
1990년 가을 일본을 방문한 카운다 대통령을 예방했다(11월12일). 악수를 나눈 손이 따뜻했다. 대통령은 미리 4권의 책 한권 한권에 정중하게 헌사를 쓰시고 나를 기다려주셨다. 거구이며 섬세한 마음 씀씀이를 지닌 분이었다. 나는 대통령이 쓴 어린시절의 추억을 언급했다.
“눈물 어린 심정으로 읽었습니다.”라고. 대통령은 8형제 중 막내. 8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당시 보기 드문 여교사였다. 어려운 살림을 변통(變通)해 학교에 보냈다.
“학비는 1년에 2실링 6펜스. 지금으로 치면 맥주 한 병 값이지만 당시는 거액이었다. 장래가 유망한 많은 어린이들의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만들어버렸는가. 부모에게 단 한 푼의 동전이 없다는 이유로! 어린시절 친구들이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지금도 내 가슴은 분노로 불타오릅니다.”
독립 전, 식민지 정부는 교육과 의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70여 년에 걸친 지배 후 독립했을 때는 대졸자가 전국에서 1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의사 3명. 법률가 1명. 기술자도 1명. 다른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두 얼마나 배우고 싶었을까! 많은 어머니가 오로지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심정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부업을 하고, 세탁주문을 받아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나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차별은 따라다녔다. 대통령이 교사를 하고 있었을 무렵의 사건이다.
당시, 아프리카인은 정문으로 유럽인 가게에 들어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승강구에서 큰소리로 필요한 물건을 말하면 좁고 긴 구멍으로 상품이 밀려나왔다. 상품을 고르지도 음미하지도 못했다. 8월이었다. 카운다 선생은 약국에 갔다. 이 가게에서는 약 외에 장난감이나 책도 팔고 있었다.
“나는 안에 들어가 정중하게 책을 주문했다. 약사는 문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험악하게 ‘여기서 나가!’라고 말했다. 나는 재차 ‘책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마을에서 여기 말고는 구할 수가 없어서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크리스마스까지 꼼짝 말고 서 있어. 그래도 책은 안 팔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카운다 선생은 사정없이 쫓겨났다. 카운다 선생은 이윽고 독립운동의 투사가 된다.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교육이란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온갖 힘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 말을 인용해 나는 말씀드렸다.
“교육의 본질에는 휴머니즘이 있습니다. 교육이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개화(開花)시키려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한 교육 활동의 연장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권위, 권력과 투쟁하게 됩니다. 창가학회의 초대 회장, 제2대 회장도 그랬습니다.”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권력. 16세기부터 4백 년간 아프리카는 폭력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다.
노예무역. 이어진 식민지 지배. 그것은 ‘하나의 대륙 강탈’ 이었다. 그렇게 해서 유럽에서는 ‘중세를 마감하고’ ‘산업혁명’을 실현했다.
즉 ‘근대유럽의 발전’은 아프리카 등 현재 제3세계의 희생 위에 세워진 호화로운 건축인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유럽인 자신이 이제는 솔선하여 통절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아는 일은, 일본이 유럽 열강을 본떠 저지른 식민지 지배라는 죄를 인식하는 것으로도 될 것이다. 카운다 대통령은 “역사상, 인도주의에 대한 가공할 만한 폭군들은 죄를, 언제나 ‘정당화’시키려고 했다. 세계를 거의 정복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잔학 무도한 행위의 증거를 은폐시키고 역사를 개찬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고무 농장. 요구한 고무의 양이 부족하면 노동자의 손발을 절단한 곳도 있다. 7, 8세 어린이도 족쇄를 채워 일을 시켰다. 그러면서도 “아프리카에 봉사하기 위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이전 ‘노예상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유럽인에게 팔리면 “덕분에 문명을 접할 기회가 주어지고 아프리카 내부에 빈번하게 발발하고 있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도 된다.” 즉 노예사냥은 아프리카인의 해방과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노예제도에 힘입어 산업혁명이 실현되자 기계 덕분에 노예제도는 필요 없게 되었다. 노예로 연행해서 단순노동을 시키는 것보다는 “아프리카에서 흑인에게 노동을 시키거나 그들과 장사를 하는 편이 이윤을 남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갑자기 노예제도는 비인도적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제도는 폐지되었다.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다.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진화론 등의 ‘과학’도 이용했다. 학자들의 ‘미리 방향 설정된 조사방법과 아전인수 격인 일반화 그리고 편향된 추론’에 의해 흑인의 ‘후진성’이 ‘증명’되었다.
“아프리카인의 난폭함은 그들의 대뇌 구조에서 유래한다. 게으름도 무능함도 충동성도.”
그런 ‘학설’마저 있었다. 폭력은 거짓으로 꾸며졌다.“그 거짓을 간파하라!”라고 대통령은 외친다.
억압당하는 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억압하는 쪽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식민지화하는 자는, 스스로 면죄부를 내리기 위해 상대 속에서 야수(野獸)를 보는 습관을 길러 상대를 ‘야수’로 취급하는 훈련을 쌓아, 객관적으로는 스스로 야수로 변모하는 법이다.”
25세의 카운다 청년은 독립운동에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기타를 들고 자전거로 전국을 돌았다. 자작한 해방가를 부르며 해방운동을 조직했다.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적어 그것은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운동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 일도 쉽지 않게 되었다. 위험도 따랐다. 그러나 희생은 각오한 터였다.
“꿀을 찾는다면 벌에게 쏘일 각오가 필요하다.”
마음이 괴로웠던 것은 베티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마저 희생시킨 일이다. 가난해서 음식도, 옷도, 약도, 다른 필수품도 살 수 없었다. “아내에게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내의 강인함 덕분에 싸울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고 한다.
잠비아. 일찍이 북로디지아가 별안간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동(銅)이 풍부하게 매장된 광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태어나고 조금 후의 일이다. 세계적으로 동의 수요가 늘어 식민지주의자들이 쳐들어왔다. 좋은 토지는 전부 빼앗겼다. 세금을 걷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이 필요했다. 광산에 갈 수밖에 없었다. 저임금에 중노동. 그러나 달리 길이 없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러나 남자 일손이 부족해져 농촌은 황폐해졌다. 돈이 되는 작물만을 재배하고 삼림지도 파괴되어 기근이 시작되었다. 저항하고자 해도 힘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지역의 수장(首長)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입자들은 옛날부터 아프리카 여러 왕국을 대립하도록 부추기고 ‘약한 편’을 원조했다. 그리고 ‘막후에서 조종’하며 싸우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강한 쪽도 멸망시켰다. ‘보호자’로 들어와 어느덧 ‘주인’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수장 중에는 폭군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열강의 기준은 ‘자신들을 따르는가 아닌가’였다. 따르면 폭군이라도 용인. 따르지 않을 경우는 폭군에게서 현지인을 지킨다는 구실로 ‘정벌’했다. 그야말로 ‘황폐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통치였다.
카운다 청년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독립할 수 있을까. 식민지 체제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 벽. 동맹파업을 했다는 것만으로 사살해 버리는 상대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청년이 가장 고심한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독립투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어려운 문제였다. ‘휴머니스트’와 ‘현실정치가’라는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러한 갈등은 독립 후에도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괴로워하던 카운다 청년이 만난 간디의 사상은 그야말로 ‘진흙탕에서 발견한 보석’이었다. 암흑의 숲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디는 ‘성인(聖人)’이면서 ‘정치가’로서 독립이라는 성공을 쟁취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무장했다. 총이 아니라 말로. 수천, 수만이나 되는 말, 말, 말. 썼다. 이야기했다. 민중을 모으기 위해. 영국정부와 세계에 요구를 전하기 위해. 권리를 빼앗긴 우리의 노여움과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잠비아 아프리카인 민족회의’를 결성했다. 바로 당은 탄압을 받고 비합법으로 몰렸다. 투옥. 9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결핵이 재발했다. 그래도 그는 옥중에서 동지에게 편지를 계속 썼다.
“그들은 잠비아라는 위대한 이름을 금지했다. 그러나 자유라는 더욱 위대한 이름을 금지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자유를 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프리카여, 어머니인 아프리카는 반드시 자유가 된다. 그리고 우리도! 힘을 내자. 우리는 아직 첫발을 내디딘 것 뿐 이다.”(1959년 4월 28일)
출옥 후에 ‘통일민족독립당’이라는 새로운 당의 당수로 취임. 간디주의를 공식적인 정책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대화하고 대화하고 또 대화하자….” 대화할 때의 말도 명쾌해야 했다.
“말은 무기다. 애매모호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랫동안 명쾌한 것과는 반대인 ‘공직자 특유의 거짓말’에 괴로워야만 했다. 빙빙 돌린 속임수의 말은 이미 진저리가 났다. “난삽한 이야기꾼, 핑계 대고 날조하는 인간, 속임수뿐인 사기꾼, 난해한 말만 구사하는 자들을 일소하자.”
카운다 초대 대통령은 말한다.
“간디의 문장에서 배워야 한다. 내용과 함께 그 아름다운 표현법에. 그의 문장은 소박하다. 그의 삶 자체와 같이.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낭비하지 않고 명료하게 그것을 전한다.”
이렇게 영국과 세계의 ‘여론’에 효과적으로 호소하여 비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대통령은 “만약 ‘힘에는 힘’이라는 노선을 취했더라면 독립 전후의 역사는 피로 쓰여졌을 것입니다.”라고 회고하셨다.
1964년 10월 23일 금요일. 수도 루사카의 독립 스타디움. 몰려든 사람들의 열기가 밤하늘로 치솟았다. 전기가 꺼졌다. 자정 1분 전, 팡파르가 울렸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곳은 이제 갓 탄생한 ‘잠비아공화국’ 국기였다. 우리 나라다…우리 국기다! 축가가 울려 퍼지는 속에 깃발은 천천히 올라갔다.
카운다 신임 대통령은 일했다. 날마다 18시간에서 20시간.
‘인간주의’를 ‘국가철학’으로 내걸었다. ‘만인에게 무료로 교육을.’ ‘만인에게 무료로 의료를.’
특산인 동(銅)이 높은 가격을 유지해 경제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동의 폭락으로 위기에 놓였다. 기간산업을 국영화하는 사회주의 정책도 충분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책무로 괴로워하게 되었다. 그래도 대통령과 잠비아 사람들은 주변 국가를 계속 지원했다.
백인 지배가 계속된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디지아(현 짐바브웨),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등 남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남아프리카 만델라 대통령이 지명 수배를 받을 때도 잠비아가 숨겼다. 자유를 향한 투쟁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거기에 대한 보복으로 백인 정권은 국경을 봉쇄하고 이웃나라로 연결된 철도도 차단시켰다.
이로 인해 수송비가 오르게 됐고, 이는 항구를 보유하지 않은 내륙국가 잠비아로써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카운다를 타도하자”라는 계획도 세워졌다. “잠비아에 투자하지 마라”라는 국제 캠페인도 이어졌다. 그러나 잠비아 사람들은 인내했다. 인구의 2%나 되는 난민도 계속 받아들였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며 잠비아 국민의 헌신과 카운다 대통령의 선견을 세계가 칭찬한다. 그러나 그는 겸허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인은 바로 우리 잠비아 민중입니다.” 학대받는 쪽에서 보아야만 세계의 실상은 잘 보인다.
“날마다, 시간마다, 분마다, 초마다, 어린이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죽거나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지진, 가뭄, 전쟁 때문입니다만 이것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4분의 3 이상 어린이들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 코끼리가 싸우면 괴로운 건 풀잎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코끼리는 풀잎이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잠비아의 15세 소녀 나마칸드 무비아나 양의 편지다.
카운다 박사 부부와 대화하고 있는 이케다 선생님 부부
(도쿄, 1990년 11월)
평화를, 무엇보다도 평화를. 카운다 초대 대통령은 정계를 은퇴한 후에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다시 세계를 뒤덮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생각하기 바란다고 호소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잠비아 SGI 종합문화센터에 발걸음을 옮겨 휴머니즘에 대해 강연하셨다.
“이케다(池田) 회장님. 당신과 우리는 인류를 위한 공통된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 동쪽 사람이 있습니다. 서쪽 사람이 있습니다. 북쪽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 사람이! 우리는 이 ‘하나의세계’ 에서 함께 커다란 ‘인간주의’ 를 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회견 당시 이야기하신 말씀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리고 79세인 지금도 여전히 초대 대통령은 ‘비폭력 전쟁’의 최전방에서 투쟁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