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도 초콜릿도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오직 평화와 자유뿐이에요.
유럽 시민 여러분, 세계시민 여러분, 인간의 평화로운 마음을 되찾게 하여 부디 이 전쟁을 멈춰 주세요!
– 구 유고슬라비아의 한 소녀
그날 나는 인도의 ‘라지 가트’를 참배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가 묻혀있는 장소이다.
어딘가에서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주위에는 푸른 숲이 있었다. 녹음 사이로 다람쥐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광대한 ‘비폭력의 성지’는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검은색 돌로 이루어진 기념비에 헌화를 한 뒤, 나는 머리를 숙여 간디의 황금과 같은 혼을 생각해 보았다.
세계를 불태운 증오의 불길을 끄기 위해 인간애(人間愛)의 맑은 물을 손에 들고 분주히 달렸던 간디의 불굴의 투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고독했을지 생각해보았다.
“간디가 이슬람교도들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한다! 도대체 간디는 어떻게 저런 녀석들을 옹호할 수 있는가? 우리 가족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죽은 아들은 이제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었는데……”
“힌두교도들의 폭력에 참으란 말입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우리 이슬람교도들이 오랜 세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십니까? 결국 간디 당신도 힌두교이기 때문이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복수심에 불타 잔인한 전쟁을 되풀이하는 피로 물든 지역을 찾아가 ‘더 이상 죽이는 것을 그만두시오!’라고 외친 늙은 성자(聖子) 그러나 증오에 치를 떨던 사람들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간디, 나가시오! 당신 같은 위선자는 더 이상 두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란 말이오?”라고 반문했다.
간디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아니 그 양쪽 모두의 편이기도 했다.
인간은 모두 형제입니다. 형제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어떻게 그저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만일 여러분이 원한다면 나를 반으로 나누시오. 그렇지만 절대 인도를 반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증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증오를 증오로 갚는다면 그 증오심만 점점 더 깊어지고 맙니다.”
상대방이 우리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상대방 집에 같이 불을 질러버리는 그러한 일들이 반복된다면, 도시는 금새 불바다가 되고 만다! 공격한 상대방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해서 자기 집이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폭력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가 없다. 보복 전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봐도, 외쳐봐도 증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추기는 사람들만 많을 뿐이었다.
1948년 1월 20일, 간디가 암살되기 10일 전의 일이었다.
집회에 나간 간디에게 누군가 폭탄을 던졌다. 힌두교 청년에 의한 테러행위였다. 다행히 폭탄은
빗나가고, 간디는 무사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되었다.
다음 날, 시크교도들이 간디를 찾아가, “범인은 시크교도가 아닙니다.”라고 단언했다.
간디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습격자가 시크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그것이 도대체 어떻다는 말입니까?
나는 어떠한 자가 범인이라도 그 사람의 행복만을 빌 뿐입니다.”
“나를 ‘힌두교도의 적’이라고 가르침 받아 증오심을 키워온 청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수록 절망에 빠졌겠지요. 나는 그 청년이 가엾습니다.”
간디는 격분한 경찰에게 ‘청년을 징계하지 말고 대신, 올바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까지 했다.
간디는 언제나 이러했다. ‘폭력’을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폭력을 없애는 방법은 비폭력밖에 없다’는 것을 그만큼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불은 물로 꺼야 하고, 증오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밖에 없다.
그런 그를 ‘테러에 무딘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간디 같은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몽상’에 사로잡혀 있다. 달콤한 감상이다”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간디는 고독했다.
그의 이름을 받드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의 신념을 따르는 사람은 적었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모든 사람을 향한 넘치는 자애이자, 몸의 골수를 관통하는 ‘삶’ 그 자체였다.
‘비폭력’은 그의 삶을 지탱했으며, 이것 없이 그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제자들에게는 ‘비폭력’이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술’이자 ‘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고독했다.
종교적으로 성실할수록, 신앙으로 더욱 깊어진 민중에 대한 사랑 때문에 민중의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정치의 현실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종교의 인간애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종교인들은 그를 ‘지저분한 정치 세계에 발을 담근 야심가’라고 비난하고 정치인들은 ‘정치의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비난했다. 중도(中道), 즉 인간의 왕도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양극에서는 그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을 상대로 일어난 테러.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야만적인 소행이다. 나와 같은 신앙을 하고 있는 SGI 회원과 친구도 희생되었다. ‘이러한 살육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희생된 시민들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이러한 방법에 그 누가 공감하겠는가? 납득하겠는가? 설사, 뉴스에서 보도된 것처럼 만약 범인이 종교적 믿음에 의해 그러한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행위가 과연 ‘순교’일까? 순교란 자신이 죽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순교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지 파괴자일 뿐이다.
지금 전 인류가 ‘테러의 근절’을 위해 결속할 때가 왔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이다. 군사적인 보복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증오를 한층 더 부추기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눈앞에 있는 ‘적’을 제압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쌓이고 쌓인 ‘증오’는 한층 더 깊이 지하로 파고들어가 세계의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날지 예상도 할 수 없게 되고, 점점 더 불안한 세계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이솝 우화에서 ‘북풍’이 나그네의 코트를 벗기려고 온갖 애를 쓰면 쓸수록 나그네는 코트를 벗지 않았다. 이 ‘북풍’과 ‘태양’의 우화를 지금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때가 아닐까.
‘힘’으로 타국 민중의 소리를 억누른 평화란 ‘죽음의 평화’ ‘무덤의 평화’이다. 우리 인류는 그러한 평화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리오 톨스토이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작성한 편지와 관련된 감동적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1910년 9월 7일자에 작성한 그 편지의 수신자는 마하트마 간디였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모스크바의 한 여학교에서 종교시험이 있었다. 주교(主敎)가 들어와 십계(十誡)에 관해, 그중에서 특히 ‘그대여, 살인하지 말라’에 관해 질문했다.
“신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금하십니까?”
여학생들은 모두 배운 대로 대답했다. “아니요, ‘어떤 경우라도’는 아니에요. 전쟁과 사형에서는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맞아요. 정답입니다!” 주교가 말했다.
그런데 한 소녀가 똑 같은 질문에 대답했다. 흥분으로 얼굴이 더욱 빨개지면서 확실하게 “어떤 경우라도 안 됩니다!”
당황한 주교가 어떤 궤변을 늘어놓아도 소녀는 결코 지지 않았다.
“아니요, 살인은 ‘어떤 경우라도’ 금지된 죄입니다. 구약 성서에 정확하게 쓰여있습니다. 예수는 살인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녀가 주장하는 진리 앞에서는 주교의 위엄도, 변설도 초라해져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교는 끝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톨스토이는 자랑스럽게 적었다.
“소녀가 이긴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전쟁 중에도 안 된다!”라고 말한 소녀의 목소리에 지금 확성기를 달아 세계 각국에 울려 퍼지게 하자!
“아니요!”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전쟁의 세기이던 20세기, 수십억의 희생자가 나왔다. 인류는 그 비극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새로운 세기인 21세기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대원칙을 인류의 ‘근본정의’로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주의 주장을 호소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채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합의와 공감을 세계로 넓히고,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인류는 20세기의 교훈을 조금도 배우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21세기의 진정한 투쟁은 문명과 문명의 투쟁도 아니고, 더군다나 종교와 종교의 투쟁도 아니다. 바로 ‘폭력’에 대한 ‘비폭력’의 투쟁이다.
이것이야말로 ‘야만’에 대한 ‘문명’의 투쟁인 것이다.
반세기 전, 간디는 끊이지 않는 폭력과 보복의 사슬을 끊기 위해 외쳤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도덕적 자기계발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지금 인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이라고 하는 ‘정글의 규범’과 비폭력이라고 하는 ‘인류의 법’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 지금 세계는 절호의 기회를, 전대미문의 호기를 손에 쥐고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기회이다. 지금이 바로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우리는 테러를 ‘인류의 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토대가 되는 ‘정글의 규범’에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무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위대한 대화를 개시할 것을 선언한다. ‘증오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물결’로 그 불길을 잠재우고, 세계를 윤택하게 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이 이러한 비극을 근절하는 유일한 선택이며 희생자의 영혼을 달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만약에 이렇게 선언하고 실행한다면 후세의 역사가는 틀림없이 찬탄할 것이다. 대악(大惡)이 오면 대선(大善)이 온다.
그러나 대선은 혼자서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 대선을 가지고 오는 것은 항상 ‘용기’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 모두가 ‘비폭력의 용기’ ‘대화하는 용기’ ‘듣기 싫은 것을 듣는 용기’ ‘보복심을 억누르고 이성에 따르는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
이전에 나는 인도문화관계평의회의 시크리 장관과 만날 때 인도의 사상과 비폭력 정신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리고 “반드시 ‘정신 대국 인도의 빛’을 일본에 전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나의 바람은 1994년 일본에서 개최된 <아소카 간디 그리고 네루 –치료의 손길 展>으로 실현되었다.
아소카 대왕은 전쟁의 잔혹함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불교에 귀의하여 ‘무력적인 지배가 아니라 법(다르마)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한 고대의 성왕이다. (기원전 3세기경) 간디는 “비폭력의 국가는 가능할까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능합니다. 실례수사로 아소카왕의 국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례는 반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네루 초대 총리는 간디의 직제자다. 195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갈수록 폭력화되는 세계에 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원수폭(原水爆)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큰 폭탄이 아니라 보다 자비로운 정신의 폭탄이다.”라고 강연하셨다. 창가학회 도다 제2대 회장이 ‘원수폭금지선언’을 하신 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아소카, 간디, 그리고 네루 전>의 준비를 시작했을 때, 처음 인도 측에서 제시해온 ‘치유의 손(Healing Touch)’이라는 주제에 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일본 관계자들도 있었다. 아직 ‘치유’라는 말이 지금처럼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큼 ‘비폭력’의 핵심에 근접한 주제도 없었다. ‘폭력’은 마음의 ‘황폐’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만심(慢心)으로 물집처럼 부풀어버린 마음. 무력감으로 거칠어진 마음.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목마름으로 메말라버린 마음. 열등감으로 작고, 오그라져버린 마음.
상처받은 자존심을 노여움의 폭력으로 발산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느끼는 폭력 문화가 확대되고, 그것이 미디어로 증폭되어 간다.
간디에게 배운 미국의 인권 지도자 킹 목사는 “자신의 혼이 황폐한 사람은 비폭력을 실천할 수 없다.”라고 했다. 미치도록 뜨거운 서열(暑熱)을 월광이 치유해주는 것처럼 월광의 나라 인도의 빛이 평화의 마음을 넓혀줄 것을 나는 바라고 있었다. 치유된 평화로운 마음 에서 ‘겸허함’이 새기고, 겸허함에서 ‘경청의 마음’이 생기고, 경청의 마음에서 ‘상호이해’가 생기고, 상호 이해에서 ‘사회의 평화’가 생기는 것이다.
비폭력은 최고의 겸허함이며, 최고의 용기이다. 네루 총리는 “스승 간디에게 배운 핵심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마하트마는 이렇게 가르쳤다.
“강자는 보복하지 않는 자다!”
“대화할 수 있는 자가 용기 있는 자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