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 애타는 마음이 석존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마호메트의 마음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들 모두 괴로운 사람들 곁으로 달려가 희망의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종조(宗祖: 니치렌 대성인)의 '인간애의 원점'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증오의 열풍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자애의 대하(大河)로 윤택하게 만들어 가자! 안자이신(安濟伸) 박사와 나는 몇 번이나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고(故) 안자이 박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종교학자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는 달라도, 평화라고 하는 목적은 같았다.
눈앞에 아이들이 쓰러져 있다. ‘들것으로 옮기자!’ 함께 옮겨줄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든 우선 아이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함께 들것을 들지 않겠다는 편협한 마음은 종조의 마음에서 너무나도 벗어난 것이다.
안자이 박사는 정말 좋은 분이셨다. 그런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도 드물다. 소피아대학교(Sophia University)의 명예교수이며, 바티칸 성전의 신도평의회 평의원으로, 아시아에서 단 한 사람의 평의원으로 계셨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분이셨다.
평생 ‘인생의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청년의 마음 그대로이셨다. 훼예포폄(毁譽褒貶)은 안중에도 없고, 명예도 지위도 금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무엇이라도” 이것이 박사의 입버릇이었다.
소피아대학교의 제자가 침울해 있으면, 이렇게 농담을 하곤 하셨다. “그래요. 맞아요. 나는 학생을 격려합니다.(하게마스) 그랬더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세요. 내 머리가 점점 더 대머리(하게-마스)가 되고 있어요!”
학생들은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웃기보다는 울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빈 필하모니의 선율을 각별히 사랑하여, 해외에 갈 때는 좋아하는 사미센 을 가지고 가서 국제회의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여 갈채를 받고, 회의가 끝난 뒤 연회석에서 여장(女裝)을 하고 일본 무용을 추기도….
신앙이라고 하는 자신의 생명의 대지에 일본과 서양의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신 그런 인품이셨다.
안자이 박사가 쓰신 하나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필리핀, 7월의 마닐라. 작열하는 태양이 거리를 내리쬐고 있다. “아니, 이것은….”
안자이 박사는 멈춰 섰다. 알몸을 한 어린 아이들이 뛰어왔다. 맨발이다. 분명 신발조차 사 신을 여유가 없었다.
동냥을 하려고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을 내민다.
항상 쾌활하고 밝으며,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 훌륭한 학자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
일본은 아시아의 빈곤을 발판으로 삼아 번영했다. 무엇보다 같은 시대, 같은 지구상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뿌 - 뿌’ 먼지를 일으키며 화려한 색채의 ‘개조된 지프차’가 달리고 있었다. ‘지프니’라고 불리며, 시민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요금은 1988년경 1페소, 약 50센트였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안자이 박사는 아키노 정권을 탄생시킨 필리핀 민중의 무혈혁명에 경의를 표하고, 일본군에 의한 파괴에서 부흥한 필리핀의 노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 아이들의 모습을 뇌리에서 떨칠 수 없었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결코 다른 사람 일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자기 집안일, 주식가격, 아이들의 학교 및 입시 등에만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안자이 박사는 일본인의 폐쇄성(閉鎖性)을 안타까워했다. 나도 이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눈을 떠 봐요! 귀를 기울여 보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의 고뇌가 넘치고 있지 않은가.
전쟁의 불길을 피해, 평화의 땅을 찾아 캄캄한 밤에 지친 다리를 끌고 가는 어머니와 아이들.
영양실조로 어머니의 품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이가 총을 들고, 사람들에게 총 쏘는 법을 배우는 소년들.
넘칠 만큼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공허한 눈을 가진 선진국의 아이들도 있다.
한편 어른들은 제멋대로 억지 구실을 내세워 서로 미워하고, 괴로움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한 구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에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전쟁터에서, 도시에서 한 어린이가 울고 있다. 그 눈물은 서로 싸우는 인류를 응시하고 있는 하늘이 떨구고 있는 눈물이다. 21세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만! 이제 그만해!’라고.
안자이 박사는 ‘저렇게 밝은 사람도 드물다’고 할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사의 자전소설(自傳小說)의 제목은 <눈물을 참고>였다.
소설의 서두에는 ‘어머니가 가출하시고 말았다’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가난을 견디기 힘들어, 여동생과 남동생의 손을 이끌고….
어머니는 금방 돌아오셨지만, 솔직히 가출도 무리가 아니라고 할 만큼 아주 가난한 생활이었다. ‘원래는 여기가 마구간이었단다’라고 하는 집에 산 적도 있었다. 지저분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악취를 풍길 정도로 폐가였다. 지붕은 기울어지고, 다다미는 찢겨져 나가고, 게다가 집 앞은 폐품을 모으는 집하장이었다.
안자이 박사는 전쟁 전인 1923년, 센다이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인쇄회사의 석판 화공으로 솜씨도 좋고 인격도 뛰어나신 분이었지만, 처세술이 서툴렀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집안은 한없이 어려웠다. 어머니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고이고이 자란 분이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의 쳐다보는 시선이 싫었다. 생활고에 찌들어 입을 옷도 제대로 없었다. 여학교 시절의 친구가 놀러 와서는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안자이 소년은 어머니와 같이 전당포에 자주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호두과자를 사먹을 수 있었지만, 전당포 여주인이 차가운 시선으로 어머니를 보면서, 물건을 어림쳐서 값을 매길 때의 얼굴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난은 누구의 죄도 아니었다. 교활하게 살면서 돈을 많이 모으는 인간보다도 훨씬 낫다. 부모님에게 감화(感化)를 받은 탓일까? 안자이 소년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밝고 명랑한 소년으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식권 1장을 얻었다. 소년은 혼자서 독차지하지 않고, 어린 4명의 형제를 데리고 식당에 가서 감주 한 잔을 가지고 다섯 명이서 나누어 마셨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나와 견습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년 뒤, 센다이로 다시 돌아와 <카호쿠신보>를 배달하면서 고등소학교에 다녔다.
그러한 나날 속에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었다. 어머니가 파트타임으로 ‘나사 조이는 일’을 하던 곳의 공장장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지저분한 모습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머니를 무시했지만, 공장장 부부는 고용주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전혀 깔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 주셨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모두 알고 지내게 되었다. 이 부부가 천주교 신자였다.
이것을 계기로 소년은 천주교와 연을 맺었다. 아버지가 어릴때 세례를 받은 것도 알았다. 다니기 시작한 성당에서 소년은 깊이 감격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가난한 소년 배달원을, 신학박사이자 철학박사인 비손네트 신부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며, 고상하고 원대한 교리를 알기 쉽게, 막힘없이 설교해 주시는 그런 인간애(人間愛)의 소유자였다. 주위의 기독교 신자들도 소탈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세간은 냉정하다. 여기는 따뜻하다! 세간은 차별한다. 여기는 평등하다! 세간은 사람들의 불행을 기뻐한다. 여기는 다르다! 소년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가슴 뿌듯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나중에 종교사회학자가 되신 선생님이지만 이러한 성장 과정때문인지, 박사의 학문에는 서민을 향한 따뜻한 연대감이 있었다.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무언가에 기도하고, 무언가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절박한 마음을 존귀한 것이라 하여 품에 끌어안았다. 그 마음에야말로 영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러한 ‘숭고한 마음의 깊이’가 없는 학자가 자신의 수준에서 분석하고 해설한다면 종교의 진실에서는 멀어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종교는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종교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가 계속되는 것일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류가 해결해야 할 근본 과제다. 안자이 박사도 그런 점을 우려하고 계셨다. 세계의 종교가가 모인 어느 평화회의에서 일어난 일을 말씀하셨다. 당시 구(舊) 유고슬라비아의 분쟁이 ‘종교의 대립’에서 일어났다는 국제여론의 비난이 있었다. 이에 대해 회의장에서는 강한 이의가 제기되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의 시인 L 마트코빅 브라시크 여사는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는 ‘정치의 희생자’입니다. 정치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종교와 문화를 구실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舊) 유고 문제 담당자로 유엔 사무총장의 특별대표인 아카시 야스시 씨는 “종교의 이름을 빌린 투쟁이며, 정치지도자는 그런 차이를 강조하는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가고,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라고 비난했다.
종교끼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집단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투를 ‘정당화’하거나 ‘증오를 불러 자극하기’ 위해 종교가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문제는 복잡했고, 단순화된 말투는 삼가야 했지만, 종교분쟁이라고 불리는 실체를 들여다보면 ‘정치적 경제적 불만의 표현’이며, 권력자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분쟁’이 많다. 그 분쟁을 정당화할 대의명분으로, 또 적개심을 부채질하여 자기편을 결속시키는 심리조작을 위해, 종교가 이용되고 있다. 그런 측면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종교를 변호할 필요도 없고, ‘분쟁의 소방수’로서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종교는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악마도 성서를 인용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를 이용하려고 생각하면 각각의 성전(聖典)에서 유리한 부분만을 발췌한다. 그리고 종조의 명확한 가르침을 상황에 유리하게 ‘해석’해서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왜곡’하려고 해도 세계종교의 종조의 염원이 ‘인류가 서로 죽이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렇다면 서로 앙숙처럼 지내고 있는 사이에 울고 있는 어린이를 구하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가 아닐까! 적의 어린이라고 해서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종교라도 ‘사람’에 따라 선(善)도 되고, 악(惡)도 된다. 안자이 박사는 나에게 “지도자의 인간성이지요, 이것으로 종교가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됩니다.”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안자이 선생은 돌아가시기 1년 전 저서를 출판하셨다.
타이틀은 <21세기를 향한 유언> 그중에 이런 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투쟁을 위해 생명을 걸기보다도 평화를 위해 생명을 걸고 살아갔으면 한다.’
평생 그렇게 살아오신 박사였다. 종교는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편이어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일생을 보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