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가이자 서예가인 팡 샤오링 여사, 그녀와의 첫 만남은 1996년, 홍콩대학교가 수상자를 위해 준비한 만찬 모임에서 이루어졌다. 훌륭한 학식과 인품을 지닌 여성,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여성, 샤오링 여사는 그렇게 보석처럼 빛나는 여성이었다. 내면의 힘이 뿜어내는 그 찬란한 광채는 깊은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하게 연마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팡 샤오링 여사
1914년 1월 17일에 태어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여사의 아버지는 중국의 군사통제권을 효율적으로 분리한 군사 지도자 수하 장군에게 집을 임대했다. 여사가 11살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보트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오던 중이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엎드려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군인들이 배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알은 짐 가방을 관통하고 그대로 아버지 몸에 박히고 말았다. “엎드려! 엎드려!” 샤오링 여사와 여동생에게 아버지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남편이 암살된 후, 샤오링 여사의 어머니는 격동의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딸들을 준비시켰다. 바로 딸들에게 가능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교육’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931년 젊은 샤오링은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에서 유학하게 된다. 유일한 중국인 여학생이었다. 나중에 샤오링의 남편이 될 팡 잉가오 또한 이미 맨체스터에서 유학 중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학생부부가 되었다. 당시 시대 흐름과 달리 팡 잉가오는 넓은 아량으로 아내를 평등하게 대했고,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의논했다. 이후 장남이 태어났고, 두 사람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1940년, 지옥과 같은 히틀러의 침략의 불길이 영국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안전과 보안의 불빛은 꺼져갔고, 피난처를 찾아 부부는 노르웨이를 거쳐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임신한 몸을 이끌고, 기차로 3일 밤낮을 달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가족 모두가 상하이에 도착한 일주일 후,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가족은 다시 홍콩으로 향했지만, 여기서 또다시 전쟁과 마주하게 된다. 일본군의 침략. 일본군은 홍콩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다. 행군하는 군인들의 군화 소리와 총성에 떠밀려, 부부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광활한 중국 본토의 대지 곳곳을 떠돌게 된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태어난 곳이 다르다.
팡샤오링의 여덟 자녀
매일매일,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살았다. 이때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상기시켜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잉가오였다. “절대로 당신의 그림을 잊지 말아요.” 남편은 아내를 격려했다. “그 길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이야.” 넓은 포용력을 지닌 남편의 존재 자체가 용기가 되고 힘이 되었다.
1948년, 10여 년간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가족은 홍콩에 정착했다. 그런데 1950년 9월 9일, 가족 모두 평화롭고 평범한 삶의 기쁨을 이제 막 느끼려던 무렵, 남편 잉가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눈 앞이 까마득해진 샤오링은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며, 잔인한 운명의 수수께끼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의 나이 36살, 이제 홀로 8명의 자식을 돌봐야 했다.
6남 2녀, 첫째는 11살 막내는 3살. 여덟 명 모두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해요?” 똑같은 의문과 똑같은 두려움의 눈빛이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 부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그녀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항상 내 곁에 있던 당신인데…… 너무나 다정했던 당신인데…… 모든 걸 함께 했던 우리인데, 왜 이 죽음만큼은 함께 할 수 없는 건가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암흑의 미로 속에 홀로 남은 자신. 별들조차 움직임을 멈춰버린 듯한 적막감.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深海), 막막한 천공(天空) 속에 그렇게 철저히 홀로 남겨진 그녀.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살아야 해. 살아남아야 해.’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였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만큼 약한 것은 없다. 반면 인간의 마음만큼 강한 것도 없다. 샤오링은 비탄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 절망의 끝까지 가보고 나서야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생명 깊은 곳, 우주 근원의 대자비(大慈悲)에서 발원하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게 된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맛본 사람만이 태양의 자비와 사랑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기나긴 밤도 반드시 새벽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샤오링은 남편의 존재를 느낀다. 마음속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늘 그랬듯이 그녀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넨다. 마치 “여기 당신과 함께 있잖아.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샤오링은 맹세한다.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 ‘내가 전진해야 남편도 전진할 수 있다. 남편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거야!’
남편이 남긴 보물 같은 편지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남편이 물려준 작은 무역회사를 직접 운영하며,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식들에게 최고의 교육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이룬 후, 팡 샤오링은 다시 한 번 배움의 길을 출발한다. 집중적으로 서예와 그림 공부에 몰두하면서 홍콩대학교에 등록, 그리고 이후 옥스포드대학교에서도 수학한다.
팡 샤오링의 "환경보호"
그녀는 중국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완전히 새로운 독창적인 방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하겠다고 다짐했다. 한 번은 내게 자신만의 화법(畫法)을 발달하는데 족히 50년은 걸린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승리! 예술에서도 인생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노력할 때 비로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불법에서는 ‘마음은 숙련된 화가와 같다’고 가르친다. 예술도 인생도 모두 우리의 마음을 충실하게 그대로 표현한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가짐으로 이루어진다. 그 모든 역경 앞에서 팡 샤오링 여사의 마음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했다.
그녀는 그토록 깊은 슬픔을 견뎌내고 극복했다. 슬픔을 이겨낸 경험을 통해 그녀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삶의 고통은 그녀의 내면 속으로 더욱 깊고 크게 파고들었고, 그 광활한 마음의 대지에서 아름다움과 힘으로 빛나는 그림이 싹트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빛을 그리고 인생의 형상과 그림자를 느꼈다. 산과 강, 쉴 새 없이 변하는 풍경이 모두 인생의 방대한 노래처럼 들린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우주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탄생한다.
샤오링 여사의 자식들도 모두 훌륭하게 성장했다. 유엔의 동시통역가, 기업의 사장, 변호사 그리고 두 명은 의사로 일하고 있다. 여사의 딸, 안손 찬 팡 온상 씨는 홍콩의 중국 반환 관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훗날 홍콩의 양심으로 알려지게 된다. 우리가 만난 다음 날, 어머니와 딸이 함께 홍콩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케다 선생님 내외와 팡 샤오링 여사(가운데)
(홍콩, 1997년 2월)
나중에, 팡 샤오링 여사는 내게 두 장의 가족 사진을 보내주셨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다정하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순진무구한 팔 남매의 모습이 담겨있다. 여사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1년 후에 찍은 사진이다. 다른 한 장은 1995년에 찍은 사진인데, 근엄하고 당당하게 성장한 팔 남매가 어머니 곁에 모여 활짝 웃는 사진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팡 샤오링 여사는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 6시간 내지 8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바쁘게 사는 게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씀하신다. “바쁘게 일에 몰두하면 사소한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요. 얽매이지도 개의치도 않게 되지요.”
1997년 1월, 여사의 나이 83세. 그녀는 붓을 들고 자신의 인생을 압축하는 글을 새긴다.
다시 한 번 나는 일어선다. 저 높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