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다이사쿠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사임

어떠한 공식 회합에도 참석할 수 없게 된 이케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회원들을 격려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이케다 선생님은 불교자도자로서의 활동 중단을 요구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일본 내에서 창가학회가 확립된 단체로 영향력을 가지게 되자, 조직 내에서 사악하고 파렴치한 자들이 이케다 선생님을 몰아 내고, 조직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케다 선생님에 대한 창가학회 회원들의 깊은 신뢰와 존경은 탐욕스러운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자아내고, 그들은 이케다 선생님을 퇴출시키기 위해 일련정종의 권위와 결탁 한다.

창가학회는 1930년 재가불교단체로 출발할 때부터 일련정종의 최대 지원단체이자 기부단체이기도 했다. 일련정종은 니치렌불법의 여러 종파 중 하나인 성직자 집단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창가학회의 급성장과 함께 일련정종 또한 낙후한 중세시대의 승가단체에서 일본 최대의 종교단체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창가학회와 같이 대규모의 영향력 있는 재가단체의 성장은 충격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봉건주의에 빠져있는 일련정종 또한 창가학회의 눈부신 성장을 바라보는 일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케다 선생님의 반대자들은 창가학회와 일련정종 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부추기며, 창가학회와 이케다 선생님의 영향력에 대한 일련정종의 두려움에 불씨를 댕긴다. 갈등의 원인은 이케다 선생님이 강조해온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승속 평등에 대한 주장이다. 불신과 신랄함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련정종은 이케다 선생님의 회장 사임을 요구한다.

성직자의 권위문제

니치렌 대성인 가르침의 출발점이자 핵심은 모든 사람들의 근원적 평등이다. 그러나 사회적 계급과 복종을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와 종교적 환경에서 재가신도는 성직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대(事大)해야 한다는 풍토가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 성직자를 통해서만 해탈할 수 있다는 태도는 니치렌 철학의 궁극적 핵심을 훼손한다.

도쿄에서의 이케다 선생님과 창가학회 회원들

창가학회 회원수가 한창 증가할 1970년대, 이케다 선생님은 승속 평등과 승속 화합에 대한 견해를 스피치와 강의를 통해 주장해왔다. 이케다 선생님은 승려의 존재를 반대하지도 않고, 승려를 파멸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의 행동은 단지 신도들에게 권위를 남용하는 승려들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자 택한 결단 이었다. 신도들은 승려로부터 늘어만 가는 공양에 대한 부담감과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관해 이케다 선생님은 승려들과 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많은 승려들은 승속 평등을 강조하는 이케다 선생님의 공공연한 주장과 이케다 선생님에 대한 학회원의 깊은 신뢰에 위기를 느꼈다. 학회 내부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파멸시키려고 한 자들은 이러한 승려들의 두려움을 악용했다. 그들은 승려와 학회 사이에서 이간질을 놓으며, 학회가 승려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등의 거짓 보고를 한다. 비난과 반박의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지고, 창가학회 회원들조차 승려들의 분노와 의심에 한계를 느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몇몇 창가학회 간부들은 과연 이케다 선생님의 사임만이 이 위기를 진정시키고, 회원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케다 선생님이 용퇴할 의사를 밝히자, 승려 측에서 제시한 조건은 너무나 가혹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회합에서 스피치할 수도 없었고, 그의 글은 학회 신문 및 기관지에 실을 수 없었다. 거의 매일같이 학회원들과 만나 대화하고, 지도했던 20년의 시간 후, 이케다 선생님은 무대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불합리한 조건이 결국에는 승려들의 본색을 드러내주었고, 이 모든 사건을 조작한 핵심 인물은 이후 승려들과의 마찰로 인해 모든 진실이 밝혀짐으로써 법정에서 파국을 맞게 된다.

새로운 길을 찾다

이케다 선생님은 아내 가네코 여사와 함께 회원 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격려했다.

1979년 4월 24일 회장 용퇴 후, 여러 가지 속박에 대한 이케다 선생님의 반응은 창가학회 회원에 대한 그의 헌신과 신념을 잘 나타내준다. 신앙에 관한 지도를 할 수 없었기에, 선생님 시와 서예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회원을 격려한다. 공식 회합에 나갈 수 없었기에, 전국을 다니며 회원 가정을 방문하여 개인 지도를 한다.

당시 종문에게는 일본 창가학회에 비해 SGI는 아직 미미한 조직이었다. 따라서 이케다 선생님은 SGI 회장 직은 유지하게 된다. 일본에서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이케다 선생님은 세계로 눈을 돌린다. 선생님은 회고한다.

“나는 결심했다. 전 세계를 순방하며 해외에서 일본에 있는 회원들을 격려하기로. 창가학회 회장 직에서는 물러났으나, SGI 회장 직에서는 물러날 수 없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 불법이다. 누가 세계 평화를 위한 나의 투쟁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개인적 이해와 시기, 질투로 인해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은 평화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1980년 가을,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향한 나의 평화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