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0월 북남미 출국 (일본 하네다)
회장 취임 뒤, 곧 이케다 선생님은 미국 방문을 계획한다. 방문 목적은 미국인 남편을 따라 이민간 일본인 학회원 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이케다 선생님의 계획을 창가학회 간부들조차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짧은 기간에 몇천 명의 회원에서 거의 백만 명에 가까운 숫자로 늘어난 일본의 학회원에게 모든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조직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니치렌불법의 세계유포’라는 전망은 창가학회 최고 간부조차도 아직 숙고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 10월, 회장 취임 5개월 뒤, 이케다 선생님은 미국,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방문의 여정을 시작한다.
현재 세계 192개국ㆍ지역 1,200만여 명의 회원에 이르는 SGI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다양한 활동을 하는 불교재가단체로 발전했다. 1960년 당시, 젊은 이케다 선생님과 의견을 달리한 창가학회 간부들은 자신들과 이케다 선생님의 이상 차이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은 아마도 선생님의 가장 비범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인 ‘이상의 웅대함’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용기’를 상징한다. 이케다 선생님의 첫 방문지는 십여 명의 창가학회원이 살고 있던 하와이였다. 이틀 뒤, 이케다 선생님은 네 명의 창가학회 간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로 향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코이트 타워 에 있는 콜럼버스 동상 앞에서 창가학회원 들과 함께한 이케다 선생님 (왼쪽 다섯 번째, 1960년10월)
당시 미국 창가학회원 수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으나, 이케다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미국에서의 불법유포는 파동쳐 나간다. 선생님은 미국에 사는 회원들이 교류하고 서로 촉발할 수 있도록 책임직 간부를 임명하고 조직을 정비한다.
이케다 선생님이 만난 많은 일본인 부인들은 조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 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이케다 선생님은 미국 시민권 획득, 운전면허증 취득, 영어실력 향상이라는 분명 하고 구체적인 지도를 한다. 미국생활 자체를 힘들어한 당시 부인들 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제였으나, 이 세 가지 지도를 바탕으로 그들은 서서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간다.
뉴욕에서 이케다 선생님과 동행 간부는 유엔본부를 탐방하여 유엔총회 회의를 관찰한다. 이케다 선생님은 바로 그곳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적 조직의 역할과 가능성’에 관해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선생님은 제언, 대담 및 SGI와 유엔 간의 공동 협력 작업 등을 통해 지금도 이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또한 그때 새롭게 회원국으로 탄생한 아프리카 대표들에게 받은 활기와 생동감을 이야기하며 ‘21세기는 아프리카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후 이케다 선생님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의 만남, 문화와 학문 교류를 추진하고, 여러 저서를 통해 아프리카와 교류의 중요성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