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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사 에스코다 로하스 - 평화의 어머니, 문화의 어머니 세계 여러 인물과의 만남을 회상하는 수필에서 발췌

필리핀의 마리아 테레사 에스코다 로하스. 그녀의 마음은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분노로 불타고 있다.
“어머니는 제 눈앞에서 끌려갔습니다. 일본헌병대가 소총을 들고 갑자기 집으로 쳐들어 왔어요.
그때 제 나이 16살. 1944년 8월 27일, 그 날을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

호세파 라네스 에스코다
[필리핀 걸스카우트 창시자]

어머니 호세파 라네스 에스코다 여사는 천사나 다름없는 숭고한 여성 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타인을 돕고자 헌신했다. 결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일본의 군사점령 치하에서도 임시 수용소와 교도소를 오가며 필리핀 군인과 미군을 도왔다. 그녀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군인들이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잖아요. 죽음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로하스 여사는 기억을 떠올린다.
“일본 헌병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들은 어머니를 강제로 연행했어요. 양쪽 에서 어머니를 잡고 집에서 끌어내 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요새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교도소로 사용되던 곳이에요…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죠.”

세 명의 헌병은 집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대한 반항 행위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가 필리핀 군인뿐만 아니라 미군까지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군이 알아낸 거죠. 그래서 화가 난 거예요.”
‘하지만 입장이 달라져, 일본군이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해보자. 나는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들을 도울 것이다.’
“어머니는 진정한 인도주의자였습니다. 차별 없이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돕고자 하셨어요. 하지만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에스코다 여사는 우리가 불법에서 말하는 보살과 같은 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만일 마부가 가차 없이 말에 채찍질을 가하면, 에스코다 여사는 바로 마부를 질책했다.

일제 군사 점령기 동안, 필리핀 사람들은 일본인과 마주치면 강제로 머리 숙여 인사해야 했다. 만약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서 뺨을 세게 맞았다. 필리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를 ‘온 나라 전체가 끔찍한 포로수용소로 전락했던 때’로 기억한다.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필리핀 아이들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고, 땅으로 떨어질 때 검으로 아이들을 베어버리기 까지 했다.

로하스 여사와 만나는 이케다 선생님 부부
(마닐라, 1993년 5월)

로하스 소녀는 절대로 일본인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다.

“좋은 일본인도 있고 나쁜 일본인도 있는 거란다. 필리핀 사람들 중에서도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있잖아. 미국 사람도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이 있듯이. 그러니 좋은 일본인에게는 호의를 베풀어야지. 나쁜 일본 사람만 미워하면 된단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태도는 완전히 반대였다. 에스코다 여사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됨됨이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했다. 반면, 일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본인인가 아닌가’였다. ‘모두가 인간 이다.’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를 정당화했다. 중국인들에게도 한국인들에게도 그리고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잔인 무도한 행위를 비난하고 저항한 일본인들 또한 ‘애국심 없는 국민’으로 낙인찍혀 탄압당했다. 창가학회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과 제2대 도다 조세이 회장의 경우가 그렇다. 에스코다 여사가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헌병에게 끌려갔을 무렵,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투옥 중이었다. 세 사람 모두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였다.

거짓, 차별, 그리고 오만함으로 살아가는 압제자(壓制者)들은 진실과 인간애가 녹아있는 민중운동과 대항했다. 이 두 세력 간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에스코다 여사의 확신, ‘결코 인류애를 져버리지 않겠다’는 결의는 감옥에서조차도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군은 반일운동의 정보를 캐기 위해 악독한 고문을 가했다. 구타와 출혈의 반복, 그러나 그녀는 단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때로는 일주일가량 음식이 배급되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그녀의 미래를, 그녀의 희망을 이야기 했다. 그녀가 설립한 필리핀 걸스카우트 그리고 전국여성클럽연맹(National Federation of Women’s Clubs)의 발전과 두 자녀 또한 자신처럼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얘기했다.

그녀를 위해 외부에서 음식이나 물이 반입되었을 때는 언제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나눴다. 그녀 또한 굶주림으로 지쳐있었지만,
“난 괜찮아요. 여러분 먼저 드세요.”라고 상냥하게 권했다. 선의와 인간애로 가득 찬 이 꾸밈없는 말 속에는 그 어떤 유명한 말보다 깊은 지혜가 담겨있다.

1945년 초, 에스코다 여사와 남편은 수용실에서 끌려 나왔다. 언론인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이미 몇 달 전에 체포 구금된 상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두 사람이 어떻게 처형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부모님이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모릅니다.”
로하스 여사는 비통해한다. 하지만 어머니 에스코다 여사가 돌아가시기 전, 밖으로 내보낸 마지막 전갈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나는 내 의무를 다 하였다 …… 나는 떠나지만, 만일 너는 살아남는다면 우리 국민들에게 이렇게 전해다오.
‘필리핀의 여성들은 진실과 자유의 불꽃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했습니다.’라고”
죽음의 침묵보다 더한 웅변은 없다. 특히, 그 죽음이 ‘자유’ 라는 이상을 위해 자신을 바친 순교자의 죽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에스코다 여사는 ‘자유의 불꽃’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았다.

46세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삶은 짧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범적인 그녀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무언의 외침을 전하고 있다. 그녀는 필리핀 가장 고액권 지폐인 1000페소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많다.

1993년 필리핀 발레단 일본 공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녀의 힘찬 정신이 아들과 딸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스코다 여사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훗날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고, 미국 유학을 위한 모금도 마련했다. 에스코다 여사가 감옥에서 품은 꿈 하나가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로하스 여사는 활기차게 어머니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병약했던 로하스 여사는 체질 개선을 위해 어머니의 권유로 발레 를 시작했다. 이후 로하스 여사는 필리핀 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재단은 ‘창의적 활동 추진’ ‘전통문화 지키기’ ‘다른 국가와의 문화 교류 도모’를 목표로 운영된다. 재단 이사장으로서 로하스 여사는 영속적 유산을 남겼다.

 “아시아 민족들이 알고 있는 일본의 얼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군국주의 일본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대국으로서 오로지 이윤에만 집착하는 지금의 일본입니다. 일본은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야만 합니다. 일본은 문화교류를 추진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일본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일본 출장에 동행, 일본의 전통예술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제서야 일본에 대한 감정이 변하더군요. 일본예술을 사랑하게 되었고, 예술을 통해 마침내 일본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적대감을 비롯한 극한 감정을 초월하게 해줍니다. 문화는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매듭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문화교류라는 결실을 맺었다. 필리핀 문화재단의 협력단체인 민주음악협회의 후원으로, 1993년 필리핀 발레단의 일본투어가 성사되었다. 아시아 최고라고 호평받는 발레단은 세계무대에서도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의 한 신문은 “100마일을 걸어서라도 볼 가치가 있는” 공연이라고 평가했다.

‘평화의 어머니’ 에스코다 여사는 문화를 사랑했다. ‘문화의 어머니’ 로하스 여사는 평화를 사랑했다. 두 세대에 걸친 어머니와 딸의 이 외침이 과연 일본까지 전해질 날이 있을까? 아니면 비겁한 오만함이 다시 한 번 일본을 “영혼 없는 국가”로 전락시킬 것인가?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은 일본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다.

이 수필은 1996년에 작성되었고, 로하스 여사는 7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