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29일
21세기 개막을 눈앞에 둔 지금, 다시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여러 가지 교육개혁 논의의 동향에 대한 저의 솔직한 소감과 구체적인 제언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요즈음 ‘등교 거부는 어느 아이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교육부의 1999년도 학교 기본조사에서는, 등교를 거부하는 초등·중학생은 13만 명을 넘어 지금까지 최고 수치를 나타낸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290명 중 1명, 중학교에서는 40명 중 1명, 즉 한 반에 1명이 다양한 형태로 고통받고 있는 셈입니다.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자살 등의 비극도 끊이지 않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걱정하고 있는 약물중독도 무서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최근 14, 15세의 아이들이 저지른 연쇄살인사건, 올해에 들어서도 17세 소년의 주부살해사건이나 고속버스 탈취사건, 쇠파이프 살인사건 등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교육 관계자와 청소년 심리에 박식한 전문가들이 원인을 분석하여 대책을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 문제의 심각함에 대해 어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아연실색하여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실정이 아닙니까.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의 건전한 성장을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저 자신도, 벌써 16년 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창가학회 전국 교육자 총회에서<교육이 지향해야 할 길 - 나의 소감>이란 제목의 제언을 발표했습니다.
교육개혁은 정치주도형이 아닌 인간주도형으로 해야만 한다고 말했고, 그것에 의거해야 할 이념과 지표라는 측면에서 ‘전체성’ ‘창조성’ ‘국제성’을 겸비한 인간상을 제시했습니다. 그 당시도 교육황폐화가 우려되었고 비행, 학교폭력, 등교거부 등으로 어린이들과 직접 관계되는 부모와 교사는 물론이고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까지 탄식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15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안타까운 일이지만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문제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심각해진 것이 ‘학급붕괴’ 현상입니다.
학생이 교사의 지시를 듣지 않고, 교사가 학급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중학교에서 눈에 띄게 나타났던 이 현상은 최근 수년간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한 곳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들어가는 단계에서 아이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다 보니 학급 자체가 운영되지 않는 사태마저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교사 중 3분의 1이 학급 담임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학교라는 시스템 그 자체가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까지 갈 수 있습니다. 특히 등교거부나 집단 따돌림 혹은 학급붕괴라는 문제와 함께 교사와 학교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학력저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산수나 수학 또는 이과(理科)를 싫어하는 것을 보더라도 공부기피 현상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각종 조사에서 나타나듯이 일본 어린이들의 학력은 전체적으로 저하 경향에 있으며, 그 여파로 일부 고등교육 기관에서는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을 학원 교사에게 의뢰해 보충수업을 하고 있다는 희비극(喜悲劇)마저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아이들이 ‘배움에서 도주’하는 경향은, 아이들이 선인(先人)의 지혜를 배우고, 다음 세대에 전해 갈 인류 공유의 재산을 몸에 지니고, 창조를 위한 양식으로 해 가는 힘을 배양하는 대지인 교육의 패배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것일까요. 2002년부터 전면 시행하는 주 5일제 수업주1을 보면, 교육부가 개정한 새로운 학습지도 요령에 따라 ‘여유 있는 교육’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힘’을 기른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배움에서 도주’하는 주된 원인이 종래의 지식 편중의 주입식 교육과 과도한 입시전쟁에 있었다는 반성에서 나온 궤도수정 작업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총체적인 학력상승과 ‘배움으로의 복귀’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즉 “현상태에서 수업시간을 단축하면 남은 시간을 자율적인 학습보다, 일부는 학원 과외를 과열시키고 일부는 TV와 게임에 시간을 보내는 등, 의도한 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라는 시각입니다. 저도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등교거부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이들의 고통은 잠시도 방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학교교육의 제도적 개정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문제행동을 일으키고, ‘배움에서 도주’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병폐의 배경에는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과 가정 등 사회전체가 본래 갖고 있는 ‘교육력의 빈약함’에 그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이 폭넓은 교육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현재 일본의 교육은 인간이 진정으로 성숙해 가기 위한 시스템 그 자체가 불완전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불완전한 기능이 어린이라는 가장 약하고 예민한 부분에서 집약적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전부터 말해온 ‘어린이는 사회의 거울’이라는 지혜는 우리들이 교육을 생각할 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불멸의 철칙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모든 것을 본질론으로 끌고 가는, 일종의 환원주의라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린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어른)을 바르게 하자는 자성의 눈빛을 어른들이 항상 갖고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제도 개정이 일시적인 미봉책(彌縫策)으로 끝나거나 두더지잡기와 같이 그 때만을 넘기려는 임시방편식의 대응으로 되어버리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덕육(德育)’을 주제로 한 어느 잡지의 특집에서 작가 야마다 다이이치씨가 겸허하게 한 말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확신을 가장하여 아이들에게 덕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라도 어른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삶의 방식을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서 보여 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실제로 고도성장시대가 끝나고 거품경제의 붕괴를 통해 급속하게 드러난 어른사회의 실상은 정말이지 참담해서 기가 막히는 듯하며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활기찬 기분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정계, 관계(官界), 재계, 언론계 전반에 걸쳐 이른바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수반하는 책임)를 조금도 갖지 않고서 책임 회피와 보신, 자기 변호에 급급한 추태를 우리들은 허다하게 봐 왔습니다.
보험금을 노린 살인 등 계속되는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목적관, 가치관을 상실한 사회가 필연적으로 부르고 있는 배금주의의 만연과 어른들의 스캔들은 어린이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선배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교육력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매스컴의 흥미위주의 시각과는 상관없이, 야마다씨가 말하듯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라며 나름대로 성실하게 생을 영위해 가고 있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라 해도 얼굴을 치켜들고 가슴을 펴고 꿋꿋이 살아가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것 같습니다..
메이지 시대 사람의 기개 같은 것이 실제 이상으로 찬탄을 받고, 옛날이 그립다고 말하는 것도 일본 사회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련의 교육개혁 움직임 속에서도 전후(戰後) 교육의 축이 되어 왔던 ‘교육기본법’ 재검토를 논의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수상의 사적(私的) 자문기관인 ‘교육개혁국민회의’의 7월 보고에서도 ‘교육기본법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있으며, ‘전문과 제1조의 규정에는 개인과 보편적인 인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국가와 향토, 전통, 문화, 가정,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은 결여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국민회의’의 보고에는 없었습니다만, 그런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부가 서로 화합하고, 친구와 서로 믿으며, 이웃에게 박애를 배풀고…’라는 ‘교육칙어(敎育勅語)’ 를 재검토해야만 한다는 복고풍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덧붙여서 ‘사회기본법’ 제1조에는 ‘교육의 목적’에 대해 “교육은 인격의 완성을 목표로, 평화적인 국가와 사회의 형성자로서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고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근로와 책임을 중시하며 자주적 정신에 충실한, 심신(心身)이 건강한 국민을 육성하기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조문은 개인의 존엄에 입각해 ‘인격의 완성’을 지향한다는 보편적 이념에서 본다면 동서고금의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다. 흠 잡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육기본법’ 제정의 경위를 살펴보았을 때, 보편적 이념의 정당성은 풍토와 전통을 달리하는 토속성(土俗性)이란 측면에서 끊임없이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대해 일본의 교육관계자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개체(個體)’인 동시에 ‘인륜(人倫)’(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개체’가 진정한 ‘개체’로 되기 위한, 다시 말해 ‘인격의 완성’을 지향하기 위한 장소는 ‘인륜’ 속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륜’을 형성하려면 ‘개체’의 ‘달을 따 달라고 우는 아이’식의 에고이즘을 어디에선가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성숙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이치를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명하기 때문에 지나쳐버려 온 것은 아닐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개성이나 자유를 너무 주장한 나머지, ‘개체’를 ‘사(私)’로 왜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에고이즘이란 것에 대해 너무나도 무방비, 무경계한 상태로 지나쳤습니다. 전후(戰後)의 ‘교육기본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교육칙어’에 강하게 반대하고 개인 존중이라는 이념을 교육목적의 기축으로 삼으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모리도 다쓰오 씨입니다. 모리도 씨가 중앙교육심의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1966년), 전후의 평화교육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대되는 인간상’을 주장한 데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모리도 씨 나름대로 반성하며 그렇게 주장할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다고 미루어 헤아려 봅니다. 앞에 열거한 ‘국민회의’의 ‘교육기본법’ 재검토 논의도 크게 묶으면 그러한 흐름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해를 구하겠습니다만, 저는 ‘교육기본법’을 졸속으로 재검토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前文)과 제1조에서 주장하는 이념 자체에는 불만은 없으며, 또한 조문(條文)중에 ‘향토와 전통, 문화’ 등의 문구를 넣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이렇다 할 실효를 기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교육칙어’의 덕목을 복권하는 것은, 그것들이 전쟁 전의 천황제도와 가부장제도하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지를 생각하면 시대착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교육부가 계속 선도해 온 관료주도형과 정치주도형의 근대 일본의 교육제도는 이제 서서히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전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든, 후의 경제대국이든 미국과 유럽의 선진대국을 목표로 따라붙어 추월하라는, 오로지 ‘따라잡기’를 지상명제로 하여 달려 온 것이 근대 일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달성을 위한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늘 논의해 온 메이지 이후 교육 상황은 정체상태에 빠지고 공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궤도수정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1세기의 교육을 생각함에 있어 ‘사회를 위한 교육에서 교육을 위한 사회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급선무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둘‘교육을 위한 사회’라는 패러다임의 착상을 저는 콜롬비아대학 종교학부장인 로버트 셔먼 박사에게서 받았습니다. 저는 박사와 여러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깊은 식견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박사는 미국 SGI의 기관지와 인터뷰할 때, 사회에서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질문받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질문은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교육에서 사회의 역할’을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육이 인간 생명의 목적이라고 나는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참으로 탁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러한 발상은 많은 부분이 ‘인류 최초의 교사’중의 한 사람인 석존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고 박사는 말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주체인 인격이 다른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한 칸트의 인격철학에서도 닮은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 생명의 목적 그 자체이자 인격의 완성, 즉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어야 할 교육이 늘 무엇인가에 종속하고 무엇인가의 수단으로 전락해 온 것이, 일본만이 아니라 근대 특히 20세기 교육의 특징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교육, 특히 국가의 근대화를 위한 장치로서 발족한 학교교육은 정치와 군사, 경제, 이데올로기 등의 국가목표에 종속하여 오로지 그것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인간 만들기’ 역할을 계속 해 왔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목표로 한 것은, 인격의 전인적(全人的)인 개화(開花)와는 전혀 다른, ‘틀’에 박힌 특정한 인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교육을 수단으로 보는 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20세기가 끊임없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상 공전의 대살육 시대를 드러내 버린 것은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부(負:그늘, 마이너스)의 유산인 살상력의 비대화도 물론이거니와, 가치기준을 인간에게 두지 않고 교육이라는 인간의 본원적인 영위에 파생적인 역할밖에 주지 않았던 근대 문명의 전도된 가치관에도 크게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 관련해서 저는 최근에 ‘IT혁명’을 둘러싼 움직임에도 일말의 위구심(危懼心: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확실히 규슈·오키나와 서밋에서 채택된 오키나와 헌장에 ‘21세기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의 하나’라고 주장했듯이 ‘IT혁명’이 21세기 메가 트렌드로 되어 가는 것은 틀림없고 우리나라도 그 흐름에 뒤쳐져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인지 학력저하의 문제를 예를 들어보아도 특히 이과와 수학계에서는, 현저한 학력저하 현상을 방치하면 일본의 경제나 기술력에 악영향을 미치고 IT혁명에 계속 돌입하는 세계의 흐름에 뒤쳐진다는 지적이 대학관계자를 중심으로 자주 들려오고 있습니다. 당연한 걱정입니다. 세계화의 시비(是非)는 제쳐두고라도 21세기 국제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 것이고, 쇄국시대라면 몰라도 일본도 그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제가 품는 위구심이란, 그러한 학력향상을 위한 대처방안이 구태의연한 ‘사회를 위한 교육’이라는 전철을 밟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IT혁명이라는 것이 근대의 발밑을 파서 무너뜨리는 성격을 가진 이상, 인간 사회에 대한 영향도 반드시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상황에 눈을 돌리면 예전의 미래론만큼은 아니더라도 낙관적이라고 할까, ‘빛’의 부분만 너무 선전하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금융면을 중심으로 한 IT혁명을 주도하며 ‘머니 자본주의’와 ‘카지노 자본주의’를 독점하는 듯이 보이는 미국에서도 ‘그림자’ 부분은 의심할 것도 없이 넓혀지고 있는 듯합니다.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IT혁명이 인간 사회에 초래한 것이 배금주의 풍조밖에 없다면, 어찌 뛰어난 수완이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저는, 이제는 ‘빈말’로 변한 느낌마저 드는 ‘인격완성’이란 말을 다시 한 번 파악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교육기본법에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한 이 말이 왜 ‘빈말’로 공중에 떠버렸는가, 그것을 보편적인 이념으로써 내실화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가 ― 당연한 것 같지만 그 곳에 일체의 교육개혁의 ‘원점’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를 위한 시도로써 이 ‘인격완성’을 ‘행복’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탁월한 교육자이기도 한 창가학회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회장은, 교육의 목적은 첫째도 둘째도 ‘어린이의 행복’에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마키구치교육학이라면 지금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만, 전쟁 전의 군국주의하에서 ‘황국소년’ ‘군국소년’을 육성하기 위해 교육기관이 총동원되었을 때, 초대회장은 시대 흐름에 맞서서 ‘어린이의 행복’이야말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단정하고, 교육칙어에 대해서도 ‘인간 생활의 최저 도덕기준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갈파했습니다.
즉 당시의 ‘사회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사회’여야 한다는 입장을 무너뜨리지 않았던 놀랄 만한 혜안(慧眼)을 가진 분이고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이 ‘행복’을 ‘쾌락’으로 착각한 것에 교육을 비롯한 전후 일본 사회의 가장 큰 미망(迷妄: 사리에 어두움)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착각이 지향하는 ‘자유’는 ‘방종’과 ‘제멋대로’에 빠지고, ‘평화’는 ‘겁이 많고 나약함’과 ‘안일함’에 빠지고, ‘인권’은 ‘독선’에 ‘민주주의’는 ‘중우주의(衆愚主義: 국민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치형태)’에 빠져버렸습니다. 끝내는 ‘인격완성’은 커녕 나이를 먹어도 유아성(幼兒性)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 심각한 ‘철부지’를 배출하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 진정한 의미의 충족감과 행복감은 ‘상호 연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여기에 불법의 ‘연기관(緣起觀)’이 설한 인간관과 행복관의 핵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우주 등등 때론 격론(激論)과 모순, 대립, 갈등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인내심 있게 그것들을 극복하고 ‘상호 연대’의 형태로 다듬고 단련해야 개성이나 인격도 자연히 광택을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호 연대’가 끊어진다면 인간의 혼은 고독한 지옥의 어둠 속을 목적도 없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의학 쪽에서 말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의 불충분’이라고 합니다만, 이 문제는 대체로 인간관계가 희박해져 가는 현대시대가 갖고 있는 병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소년법’을 둘러싼 논의가 일고 있습니다만, 아이들의 문제행동이 증가하고 소년범죄가 흉악해지는 것은 그 병리의 예각적(銳角的)인 분출이라 그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뒤덮고 있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치유를 바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끈기 있게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책무입니다.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만, 소크라테스가 청년을 감화시키는 능력을 세상 사람들이 ‘마비된 홍어’와 같다고 평한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대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육의 힘을 생각할 때 만고에 변하지 않는, 그리고 변해서는 안 될 왕도(王道)인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마음 이외에 없습니다. 최근 ‘교사야말로 최대의 교육환경’이라는 모토로 창가학회 교육부 여러분이 십 수년 간에 걸쳐 착실하게 쌓아 올린 ‘교육실천기록’이 1만 권을 넘었다는 기쁜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16년 전, 제가 ‘교육 소감’을 발표했을 때의 제안을 받아주신 것으로 초등·중등학교를 중심으로 황폐한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동고동락한 땀과 눈물의 기록입니다. 그 ‘땅에서 나오는 소금’이라고도 할 만한 존귀하고도 힘든 작업에 대해 교육을 인생의 마지막 사업으로 하고 있는 저로서도 합장하며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상호 연대’라고 하면, 인간과 자연환경의 커뮤니케이션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도 마키구치 회장은 혜안을 가진,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주요 저서인 <인생지리학>의 첫머리에는 요시다 쇼인의 “땅을 떠나 사람은 없고 사람을 떠나서 일은 없다. 인사(人事)를 논하려면 먼저 지리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를 예로 들어 자연환경이 인간 형성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자애, 호의, 우의, 친절, 진지함과 소박함 등 고상한 심정을 함양하는 것은 그 향토를 떠나서는 쉽게 얻을 수 없다”라고.
<인생지리학>이 출판된 것은 1903년. 자원이나 에너지의 유한성, 물이나 대기 오염으로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자연과 공생하는 관계를 재고(再考)해야 하는 환경문제가 일어나기 족히 반세기 전의 일입니다. 그 무렵부터 마키구치 회장은 자연과 커뮤니케이션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육체적인 손상과 죽음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인격형성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자애 등의 미덕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흉폭한 침략자로서 지구 환경을 파괴한 것이 20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를 담당할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을 육성하는 교육에서, 자연과 만나는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라는 시점은 절대로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인간끼리의 커뮤니케이션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 영상 등을 통한 가상현실 세계가 아닌 대자연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될 수 있는 한 늘려가야만 합니다. 그 커뮤니케이션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생명의 감각이나 대지와 초목, 동식물을 벗삼아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햇빛을 받으면서 생생히 약동하는 꾸밈없는 생명 공간의 확대는 가상현실과는 언뜻 보아 비슷할지는 몰라도 확실히 다를 것입니다.
‘자라 씨’라는 애칭으로 존경 받는 삼림 연구의 대가인 다카하시 노부키요 씨의 에세이 일절이 인상 깊게 떠오릅니다. 조금 길지만, 소개하겠습니다. “밤의 숲의 아름다움은, 특히 만월이 뜨는 밤은, 있잖아요. 산등성이와 하늘의 경계가 확실히 보여서 마치 판화 같아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로 흰 것과 검은 것의 세계예요. 그리고 이것은 직접 외출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요. 그야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으면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느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느끼는 것은 눈뿐만이 아니지요. 피부로는 기온과 습도를 느끼고, 코는 밤의 숲 속 냄새를 맡아요. 귀로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정확히 ‘무슨 소리’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어요. 밤의 숲 속에 가게 되면 서거나 웅크리기도 하고, 잎사귀도 앞과 뒤를 뒤집어 보세요. 그 만큼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숲에서 놀다>
21세기를 여는 키워드는 ‘공생’이라고 자주 지적해 왔습니다. 저도 수년 전에, 〈희망과 공생의 르네상스를〉이라는 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21세기의 ‘교육을 위한 사회’에서는 인간이 고립과 분단의 힘에 농락당하는 일없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결속의 연대를 깊게 맺어 대자연과도 종횡으로 소통하면서 공생의 하모니를 연주해 간다 ― 그러한 인격을 형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목적이자 제일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0년은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창가교육학체계>를 발간한 지 70주년을 맞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이 마키구치 회장의 선견적인 사상과 실천에 입각하여 주로 학교교육개혁 추진방법에 대해 제 나름대로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시안으로 제기하고자 합니다. 지금 ‘교육위기’라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부의 각종 심의회와 함께 올 3월에 수상의 자문기관으로서 ‘교육개혁 국민회의’를 발족하여 교육개혁의 방향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국민적인 과제로 정하고 심층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만, ‘특효약’을 구하는 데만 급급하여 장기적인 전망을 배제한 대증요법(對症療法:병의 근본을 치료하기 곤란한 경우,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을 치료하는 방법)식의 개혁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도 사회와 무연(無緣)한 존재가 아닌 이상, 시대 변화에 따른 시행착오는 당연히 있겠지만 개혁의 방향성이 때때로 정치적인 의도에 강한 영향을 받거나 눈가림만 하는 근시안적인 대처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러한 폐단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키구치 회장은 <창가교육학체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임시방편의 땜질식 교육이 오늘날의 일관성 없는 교육제도로 잔존하여, 학교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따라가지 못하고, 들어오는 청소년의 미래만 쓸데없이 어지럽게 만들어 놓은 상태다.” 그러므로 마키구치 회장은 신시대의 교육방침을 결정하는 기관으로서 통괄적인 심의기관인 ‘교육본부’와 그 보조기관인 ‘국립교육연구소’의 설치를 제안한 것입니다. 후자인 국립교육연구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발족하였습니다. 하지만 마키구치 회장이 지향했던 심의기관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상의 자문기관인 ‘교육개혁 국민회의’가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논의를 일시적으로 끝내버려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저는 교육에 관해 지속적으로 심의하는 장으로 새로운 ‘교육센터(가칭)’를 창설하여 교육의 그랜드 디자인(원대한 설계)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맡아 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설치에 있어서는 하나의 독립기관으로 발족하여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내각의 교체로 인해 교육방침이 연속성을 잃거나, 정치주도로 자의적인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도 독립성의 확보는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이전부터 저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에 교육을 추가한 ‘사권분립’의 필요성을 호소해 왔습니다.
교육은 다음 세대의 인간을 만드는 원대한 사업이며, 그 시대의 정치 권력에 좌우되지 않는 자립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또 전쟁으로 치닫게 하는 ‘국가주의 교육’에 맞서 몸을 내던지며 싸워온 마키구치 회장과 도다 2대 회장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교육센터’가 핵이 되어 국립교육연구소 등과도 연대를 맺어 확고한 이념과 장기적 전망에 서서 교육개혁의 방향성을 창출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 중대한 사명에 더하여 ‘교육센터’를 설치하는 것으로 일본은 ‘국제공헌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평화 실현에 기반이 되는 것은 국가의 이해를 넘어 교육 차원에서 교류, 협력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교육권의 독립을 세계적인 규모로 실현하기 위한 ‘교육 유엔’구상을 20년 전부터 호소해 왔습니다. 일본이 ‘교육센터’를 설립하여 ‘교육권의 독립’이라는 조류를 세계에 넓혀 가는 역할을 맡는다면 ‘교육입국(敎育立國)’이라는 일본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도 통해 가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일본이 주최국이 되어 주요 나라의 교육담당장관이 모여 교육문제를 토의하는 ‘G8 교육서밋(정상회담)’이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이제는 정부 차원만이 아닌 교육 현장에 관련된 사람들의 폭넓은 교류를 겸한 ‘세계교육자서밋’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이를 일본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가면 어떨까 하고 제안합니다. G8 교육서밋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교육에 관계된 문제가 이제는 한 나라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국제적인 협력 추진축이 되어 ‘21세기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선두에 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최근에 초점이 되고 있는 학교교육의 혁명에 대해 몇 가지 말해 두고자 합니다.
최근 내세우고 있는 주된 개혁내용은 주5일제 수업의 도입으로 ‘여유’를 회복하자는 ‘학교교육의 축소화’와 학구(學區:공립학교의 통학구역)제의 재검토나 공립 중고일관교(중고등학교를 합해 6년제)의 증설 등 자유화를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 규제완화’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주입식 교육을 반성하거나 학교 간의 자유경쟁을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제도를 받아들일 태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이 선행된다면 어린이들의 자조(自助) 노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제도가 되기 쉽습니다. 이념 없는 자유주의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마키구치 회장은 “해방(解放)만 시켜놓고 건설적인 모색 없이 궤도 없는 방종주의에 빠지는 것은, 천진난만한 자녀들의 교육경제를 위해서라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 경종은 시대를 초월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유’에 대해 학교나 가정 혹은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 ― 지나치다고 할 만큼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마키구치 회장이 “방법상의 개량안(改良案)은 교육목적관 확립을 선결문제로 한다”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무엇을 위해’라는 근본 목적으로 되돌아가 구체적인 개혁안을 검토해 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한 ‘여유’이며 ‘자유화’인지,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을 추진한다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마키구치 회장은 어떤 의미에선 학교의 축소화에 통하는 ‘반나절 학교제도’를 제창하였습니다만, 오늘날 부르짖고 있는 ‘주입식 교육 편중’에 대한 비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신의 균형 있는 성장을 꾀하기 위해서 ‘학교 학습’과 ‘실질적인 사회체험’을 동시에 추진하여 충실을 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마키구치 회장은 “현 교육의 병질(病疾)은 지육(知育:주입식 교육) 편중이 아니고 정당하게 지육하지 않는 데 있다” “장래의 교육은 지육의 멸시나 경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육의 증진에 있다. 그 철저한 개선에 있다”고 말하며 학교가 그 과제에 진지하게 임하도록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를 비판적인 안목으로만 본 나머지, 그 기반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축소화를 일률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학교교육을 ‘바른 지육의 장’으로 회복할 것인지, 그런 관점에서 개혁의 방향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진정 학교교육을 바꾸기 위해서는 ‘내부의 개혁’이 따라야만 합니다. 여기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중앙 주도의 통제형 시스템을 고쳐 학교마다 재량의 폭을 넓혀, 선출 과정을 민주화·투명화한 다음에 교장의 권한을 확대하거나 교사의 창의성을 장려해 가는 제도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개혁이 위에서 내려오는 타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처리하는’데 바빠 여러 가지 제약도 따랐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까요. 원래 교육이란 어린이를 위한 것이지 ‘국가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과서 검정이나 학습지도 요령을 포함해 국가가 세부적인 교육내용마저 깊이 관여하는 제도 아래에서는 학교나 교사의 자율성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개성이나 창조성을 기르는 토양도 배양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국가는 넓은 범위의 통일된 기준만 정하고, 운용에 있어서는 현장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정해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한편에서는 ‘학교의 교육력’을 높이기 위해 현장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있듯이 교사는 서로 향상을 도모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가야만 합니다.
지금의 개혁 논의 속에서 ‘교사자격증 갱신제’ 등 교사 개개인의 자질을 묻는 제도도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의미에서 ‘학교의 교육력’을 높여 가기 위해서는 학교 전체가 한마음이 되어 도전하는 환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열린 교실’을 모토로 교과나 학교의 테두리를 넘어 모든 교사가 정기적으로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여 교내연수를 행하는 제도나, 가까운 학교와 교류를 겸한 교육연수를 추진하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반 기업에서도 종신고용이나 연공서열을 중심으로 한 일본형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듯이, 선의의 경쟁이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학교교육을 향상하기 위해서 교사들은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여 서로 ‘자극’을 받고 ‘촉발’해 가는 자리가 필요하며, 함께 절차탁마하고 연대감을 넓히면서 ‘학교교육력’을 높여가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또 보호자나 지역 관계자에게 학교를 공개하는 날을 정기적으로 갖든지, 같은 지역에 있는 초·중·고등학교 교사 간의 의견 교환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지역에서 협력 관계를 넓혀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충실한 학교교육을 위해 한 가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다양한 형태의 학교를 인가(認可)하는 것과 ‘실험적인 수업’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외국의 모든 나라에서는 일반적인 학교와 다른 교육방식을 지향하는 다양한 학교를 인가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는 슈타이너학교와 같은 독자적인 교육사상을 근본으로 한 학교나 미국의 ‘차터 스쿨’,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과목을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는 ‘프리 스쿨’ 등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다양한 학교를 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교육개혁국민회의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공립학교를 지역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 스쿨’을 설립하자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형태의 학교 인가요건을 완화하는 한편, 교육실천 성과를 보고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또한 기존의 학교에서도 ‘실험적인 수업’을 장려하고 이 역시 실천사례를 모아 보고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요. ‘배움에서 도주’를 우려하는 속에서, 학교가 어린이들에게 항상 ‘즐겁게 배우는 곳’이 되고 ‘즐겁게 살아가는 곳’이 되도록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교육의 생명선입니다. 교육부에서는 금년부터 국·공·시립을 불문하고 독자적인 교과과정을 현장에서 주력할 수 있는 ‘연구개발학교’ 에 재정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현장의 창의성을 장려하는 제도가 생기는 것은 저도 환영하는 바입니다만, 이렇게 쌓아 올린 성과를 분석하고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교육계 전체를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 유명한 철학자 듀이가 시카고의 실험실학교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교육이론을 완성시킨 것과 같이, 교육에 있어서는 이론과 실험증명의 상호 반복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키구치 초대회장의 <창가교육학체계>나 도다 제2대 회장의 <추리식지도산술>등의 저서도 교육자로서 현장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쌓아 가는 속에서 창출해 낸 것입니다.
또 도다 회장은 ‘창가교육’의 이론을 실천, 증명하는 장으로 사설 ‘시습학관(時習學館)’을 세워 어린이들에게 학습지도를 하였습니다. 마키구치 회장은 저서 속에서 이것을 자신이 구상하던 초등학교로 구체화하여 ‘사립초등학교 시습학관’이라고 기록하고 ‘본 연구의 유일한 최대의 가치 증명’이라고 도다 회장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키구치 회장이 구상하고 있던 창가교육을 근본으로 한 학교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도 바로 도다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앞에서 창가학회 교육부 실천기록이 1만 권을 넘었다고 언급했습니다만, 이러한 교육현장에서 모은 귀중한 기록이나 실천사례에서 이끌어낸 교육방법을 다시 현장으로 환원해 가는 것은 정말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학교교육의 개혁으로 창조적인 ‘배움터’를 확립함과 동시에,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실질적 체험’을 통해 인간성을 함양시키기 위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어린이들에게 나타나는 경향으로 원만하지 못한 친구관계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자주 지적되고 있습니다.
또 입시경쟁으로 인해 시험에 관련된 것 이외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어린이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TV나 게임, 인터넷 등 가상 현실에 빠져든 나머지 현실 감각이 마비되거나 현실과 동떨어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회나 자연과 직접 관계를 맺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요즈음 논의하는 것 중에서 어린이들에게 자원봉사 등의 활동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체험학습’과 같은 단발적인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활동해 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거나 자원재활용 운동과 같이 무언가 사회에 환원해 갈 수 있는 성취감을 느끼는 활동이나 산림녹화 작업, 자연보호 활동과 같이 성과가 장래까지 남아 있는 활동이 가장 바람직하겠습니다. 최근 청소년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가운데 어린이들의 폭력성이나 공격성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건설적인 활동에 힘써 가는 사이에 심신의 균형이 잡힌 성장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배나 투쟁 본능을 정화(淨化)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대신하는 무언가 ‘도덕적 등가물(道德的 等價物)’을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평화나 건설을 위한 활동에 종사하는 사이에 어린이들은 한층 더 건전한 감정과 안정된 이상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이 점은 마키구치 회장도 ‘반나절 학교제도’ 구상에서 ‘청소년의 넘쳐 흐르는 에너지가 사회를 위협하는 쪽으로 향해 있다면, 이것을 가치적인 쪽으로 전환함으로써 개인의 행복과 사회 공헌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실감하는 경험은 어린이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으며 마음의 성장에 확실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내년은 유엔이 정한 ‘국제 자원봉사의 해’입니다. 이것을 기회로 학교현장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통해 자원봉사 활동에 대한 인식을 넓히면서 21세기 인도(人道)사회의 길을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교육개혁의 초점이라 할 수 있는 대학입시제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재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고등학교가 단지 ‘대학입시 준비기관’이 되어 버린 경향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반면 장래에는 아이를 적게 낳게 되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수가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도기에 해당하는 지금이야말로 대학입시제도를 재고해 보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학생 측에도 대학 측에도 진정 유익한 제도로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다양한 입시방법을 추진하는 일입니다. 저는 대학입시를 ‘떨어뜨리기 위한 선발시험’이 아닌 ‘입학하기 위한 적성판단’이라는 관점에 서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필기시험뿐만 아니라 추천입학 등 다양한 선발방법을 마련하여 ‘입학의 문’을 넓혀 지원자의 ‘배우려는 의욕’을 존중하는 시험을 지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대학의 9월 입학’을 도입하는 안입니다.
이것은 당초 국제화와 함께 증가하고 있는 해외유학이나 귀국 자녀를 위한 관점에서 호소해 온 것이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입학할 때까지 반년 가까운 여유가 생김으로써 입시를 준비하는 기회를 늘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사회체험을 하거나 독서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는 등 자신의 인생을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로 이용하는 것도 한 가지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관련하여 대학교육의 본연의 자세에 대해 기술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전체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교육을 하기 위한 검토입니다.
최근의 경향은 이수과목 중에서 전문분야에 비해 기초적인 일반교육의 무게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눈부신 사회 변화와 함께 학문분야의 전문화나 세분화가 더욱 진척될 것을 고려해 본다면, 학생들이 받는 교육내용이 더욱 한정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념이 명확하지 않은 일반교육의 본연의 자세를 재검토하여 ‘교양교육’에 충실을 기할 것과 대학원과도 연계한 ‘전문교육’ 확충에 몰두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내년에 미국소카대학교(SUA)의 오렌지군 캠퍼스가 개교합니다. 이 대학은 교양교육을 주체로 한 ‘리버럴 아츠 칼리지(교양대학)’로서 운영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성을 기른 후에 대학원 등에 진학하여 전문성을 연마해 간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학에서 이상적인 교육을 실험적이고 대담하게 시행할 것이며, 인간교육의 방향성을 확실하게 정하여 ‘21세기 교육’의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가고자 결의하고 있습니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 이외에도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발상을 근본으로 한 대학이 운영되고 있습니다만, 일본도 종적인 학부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특히 교양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단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망라하여 개별적으로 가르쳐 가는 방법보다는, 좀더 개선하여 체계적이고 학제(學際:문제해결을 위해 다른 학문분야와 같이하는 종합적 연구)적인 시점에서 재편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대학교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의욕적인 수업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 수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한 가지 원인으로, 매년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비슷한 내용의 수업을 반복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학교교육에 대해 기술한 ‘정체’라는 과제가 가장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해 온 곳이 대학이 아닐까 합니다.
교육부 대학심의회의 중간보고에도 대학 교수의 ‘가르치는 능력’에 대한 필요성을 호소했습니다만, 습관이 ‘타성’으로 되지 않았는지 점검하고 교수자격 검토의 제도화를 포함해 끊임없이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어져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교육의 ‘지반침하(地盤沈下)’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소카대학교에서는 올해 설립한 ‘교육·학습활동 지원센터’를 중심으로 교수에게는 혁신적인 수업방법을 계발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지원한다든지, 학생에게는 학습상의 곤란함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학습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 SUA의 오렌지군 캠퍼스에서도 ‘핵심 교육과정’ 중 자연과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을 자기 자신의 관계에서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지 일반교육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닌 ‘인간’이라는 공통적인 토대에 서서 학문의 기초를 종합적으로 배우는 ‘교양교육’을 대학교육 전기(前期)의 중심축으로 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후기에는 복수 전공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더블 메이저 제도’ 도입 등 대학 내에서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특정 전문분야에 뛰어난 다른 대학과 ‘학점 호환’, ‘편입학 상호 인수’ 제도를 확충해야 할 것입니다. 대입 수험 때에는 ‘합격 가능한 대학교나 학부’라는 관점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보입니다만, 이러한 상황을 고정화해서는 학생에게도 대학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각 대학이 서로 협력하여 학생이 진정으로 배우고 싶어하는 분야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을 공동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실제로 대학에서 배우는 기존의 전공분야 외에도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전혀 다른 분야로 진로를 바꾸고 싶다고 희망하는 사람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중도에 자퇴하고 재입학 해야 하기 때문에 전입의 문턱이 너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각지에서 ‘대학 연합’을 발족하거나 편·입학을 포함한 연계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볼 수 있습니다만, ‘학생 본위’의 입장에서 대담한 개혁과 대학 간의 협력을 추진해 가는 의의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대학단위’가 아닌 ‘학문단위’와 ‘분야단위’로 문호를 열어가는 것은 ‘배우고 싶을 때에 배우고 싶은 분야를 배운다’는 ‘평생 교육’의 환경을 마련하는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대학이 주력해야 할 과제로 들고 싶은 것이 ‘국제화의 추진’입니다. 특히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국제화 추진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주의’의 이념을 근거로 한 새로운 대학상을 목표로 제가 설립한 소카대학교에서는 개학 이후, 이 과제에 몰두하여 해외 여러 대학과 교육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협정을 맺은 대학이 이미 세계 70개 학교(2001년 기준. 2017년 현재 189개교)를 넘었습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서 많은 학생들이 외국에서 배울 기회를 갖기도 하고 교수 교류를 정기적으로 추진하여 상호 문화의 이해를 깊게 하는 가운데 ‘교육환경의 글로벌화’에 힘써 왔습니다.
현재 일본에 비해 미국 대학의 교육 수준이 높다고 지적합니다만, 저는 이런 ‘활력’을 낳는 원천이 바로 여러 나라의 교수와 학생을 받아들이는 ‘다양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풍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커리어 업(사무직 직원이 전수(專修) 유학 등을 통해 경력을 쌓거나 고도의 전문직 또는 관리직으로 옮기는 일)’을 위한 해외 유학이나 교수의 해외 파견만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문화 교류와 교육의 질적인 충실이라는 관점에서 여러 나라의 학생과 교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온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것과 일본인 학생의 해외 유학을 지원하기 위한 장학금 제도 등도 ‘교육입국(敎育立國)’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만 합니다. 이 테마와 관련해 많은 식자들과 함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되도록이면 빨리 영어 등의 어학교육을 추진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대학에서 국제 교류의 환경을 제도적으로 마련한다 해도 ‘어학의 벽’이 근본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한, 교류는 더 넓혀지지 않고 ‘그림의 떡’으로 끝날 것입니다. 또 어학력은 세계화의 진전과 더불어 사회에 진출해서도 의사전달을 하기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능력이 되고 있습니다.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어학은 ‘세계를 연결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의 생활을 알고, 가치관의 차이를 배우고, 같은 인간으로서 마음을 교류해 간다 - 그 길을 크게 여는 ‘무기’가 바로 어학입니다.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단, 추진할 때에는 중학 영어로 이끌어 가는 내용이 아닌 회화 등을 즐기면서 문화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학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동시에 국어나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합심해서 추진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교육을 위한 사회’라는 관점에서 논했듯이 ‘사람을 키운다’는 의미의 ‘교육’은 원래 학교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담당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아이들의 행복’이라는 원점으로 돌아가 사회의 모습과 자신의 삶의 방식을 다시 한번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어떤 세계를 구축해서 전해 주어야만 하는가. 새로운 세기를 향한 출발을 눈앞에 둔 지금이 바로 이 과제와 진지하게 맞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UN에서는 21세기의 최초 10년(2001년 ∼ 2010년)을 ‘평화의 문화와 세계 어린이들을 위한 비폭력의 국제 10년’으로 정했습니다. 저도 몇 해 전부터 이러한 시대의 방향성을 호소해 온 만큼 최대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유네스코 등을 중심으로 캠페인을 할 예정입니다만,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민중 차원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SGI에서는 미국 청년부가 비폭력 의식계몽 운동을 지난해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는 ‘빅토리 오브 바이얼런스(폭력을 물리친다)’를 테마로 비폭력 정신을 넓히는 대화운동으로, ‘전쟁과 폭력의 20세기’를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 속까지 깊게 뿌리 박힌 ‘생명 경시’의 풍조를 전환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하는 운동입니다. 인권단체나 학교·교육기관 등에서 계속 지지를 보내 주는 등,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 크게 넓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층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이러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비참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아이들은 ‘마음의 그늘’을 깊게 드리웠고, 많은 사람들이 들떠서 반응했지만 진정한 해결책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제 어른들은 그 그늘을 만든 전도(轉倒)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책임감 있는 소리를 내며 행동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창가학회에서는 일관되게 민중 차원에서 ‘평화교육’ 추진에 힘을 쏟아왔습니다. 그 운동을 새롭게 전개하는 일환으로, 국제 10년의 캠페인에 발맞춰 청년부와 교육부 등이 중심이 되어 ‘평화의 문화’와 ‘비폭력’ 정신을 사회에 폭넓게 계발하는 운동을 연구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런 운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돌보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가 아닌 서로 존중하고 도와주면서 함께 가치창조해가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동떨어진 교육’이 생명력을 갖지 못하듯 ‘교육이라는 사명을 잃어버린 사회’에 미래는 없습니다. 교육은 단순한 ‘권리’나 ‘의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사회 전체에서 의식변혁을 해가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21세기에 ‘교육’의 큰 꽃을 피워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빛날 시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저도 전력을 다해갈 것을 다짐하며 저의 소감으로 대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