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 카르(존경하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조시 총장대행과 부총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내빈 선생님. 그리고 졸업생 여러분,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 석존이 탄생한 동경하는 나라 네팔의 트리부반대학교 졸업식에서 강연할 기회를 주시어 매우 기쁘고 명예롭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봉인 귀 대학에서 이렇게 영광스럽게 학위를 받으신 여러분에게도 최대로 축복을 드립니다. 학위를 받기에 앞서 정말로 엄숙하게 선서하시는 광경에 저는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이 고귀한 서원(誓願)을 안은 21세기의 젊은 리더 여러분의 앞날을 생각하니 저의 가슴은 희망으로 고동칩니다.
오늘은 ‘인간주의의 최고봉을 우러러보며 — 현대에 사는 석존(釋尊)’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이 위대한 ‘인류의 교사(敎師)’가 남긴 정신적 유산을 ‘지혜의 대광(大光)’ ‘자비의 대해(大海)’라는 두 가지 각도에서 고찰하려 합니다.
광란하는 노도(怒濤) 속에서 ‘해도(海圖) 없는 항해’를 강요당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볼 때, 저는 귀국의 위대한 시인, 바라크리슈나 사마의 시(詩)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무지(無知)의 소년 같은 말다툼을 피하자
불화(不和)를 해소하고 번영을 향수(享受)하며
맹신(盲信)을 버리자
인간주의를 신봉하고 자타 함께 끝까지 살아가자
진리탐구와 선행(善行)의 결심을
서로 겨루지 않겠는가
오오 세계여
내가 숨을 거두기 전에
핵무기의 위협을 제거해다오
영원한 평화의 노랫소리로
전쟁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다오
(‘안녕, 오오 세계여, 안녕!’)
전란의 세기에 사막에서 물을 구하듯이 통절하기까지 한, 평화를 희구하는 시입니다. 그것은 네팔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 수원(水源)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면,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온을 가져다 주려고 언제나 고심하던 저 석존의 ‘인간주의의 최고봉’이라고 할 ‘지혜’와 ‘자비’가 거대한 모습으로 부각됩니다.
석존이 발하는 ‘지혜의 대광’은 그 첫째가 ‘생명의 보탑(寶塔)을 빛내라’는 메시지입니다.
근대의 개막에서 20세기 말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사회의 영위(營爲)는 과학기술의 발전, 산업과 경제의 성장 등 양적 확대를 주된 목표로 한 ‘진보주의’를 강력히 신앙함으로써 지탱되었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예기치 않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한 듯이 ‘진보주의’의 꿈을 계속 좇다 보니, ‘청사진’을 위해 ‘현실’을, ‘미래’를 위해 ‘현재’를, ‘성장’을 위해 ‘환경’을, ‘이론’을 위해 ‘인간’을 등한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금세기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있습니다. 인류의 이러한 현상태에 대해 석존의 지혜는 인간의 ‘생명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제기(提起)합니다.
석존의 가르침에서 정수(精髓)인 ‘법화경(法華經)’에는 장대하고 장엄한 보탑(寶塔)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펼쳐지는 우주대(宇宙大)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소우주라고 할 풍요롭고 윤택한 ‘생명’을 개척하는 것만이 석존이 생애를 건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인간개발’이라는 지표가 강조되는 추세를 보면, 이 석존의 선견(先見)은 더욱 빛납니다.
제가 10여년 전에 대담집을 엮은 로마클럽의 창립자 페체이 박사는 유언과도 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탐색한 일조차도 없는, 개발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은, 능력(能力)이라는 막대한 부(富)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다.”(《21세기에의 경종》
“이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자원이며 재생(再生)도 확대도 가능한 자원”(《21세기에의 경종》)이라고 했습니다.
박사와 저는 이 ‘생명’의 개발에 ‘인간혁명’이라는 의의를 부여했습니다. 그 개발의 열쇠가 곧 ‘교육’이며, 귀국은 모범적인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틀림없이 미래세기에 대한 책임을 자각한 ‘지속 가능한 개발’로 크게 연동(連動)되어갈 것입니다.
불전(佛典)에는 “과거의 인(因)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과(果)를 보라, 미래의 과(果)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인(因)을 보라.”(‘개목초, 어서 231쪽)라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또 미래의 불안이나 과도한 기대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지금, 현재’의 자기자신을 충실하게 살고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에게 계몽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찰나(刹那)에 영겁(永劫)을 살아라.’ ‘발밑을 파라, 거기에 샘이 있다.’는 응결된 삶의 자세를 제시해야 합니다.
석존은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보탑’을 빛내고, 거기에서 인류의 미래를 비추는 ‘진실한 진보(進步)’를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혼의 거인인 대승리자의 말입니다.
둘째 메시지는 ‘민중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입니다만, 불법(佛法)에서는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보다도 ‘수연진여(隨緣眞如)의 지(智)’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즉 시대나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기본으로 하여,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현실에 응하여 자유자재로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막힘 없는 지혜의 원천은, ‘민중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석존의 자세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물으시오.” — 석존은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석존은 소크라테스와 견줄 만한 대화의 명인(名人)이며, 민중과 나누는 대화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인도했습니다. 석존은 유례없는 ‘인간교육의 대가(大家)’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비탄에 빠진 어머니에게, 석존은 그 아이를 구제할 ‘약’으로 겨자씨를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단 그 씨는 아직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받아오라고 지시합니다. 그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한집 한집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차츰 어머니는 자신만이 아니라 어느 집이나 가족을 잃은 고통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비애(悲哀)를 극복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근본과제를 탐구하는 데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석존이 민중의 마음을 얼마나 응시하고 사람들의 경애를 향상시키고자, 자비와 지혜를 얼마나 쏟았는지 많은 설화를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지경자(持經者)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민중의 소리를 들어주는 덕성(德性)을 꼽습니다.
“저 사람은 무수한 사람의 소리를 듣고 잘 이해하며, 천(天)의 소리, 묘(妙)한 노랫소리를 듣고, 남녀의 소리, 어린아이들의 소리를 듣는다. 산이나 강, 험한 계곡의 새소리까지도 듣는다. 지옥의 모든 고통소리, 배고픈 사람들이 음식을 갈구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보살이나 부처의 소리를 듣는다. 아래로는 아비지옥(阿鼻地獄)에서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성을 듣는데도 이근(耳根)은 부숴지는 일이 없다.”(‘법사공덕품’, 취의)
이것을 저는 단순히 종교적 실천의 지표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교육의 만반에 걸친 대지도자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창가(創價: 가치창조)교육학’의 창시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국군주의와 싸우다 일흔셋에 옥사했습니다. 그 이름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라고 하며 창가학회의 초대 회장이었습니다.
마키구치 회장은 초등학교 교장이었는데, 상대가 천진난만한 초등학생이든 가혹하게 취조하는 검사나 간수든,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며 항상 ‘대화’를 관철했습니다. ‘생애교육’과 ‘환경교육’을 제창했고, 또 ‘어머니들의 소리’를 반영한 학교교육 등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선구적인 지혜도 ‘민중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철저한 ‘대화’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좋습니다.
셋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지혜’의 메시지는 ‘지혜는 능히 지식을 살린다’는 가치창조의 길입니다.
귀 대학에서 최첨단 학문을 배워 익힌 여러분의 모습에서 저는 카필라바스투성(城)에서 배우고 또 배운 석존의 청춘을 떠올립니다.
젊은 왕자 석존은 천문학, 의학, 법률학, 재정학(財政學), 문학, 예술 등 모든 학문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타인을 괴롭히는 주술(呪術)을 배울 것이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을 배워라.” — 이것이 석가족의 제왕학(帝王學)이었습니다.
제가 감탄하는 것은, 사람들의 고뇌를 구제하는 석존의 일생에서 청춘시절에 배운 학문을 남김없이 활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은 왕에게도 농민에게도, 당시 발흥(勃興)한 상인층에게도 ‘수의설법(隨宜說法: 기근에 따라 법을 설한다)’ ‘응병여약(應病與藥: 병에 따라 약을 준다)’처럼 각각에 맞는 비유(譬喩)나 도리(道理)를 구사하면서 법을 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핵’과 ‘유전자’로 상징되는 현대과학지식의 발전은, 그것을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의 에고를 위해 사용하는지를 지금 엄하게 추궁 받고 있습니다.
아직 핵억지론(核抑止論)이라는 스스로 만든 ‘공포의 균형’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는, 유감스럽게도 에고를 극복하지 못한 채 폭력과 무력 등에 굴복하는 가련하고 슬픈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석존의 유계(遺誡)에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어서 1025쪽)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번뇌(폭력성이나 탐욕성)에 좌우되거나 지배되지 않고, 또 그것을 무리하게 소멸시키지도 않는다. 스스로 ‘마음의 스승’이 되어 번뇌마저도 가치를 창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마음의 스승’이 되는 것이 인간생명의 깊은 곳 안에서 훈발(薰發)하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인간을 위해 민중을 위해라는 ‘자비’의 샘이 있어야 비로소 한없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석존의 인격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은 ‘자비의 대해’입니다.
자비의 첫 번째 메시지는 ‘인류의 우주적 사명은 자비에 있다.’는 사명론(使命論)입니다. 석존에게는 그야말로 ‘우주는 자비의 당체(當體)’이고, 스스로의 행동은 그 자비의 체현(體現)이었습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일체가 ‘연기(緣起)’, 즉 연에 의해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기 때문에 무엇 하나 헛된 것이 없다, 또 의미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주는 상호의존의 ‘실[絲]’을 활용하여 생명을 육성하고, 이 지구상에 인류도 탄생시켰습니다.
불법(佛法)에서는 현대천문학의 지견(知見)과도 일치하여 이 대우주에는 다른 천체에도 지적(知的) 생명이 활약하고 있다고 논합니다. 우주가 바로 창조적 생명체이고, 존귀한 자비의 현재화(顯在化)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석존이 태어난 고향인 귀국(貴國)을 목표로 했다고도 추찰(推察)되는 ‘마지막 여행’ 도중 방문한 마을에서, 무성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거듭 “즐겁다, 즐겁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고 감개에 잠겼다고 합니다.
평생 광대한 대지를 걷고 또 걸으며, 민중구제의 평화여행을 관철한 석존의 자비가 우주생명의 영원한 자비의 율동과 공명(共鳴)하는 모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근대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사는 의미의 상실’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사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은 ‘의미에 대한 갈망’에 몸을 불태우면서 사회에서, 자연이나 우주에서 고립되어 항상 소외감 속을 헤맸습니다.
불법의 자비론은, 이 지구상에 탄생한 인류의 사명은 우주가 영위하는 자비에 동참하여, 그 창조적 다이너미즘을 드높이며 끝까지 살아가는 데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
즉 만물을 육성하고 번영과 행복으로 이끄는 자비로운 행동은 우주가 인류에게 의탁한 사명이며, 이 사명을 자각하고 달성하는 데 ‘사는 의미’가 있다고 석존은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자비론은 오늘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존중하는 ‘공생(共生)의 문화’를 양성하고, 지구환경과 공영(共榮)하는 ‘자연관’을 배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분단’에서 ‘결합’으로, ‘대립’에서 ‘융화’로, 그리고 ‘전쟁’에서 ‘평화’로, 인류사의 궤도를 수정하는 보살도(菩薩道)의 행동을 촉구해 마지않습니다.
석존의 자비가 보내는 둘째 메시지는 ‘히말라야와 같이 유연(悠然)히’입니다.
즉 ‘부동(不動)의 자기(自己)’를 확립하는 것이 대자비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을 윤택하게 하는 석존의 자비로운 대경애는 폭풍우가 있든 무엇이 있든 엄연히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고향 ‘히말라야’의 수봉(秀峰)을 방불케 합니다.
“선한 사람은 설산(雪山: 히말라야)처럼 먼 곳에서도 빛난다. 그러나 악한 자는 여기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밤에 쏜 많은 화살처럼”이라고 말했듯이, 석존이 지향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흰 눈을 이고 언제나 우뚝 솟아 있는 히말라야의 의연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 이미지화되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많은 지성인이 지적하듯이 자유나 평등을 주장하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사회는 변화무쌍한 상태에 놓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부동(不動)의 자기’를 확립하지 않으면 타인과의 비교에만 정신을 빼앗겨, 자신도 모르게 질투와 원질(怨嫉) 같은 정념(情念)에 지배당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연(緣)에 분동되지 않는 ‘부동의 자기’는 어느 시대에나 사회를 안온(安穩)케 하는 원점입니다.
현대만큼 그 원점을 필요로 하는 때는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의처(依處)로 삼고, 법(法)을 의처로 삼아야 한다.”는, 제자에게 준 석존의 유훈(遺訓)은 그대로 우주 구극의 법과 일체화(一體化)된 ‘부동의 자기(=대아大我)’로 이끄는, 인류에게 주는 유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끝으로 셋째 자비의 메시지는 ‘자타 모두의 행복을 지향하라’는 행동론(行動論)입니다.
근대인권사상이 쟁취한 최대의 유산이 ‘개(個)’의 존엄임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적인 보장만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인은 자신의 주장에만 전념한 나머지 타인의 존재를 잃고 그 결과 자기자신이 의지하여 일어서야 할 가장 중요한 그 기반까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석존은 타인과 자신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사람은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렇다면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애(自愛)를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
인간에게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지에 견주어’ ‘타인’을 소중히 해야 한다 — 실로 무리 없는 자연스런 말씨로 서로 ‘타인’의 존재, 상대의 처지에 서서 공감하는 것이 자비의 첫걸음이라고 석존은 설했습니다. 고독한 현대인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양약(良藥)’은 여기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석존은 성도(成道)하고 나서 그 법을 사람들에게 설할 것인지 설하지 말 것인지 크게 주저하며 갈등했습니다. “설하면 반드시 몰이해한 비판이나 박해가 소용돌이칠 것이다. 굳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나 혼자서 조용히 법열(法悅)을 맛보아도 좋지 않을까….”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불교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렇게 망설이는 석존 앞에 범천(梵天: 브라마)이 나타나 ‘전진인가 후퇴인가’ ‘행복인가 불행인가’ ‘영광인가 비참인가’, 그런 분기점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발 가르침을 설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이 ‘범천의 권청(勸請)’이 석존의 ‘자기(自己)’ 속에 ‘타인(他人)’을 부활시켜, 자타 모두의 무너지지 않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참된 ‘부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일체중생이 고뇌하는 까닭에 나 또한 고뇌한다.’
석존의 마음속에는 항상 생로병사의 고뇌에 울부짖는 민중의 신음소리가 울려왔습니다. 때[時]를 초월하고 나라[國]를 초월하여 석존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타인’을 부활시켜, 자타 모두의 행복을 만끽하라.”
13세기 일본의 니치렌(日蓮)도 ‘법화경’을 해석하며 “자타 공(共)히 지혜와 자비가 있음을 희(喜)라고 한다.”(‘어의구전’, 어서 761쪽) — 자타가 모두 지혜와 자비를 갖고 있는 것이 참된 ‘환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것은 ‘제3세대의 인권’ 즉 ‘평화로운 국제질서’와 ‘건전한 지구환경’을 창출하는 ‘연대권(連帶權)’과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간주의의 연대만이 각각의 나라에 개성 풍부한 번영을 구축하면서 인류 전체의 영광을 여는 광원(光源)이 될 것입니다.
저는 사명 깊은 여러분이, 대붕(大鵬)과 같이 지혜와 자비의 날개를 펼쳐 ‘평화와 생명존엄의 21세기’를 향해 비상(飛翔)하기를 염원하며, 그렇게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앞날이 ‘희망’과 ‘건강’과 ‘행복’에 감싸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귀국의 시인, 기미레의 웅혼(雄渾)한 ‘청년이여’의 한 구절을 말씀드리며 저의 축복의 스피치를 마치겠습니다.
여명의 빛이 눈 덮인 산봉우리를 비추고
청신(淸新)한 활력이
영웅의 팔에 용솟음친다
오오 청년이여
그 아침 햇빛의 화살을 끌어당겨라
그대가 만짐으로써
새로운 파도를 일으켜라
그리고 그대의 손가락으로
세계를 각성시켜라
새로이 약동하는 세계로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냐바도(감사합니다).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