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참으로 빛나는 전통과 걸출한 업적을 자랑하는 이곳 동서(東西)센터에서 강연할 기회를 받은 것은 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영광입니다.
애써주신 옥센버그 이사장 및 마쓰나가평화 연구소의 구안슨 소장을 비롯해 관계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번의 한신(阪神)대지진에 대해 여러 선생님에게서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감사드립니다.
만인(萬人)을 매료시키는 이곳 하와이 천지에는 ‘인간’과 ‘자연’의 포옹이 있고, ‘동’과 ‘서’의 악수가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의 조화가 있고, ‘전통’과 ‘근대성(近代性)’의 융합이 있습니다.
저는 하와이가 ‘평화’와 ‘인간’이라는 인류의 근본과제를 탐구하는 데 더없이 좋은 무대라고 믿습니다.
저 자신도 세계로 향한 여행을 하와이에서 개시했습니다. 1960년 — 기이하게도 귀 센터가 창설된 그해의 일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전쟁 개전(開戰)의 비극이 새겨진 이 하와이에서 인류평화의 아침해를 빛내고 싶다 — 이것이 청춘시절부터 제가 품어온 숙원(宿願)입니다.
돌이켜 조망(眺望)해보면 20세기는 한마디로 말해 인간이 인간을 너무나 많이 죽인 시대였습니다.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일컫듯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연이은 혁명 등, 금세기는 전에 없던 피투성이의 격동이 연속한 때였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무기의 살상력을 비약적으로 높인 점도 있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사상자가 약 1억명에 이르고, 그 후 냉전 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역분쟁 등에 따른 희생자도 20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아울러 ‘남’과 ‘북’의 빈부차가 계속 벌어져 약 8억이나 되는 사람이 굶주리고, 존귀한 어린 생명 수만 명이 매일매일 영양실조나 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적 폭력에서 결코 눈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많은 지성인이 염려하듯이, 동서를 불문하고 만연하는 ‘정신의 기아(饑餓)’는 물질적인 번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으로 20세기 인류가 얻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 세기말을 맞이하여 더한층 혼미해지고 있는 현 상태에 누구나 통한(痛恨)의 정을 억누를 수 없을 것입니다.
저의 가슴에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진수인 ‘법화경’ 한 구절이 다가옵니다.
“삼계(三界)가 불안함이 불난 집과 같아서 중고(衆苦)가 가득하니 매우 두려워할지어다.”(법화경병개결 191쪽) — 이 현실세계는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치 불타고 있는 집과 같다. 온갖 고(苦)가 가득하니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
고뇌와 공포의 불길에 휩싸인 민중에 대한 한없는 동고(同苦)입니다.
이 비참한 현실의 모습을 직시하며 ‘법화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마땅히 그 고난을 뽑아버리고, 무량무변한 부처의 지혜의 즐거움을 주어, 그들을 즐겁게 하리라.”(법화경병개결 173쪽)
— 마땅히 사람들의 고통을 빼내고 무량무변한 ‘부처의 지혜’의 즐거움을 주어 유희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
여기에 불법(佛法)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현실사회의 한가운데에 안온한 낙토(樂土)를 단호히 구축하려고 하는, 역동적인 행동으로 맥동친 것입니다.
그 기축은 어디까지나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변혁함으로써 ‘생활’과 ‘인생’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저의 은사(恩師) 도다 조세이 창가학회 제2대 회장은 이것을 ‘인간혁명(人間革命)’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생각하면 19세기의 진보주의 사상에 심취한 인류는 사회와 국가의 외적 조건을 갖추는 데에만 광분하여 그것이 곧 행복해지는 직도(直道)라는 착각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 그 자신의 변혁이라는 근본의 일점을 피해버리면, 모처럼 평화와 행복을 위해 노력해도 오히려 역효과가 되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여기에 20세기 최대의 교훈이 있지 않을까요.
제가 뜻을 굳게 한 것은, 안전보장문제의 권위자이기도 한 옥센버그 이사장도 저와 같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가을, 도쿄에서 만났을 때 이사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정신이 공동화(空洞化)되면 사람들은 ‘불안’해집니다.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안심’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국민에게 참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 참된 안전보장은 국가뿐만 아니라 문화 그리고 개인까지 그 시야에 넣어야 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나 악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내면세계, 즉 부동(不動)의 ‘자기자신’을 구축한다, 그 내적인 생명의 변혁 — 즉 ‘인간혁명’에서부터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것이 곧 ‘항구평화’의 길을 열고, ‘인간을 위한 안전보장’을 가능케 하는 왕도(王道)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서서 저는 21세기를 향해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발상의 전환점을, 첫째 ‘지식에서 지혜로’, 둘째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그리고 셋째 ‘국가주권에서 인간주권으로’라는 세 가지로 제안합니다.
첫째 ‘지식에서 지혜로’라는 명제입니다
저의 은사 도다 회장은 “지식을 지혜라고 착각하는 것이 현대인의 최대의 미망(迷妄)이다.”라고 예리하게 간파하셨습니다. 현대인의 지식량·정보량은 50년 전, 100년 전에 비해 확실히 비약적으로 증대하였지만, 그것이 그대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지혜로 연결된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상당한 불균형이 오히려 불행을 불러오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은 근대과학의 정수가 핵무기로 이어진 것이나, 앞서 말씀드린 ‘남북격차’의 폭 등에 여실히 나타납니다. 일찍이 없던 고도 정보화사회를 맞이한 지금, 방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올바르게 사용할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 더욱더 중대한 관점이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발달한 통신기술을 민중의 ‘공포’와 ‘증오’를 부추기는 데 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교육 기회를 세계로 넓히는 데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와 ‘자애’의 깊이입니다.
불법은 일관해서 인간생명의 자비에 근거를 둔 지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신봉하는 불법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를 배운다고 할지라도 심성(心性)을 관(觀)하지 않는다면 결코 생사(生死)를 출리(出離)할 수 없느니라. 만약 심외(心外)에 도(道)를 구하여 만행만선(萬行萬善)을 수행(修行)함은 비유컨대 빈궁한 사람이 일야(日夜)로 이웃의 재보(財寶)를 셀지라도 반전(半錢)의 득분(得分)도 없는 것과 같도다.”(‘일생성불초’, 어서 383쪽)
— 불교를 배웠다고 해도 자기자신의 마음의 본성(불성佛性)을 내관(內觀)하지 않으면 절대로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여 만행만선을 수행했다고 해도, 그것은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이 밤낮으로 이웃 사람의 재산을 헤아린다 해도 반전의 이익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불교를 비롯해 모든 동양적 사고의 특징은 일체의 지적(知的) 영위가 ‘자기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주체적인 물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개되는 점에 있습니다.
이 구절도 그 점을 상징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 물 등의 자원을 둘러싼 지역분쟁이 우려되는데, 그와 관련하여 제가 떠올리는 것은 석존이 고향에서 물싸움이 일어났을 때 보여준 지혜입니다.
— 석존이 포교를 위해 고향 일대를 편력(遍歷)하던 때의 일입니다. 가뭄 때문에 두 부족 사이를 흐르는 강물이 줄어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서로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고 무기를 손에 들고 유혈(流血)도 불사하는 사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석존이 스스로 헤치고 들어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죽이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아라. 무기를 들고 치려고 하는 행동에서 공포가 생긴다.”
무기를 가졌기 때문에 공포가 생긴다. — 이 명쾌한 한마디에 모두의 눈을 뜨게 하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기를 버리고 적군 아군 모두 함께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석존은 눈앞의 ‘다툼’보다도 더욱 근원적 공포인 ‘생사(生死)’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최대의 위협을 어떻게 타개하고 인생을 안온하게 살아갈까 —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석존은 호소했다고 합니다.
현대의 복잡한 갈등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소박한 에피소드일는지 모릅니다.
구 유고슬라비아를 둘러싼 분쟁도 그 근원을 더듬어보면 2000년 가까이나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동안 동서 그리스도교회의 분열이 있고, 오스만투르크의 정복이 있고, 금세기에는 파시즘이나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유린(蹂躪)이 있어서, 민족이나 종교에 얽힌 적의(敵意)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뿌리 깊고 어마어마합니다.
그 경위를 조금만 더듬어보면, 각각의 세력이 역사적인 견지에서 서로 차이를 강조하며 자기의 정당성만 주장한다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석존의 용기 있는 대화가 모범을 보여주듯이, 인간을 분열시킬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공통의 지평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혜, 즉 과감한 정신의 도약이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그를 위한 무한한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불전(佛典)에는 평화에 대한 영지(英智)의 말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예를 들면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평화나 안전의 위기와 인간생명의 내적인 요인의 연관에 대해 이렇게 통찰하셨습니다.
“삼독(三毒)이 강성한 일국(一國)이 어찌하여 안온하겠느뇨. (중략) 기갈(飢渴)은 대탐(大貪)에서 일어나고, 역병(疫病)은 우치(愚痴)에서 일어나고, 합전(合戰)은 진에(瞋恚)에서 일어남이라.”(‘소야전답서’, 어서 1064쪽)
—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생명의 독이 강성한 나라가 어떻게 안온할 수 있겠는가. … 기근은 심한 탐욕에서 일어나고, 역병은 어리석음에서 생기며, 전쟁은 분노에서 일어난다. —
욕망이나 증오에 사로잡힌 개인적 자아(自我)인 ‘소아(小我)’를 타파하고, 민족의 마음의 심층마저 초월해 우주적·보편적 자아인 ‘대아(大我)’로 생명을 열고 가득 채운다 — 그 원천이 바로 불법이 밝힌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발밑을 파라! 거기에 샘이 있다.”고 하듯이, 자기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열리는 ‘소우주’에 엄연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인간을 위해, 사회를 위해, 미래를 위해, 철저히 용맹스럽고 자비롭게 행동을 하는 가운데 한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 ‘보살도’를 통해 훈발되는 지혜로 에고이즘의 쇠사슬을 끊어버린다. — 그때 모든 지식도 또한 지구의 인류에게 영광스러운 방향으로 생기 있고 균형 있게 회전을 시작하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라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저는 ‘유엔 관용의 해’ 개막에 즈음하여, 다양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지개의 섬’ 하와이에서 이 테마에 대해 언급하는 의의를 깊이 음미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의 조화와 융합’이라는, 앞으로 인류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앞장서서 최선단에서 도전하는 사람이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존귀한 도전은 마치 용암으로 뒤덮인 불모(不毛)의 대지에 맨 먼저 뿌리를 내리고 진홍빛 꽃을 피우는 저 ‘오히아나무’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근대문명은 부(富)의 축적만을 목표로 하는 경제성장노선으로 상징되듯이, 인간이나 자연의 다양한 개성을 잘라버리고 오로지 일원화(一元化)·일양화(一樣化)된 획일적인 목표를 계속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돌진한 결과 만난 것이 환경파괴를 비롯한 심각한 ‘지구적 문제들’입니다.
미래의 세대와 연대를 맺은 ‘지속가능한 인간개발’이 필수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반성의 눈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다양화, 다양한 개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재검토하려는 경향은, 말하자면 당연한 추이(推移)가 아닐까요.
환경운동의 선구자인 해양생물학자 카슨 여사의 탁견(卓見)을 지금 여기에서 상기하는 것은 저 한 사람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여사는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63년,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언이 된 말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연과 화합해야 한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데에 숙달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제어하는 데 숙달될 것을 오늘날만큼 강하게 요구 받은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년 들어 환태평양에 스포트라이트가 자주 비추어지고 있는 까닭은 다채로운 민족, 문화, 언어로 가득 찬 이 지역이 곧 인류융합을 위한 장대한 ‘실험의 바다’로 기대를 모으기 때문입니다.
그중심에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이질적인 가치관을 서로 인정하면서 공생(共生)의 길을 모색해온 하와이 천지는, 틀림없이 환태평양문명의 귀중한 선례(先例)로서 더욱더 그 광채를 발할 것입니다.
저는 다양성이라는 점에서도 불교의 예지(叡智)는 많은 시사(示唆)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불교가 말하는 보편적 가치는 철저히 내재적(內在的)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획일화하고 일원화하려고 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불전(佛典)에 “앵매도리(櫻梅桃李)의 각기(各其)의 당체(當體)를 고치지 아니하고”(‘어의구전’, 어서 784쪽)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전부 벚꽃이 되거나, 혹은 매화가 될 필요는 없다. 될 리도 없다. 벚꽃은 벚꽃, 매화는 매화, 복숭아꽃은 복숭아꽃, 자두꽃은 자두꽃으로서 각각 개성 풍부하게 빛나면 된다. 그것이 가장 올바르다는 뜻입니다.
원래 ‘앵매도리’는 비유로 쓴 말이지만, 그것이 인간이든 사회든 초목국토(草木國土)든,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원리는 같습니다.
‘자체현조(自體顯照)’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본연의 개성을 내부에서부터 최고로 꽃피워간다. 그 개성은 쓸데없이 다른 개성과 부딪친다거나,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소중히 하면서 화원(花園)과 같이 조화를 이룬다. 거기에 불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불전에는 “거울을 보고 예배(禮拜)할 때 떠오른 그림자 또한 나를 예배하느니라.”(‘어의구전’, 어서 769쪽) — 거울을 향해 예배하면 비치는 모습도 또한 나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다. — 라는 아름다운 비유가 있습니다.
불교의 정수(精髓)라고 할 만한 만유(萬有)를 관철하는 ‘인과율(因果律)’ 위에서 타인의 생명에 대한 존경이 그대로 거울처럼 자신의 생명을 장엄하게 한다는 도리를 제시한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이나 자연의 만상(萬象)은 연(緣)에 의해 생기(生起)하는 상호관계성 속에서 서로의 특질을 존중하고 살리면서 존재해야 함을 촉구하는 사상이 불교의 연기관(緣起觀)입니다.
그 관계성은 틀림없이, 만물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우주생명의 직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삼라만상의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조화를 절대로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며 일체의 폭력을 부정합니다.
그 점에서 귀 하와이대학교의 앤서니 마셀라 교수가 한 말은 이 연기관의 본질을 시적(詩的)으로 훌륭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생명력은 ‘우주를 움직이고 컨트롤하는 힘과 같은 것’이라는 자명(自明)한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불가사의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때까지 없던 확신으로 생명을 새로운 외경심(畏敬心)으로 대한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크나큰 생명의 일부이다!”
‘생명’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차원에 대한 깊은 안목은, 그대로 ‘생명’의 무량한 다양성에 대한 ‘공감’이 되어 넓혀집니다.
이러한 ‘열린 공감’을 키움으로써 다양성은 창조력의 촉발로 활용되고 ‘공영(共榮)’하는 시대, ‘공존(共存)’하는 문명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세계에 ‘문화교류’를 맺고 있는 것도 이 신념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셋째, ‘국가주권에서 인간주권으로’라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20세기 들어 연이은 쟁란(爭亂)에서 주역은 무엇보다도 주권국가입니다. 국권(國權)이 발동되어 일어난 근대전쟁은, 유무(有無)를 불문(不問)하고 모든 국민을 커다란 비극으로 휩쓸어 넣었습니다.
두 번의 대전(大戰) 후 괴로움을 경험 삼아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을 결성한 까닭도 일면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상대화(相對化)할 수 있는 상위(上位)시스템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의욕적인 시도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난제(難題)를 안고, 올해 국제연합은 만 50세를 맞이합니다.
‘인류의 의회’이어야 할 유엔은 어디까지나 대화에 의한 ‘합의’와 ‘이해(理解)’를 기조로 한 소프트 파워를 축으로 하여, 종래의 군사중심 ‘안전보장’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면서 기능강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를 들면 ‘환경·개발안전보장이사회’ 신설 등 새로운 활력으로, ‘인간을 위한 안전보장’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때 특히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은, 유엔헌장이 ‘우리 인민(人民)은’이라고 강조했듯이 ‘국가주권(國家主權)에서 인간주권(人間主權)으로’ 좌표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인류익(人類益: 인류 전체의 이익)’이라는 폭넓은 시야를 가진 세계시민을 육성하고 그 연대를 넓힐 민중의 교육운동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의의 깊은 유엔 창설 50주년을 맞은 가절에 즈음해 우리도 NGO(비정부기구)로서, 청년을 중심으로 더욱 힘차게 세계적으로 의식계발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이 ‘국가에서 인간으로’라는 전환을 불법자(佛法者)의 처지에서 말하면, 한 인간으로서 거대한 권력에도 의연히 대처하며 권력과 현명하게 상대화할 수 있는 인격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 — 하는 주제입니다.
20여년 전,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 박사는 저와 대담하면서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은 인간집단의 힘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종교이다.”라고 위치를 부여하였습니다.
이것은 국가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지역분쟁을 격화시키고 있는 ‘자민족중심주의(自民族中心主義)’에도 해당할 것입니다.
토인비 박사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러한 광신적 내셔널리즘 같은 모든 악과 대결하여 극복할 힘을 미래의 세계종교에 요망하였습니다.
특히 박사가 ‘보편적인 생명의 법체계’를 설한 불법에 보내신 깊은 기대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불교의 전통은 인간의 내적인 ‘진리의 법’에 서서 권력을 초월해 그것과 상대하는 참으로 풍부한 수맥(水脈)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석존(釋尊)은 세라라는 바라문이 “왕 중의 왕으로서, 인류의 제왕으로서 통치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을 때, “세라여. 나는 왕이지만, 무상(無上)의 진리의 왕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패권주의의 대국 마가다국이 공화국을 형성하고 있던 브리지족(族)을 치려고 했을 때, 석존이 그 전쟁을 단념케 한 유명한 드라마도 정말로 인상적입니다. 마가다국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국이었습니다.
거만하게 침략 의향을 전하러 온 마가다국의 사신을 앞에 두고, 석존은 옆에 있는 문하에게 브리지족에 대해 일곱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말씀드리면
— 이와 같은 일곱 가지 포인트입니다.
답은 어느 것이나 ‘예스!’였습니다. 그 답을 근거로 석존은 “이 일곱 가지를 지키고 있다면, 브리지족은 번영이 있을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정복이 불가능함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이것이 석존이 최후의 여행에서 설한 ‘칠불퇴법(七不退法)’ 즉 공동체가 쇠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원칙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안전보장’의 구체적인 지표로서, ‘군비(軍備)’가 아니라 ‘민주’나 ‘인권’이나 ‘사회개발’ 같은 관점을 제창한 점이 괄목할 만합니다.
세속의 권력을 앞에 두고 ‘무상(無上)의 진리의 왕’ 석존의 위풍과 위광을 전하고, 면모를 생생하게 나타낸 에피소드입니다.
니치렌 대성인도 1260년, ‘민중의 한탄을 모르는’ 최고권력자에게 유명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보내 열렬히 간효(諫曉)했습니다.
그로부터 목숨에 미치는 박해를 계속 받으면서 ―
“왕지(王地)에 출생하였으므로 몸은 따르고 있는 듯하지만 마음까지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니라.”(‘선시초’, 어서 287쪽)
— 왕이 지배하는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몸은 권력자에 따르는 듯해도 마음은 절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
“원컨대 나를 해치는 국주(國主) 등을 최초로 이를 인도(引導)하리라.”(‘현불미래기’, 어서 509쪽)
— 원컨대 나를 박해한 국주 등을 가장 먼저 이끌어주자. —
“난(難)이 옴을 가지고 안락(安樂)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어의구전’, 어서 750쪽)
— 난이 온 것을 가지고 안락이라고 알아야 한다. —
이와 같이 주옥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덧없는 무상(無常)한 권력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생명의 ‘영원한 법리(法理)’에 뿌리내린 비폭력의 인간주의를 관철하신 모습입니다.
이러한 대투쟁 속에 그 무엇에도 침범 당하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와 같은 ‘안락(安樂)’의 경애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참으로 우뚝 솟은 인간 존엄성에서 나온 더없이 중요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신세기의 지구문명을 짊어질 세계시민의 마음에 깊고 강하게 혼의 공명(共鳴)을 연주할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 발상의 전환에 대해 저 나름대로 고찰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들이 귀결하는 바는 생명의 내적인 변혁 즉 ‘지혜’와 ‘자비’와 ‘용기’를 갖춘 ‘대아(大我)’를 여는 ‘인간혁명’입니다.
이 한 인간의 본원적(本源的)인 혁명이 현명한 민중의 스크럼이 되어 연동(連動)할 때, 그 조류(潮流)는 ‘전란’과 ‘폭력’ 같은 숙명적인 유전(流轉)에서 반드시 인류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창가교육학회 창립자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초대 회장은 군부권력과 의연히 싸우고 옥중에서도 신념의 대화를 계속하여 판사나 간수마저도 불법(佛法)으로 인도하면서 일흔셋에 옥사했습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저는 35년 전, 이곳 하와이에서 세계민중과 대화를 개시했습니다.
앞으로도 목숨이 있는 한, ‘희망과 안온의 21세기’를 창조하기 위해, 여러 선생님과 함께 위대한 평화를 실현할 지혜를 용현(涌現)하여 결집해갈 결심입니다.
끝으로 이 테마를 평생 추구한 위대한 선각자이자 경애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덧붙이며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설령 혼자 될지라도 전 세계에 맞서라!
세계가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아도 그대는 정면에서 세계를 응시하라.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대의 마음에 울리는 작은 소리를 믿어라!”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하로(감사합니다).
생큐 베리 머치.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