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여러 선생님과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오늘은 19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그리운 문화궁전에서 다시 강연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최대의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브니치 총장을 비롯해 관계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젊은 학생 여러분과 대화할 수 있게 되어 저는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올해 1월, 모스크바 시민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대화할 때, 귀 대학의 학생이 시원시원하게 발언하는 모습이 일본에서도 방영되었습니다.
외국어학부의 여학생이 유창한 영어로 “우리나라에는 커다란 정신의 힘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모든 의미에서 세계문화의 중심이 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춘의 진지한 정열이 빛나는 그야말로 싱그러운 광경이었습니다.
귀 대학의 위대한 창립자 로모노소프는 서거 직전에 드높이 노래했습니다.
아름답고 광대한 우리 대지에
비운(悲運)이 덮치는 그 시대에야말로
나의 발자취를 남긴 이 길을 계속 가는
영지(英智)의 청년을, 아들들을 러시아는 낳을 것이다.
건학(建學) 이래 240성상(星霜). 귀 대학은 이 창립자의 혼의 외침에 엄연히 응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숭고한 교육의 로망입니까.
“미래의 과(果)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인(因)을 보라.”(‘개목초’, 어서 231쪽) 불전(佛典)에 설해진 한 구절입니다.
여러분 청년이야말로 귀국, 그리고 세계의 ‘무한한 희망’임을 저는 깊이 강하게 확신합니다.
생각하면 1974년, 처음 귀 대학의 초청을 받고 귀국으로 출발하려고 했을 때, 저는 많은 일본인에게 힐문 당했습니다. “불법자(佛法者)인 당신이 종교를 적(敵)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의 나라에 왜 가는가.” 이 말에 저는 한마디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있으므로 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흘러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사회에서 더욱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예를 들면 현대 러시아의 문호 솔제니친 씨의 다음과 같은 제언은 그 증거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인간이 훌륭하면 어떠한 국가체제라도 좋은 것이 되고, 인간이 악의에 가득 차서 서로 배반하는 사이라면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체제에서도 견디지 못한다. 만약 인간에 정의와 성실이 결여되어 있으면 어떠한 국가체제가 된다 해도 반드시 그것이 표면화될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 귀착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톨스토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개탄했듯이, 예로부터 ‘인간’에 대해 많이 고찰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마음’이라는 문제, 또 ‘행복’에 관해서는 과학이나 경제의 척도만으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과제입니다.
또한 정신적 유산이 많아도 현실사회에서 활용되고 있는가 하면, 세기말의 암운(暗雲)이 드리워진 요즈음은 어쩐지 매우 불안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인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면 매우 선명하고 강한 광원(光源)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입니다. 저 나름대로 그 문제의식에 기대서 ‘인간 ― 거대한 코스모스’라는 제목으로 약간의 고찰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박수)
“자신의 생명에 살아라!” — 저의 은사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창가학회 제2대 회장은 청년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2년에 걸친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평화에의 신념을 관철한 은사는, 모든 가치관이 붕괴되고 전도(顚倒)된 전후(戰後)의 황야에서 ‘생명’이라는 원점으로 돌아가 나 자신의 ‘인간혁명’에서부터 출발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것은 또 석존(釋尊)이 남긴 “자기만이 자신의 주인이다. 타인이 어떻게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자기를 잘 조절한다면 얻기 어려운 주인을 얻는다.”고 한 메시지의 재생(再生)이기도 했습니다.
조금 비약합니다만, 저는 귀국의 문학자 메레시콥스키가 내건 “인간은 자신의 주인이 돼라.”고 한 명제(命題)를 상기합니다. 이것은 그가 쓴 《표트르 대제전大帝傳》의 첫머리에 세 번 되풀이한 유명한 말입니다.
대제(大帝)의 강력한 개혁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서구파(西歐派)와 슬라브파가 끊임없이 경합(競合)한 경위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 근대사를 뒤흔든 최대의 난문(難問)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대제가 ‘반(反)그리스도교’를 생각하게 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또한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저는 귀국의 정신사에 장대한 수맥(水脈)으로 일관해서 흐르는 것이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영원한 물음이 아니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근대 러시아에서 인류사상 전에 없을 만큼 정열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점거하고 불태워온 주제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면에서 말하면 표트르 대제 자신이 그 물음에 생애를 걸고 해답을 내려고 모색한 거인(巨人)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푸시킨이 “오오 운명의 위력 있는 지배자여!”라고 부르고, 게르첸이 “러시아에서 최초의 해방된 개성(個性)”이라고 평했듯이, 그는 단순한 개혁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운명과 러시아의 운명을 마치 아틀라스(그리스신화의 ‘하늘을 떠받친 거인’)와 같이 양 어깨에 계속 짊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러시아에 한정된 것만이 아닙니다. 서구 근대문명의 불문곡절(不問曲折)한 공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다른 문명에도 공통의 과제였습니다.
그것은 당장에는 군사기술이나 경제면에서 개혁을 앞세우면서, 머지않아 문화면에 미치고, 자기 문명의 주체성마저 위협받아 자아(自我)의 부유화(浮遊化)를 불러오고 말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근대의 대표적 문학자 나쓰메 소세키는 젊은 날의 자신을 ‘자루 속에 담겨져 나올 수 없는 사람’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1세기를 거쳐 일본은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변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이 행복한지 어떤지, 과연 현상에 만족하는지 어떤지는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문제가 없는 상태가 과연 행복하느냐 하면 그것도 환상입니다. 그러한 행복은 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일본의 많은 청년은 국가적 목표는 갖지 않고 집단 등에 대한 귀속(歸屬)의식도 희박한 듯합니다.
확실히 전에 없던 자유가 있습니다만, 그 한편에서 명확한 목표도 없이 마음에 무엇인가 몽롱한 카오스를 안고 있는 청년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항상 연속되는 번민이 인간의 업(業)인지도 모릅니다. 또 찰나주의나 향락주의에 빠진 청년도 있습니다.
최근 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제적인 비교조사에서도 장래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지금만 즐거우면 그것으로 좋다’는 경향이 일본에서는 특히 강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시적인 경제번영과는 정반대로 정신문화가 현저하게 정체(停滯)해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와 반대로 세계의 새로운 평화질서를 지향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사명감과 국가관을 가지려 하는 청년도 있습니다. 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청년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선(善)의 방향’ ‘건설의 방향’ ‘창조의 방향’을 발견해야 할 ‘철학’ 또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희구(希求)가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
이 테마에 대한 확고한 회답을 탐구하면서 제가 떠올리는 것은, 귀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대철학자 베르댜예프의 명저(名著) 《나의 생애》에 나온 성실한 회상(回想)입니다.
“나는 내 인격의 고립화를, 자기 내부에 틀어박힐 것을, 자기주장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자기자신을 우주 속으로 열고 나가기를, 우주의 내실에 충만하기를, 일체와 교류하기를 추구했다. 나는 소우주(마이크로 코스모스)이고 싶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됨으로써 직접 만들 수 있는 생(生)의 충족감, 또 우주를 호흡하는 생명공간의 무한한 확대감 등, 말하자면 거대한 코스모스 감각이 틀림없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 광채는 세기말의 어둠을 비추는 광원(光源)으로서 대승불교와도 깊은 차원에서 서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지견(知見)으로는 신앙에 의한 생명변혁과, 인간형성의 특징을 ‘연다’ ‘구족(具足)·원만(圓滿)’ ‘소생(蘇生)’이라는 세 각도에서 논합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불교적 관점을 ‘규범성(規範性)’ ‘보편성(普遍性)’ ‘내발성(內發性)’의 세 항목으로 부연(敷衍)하면서 러시아의 힘찬 인간주의의 맥동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첫째, ‘연다’는 의지해 살아갈 바의 근본규범을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열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이라는 부처의 성분, 즉 이상적 인간을 형성하는 종자와 가능성이 평등하게 갖춰져 있다고 통찰하였습니다.
이 ‘불성’은 금강(金剛)이며 불괴(不壞)요, 청정(淸淨)하고 무구(無垢)한 본질을 가졌으며, 개시(開示)된 ‘불성’은 ‘자신의 주인’으로서 인생의 행복을 결정짓는 기축(機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불성’은 여러 사견(邪見), 편견(偏見), 유견(謬見: 잘못된 견해) 등의 번뇌 때문에 깊은 곳으로 매몰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몇 겹의 두터운 껍질을 부수고, 잠재된 ‘불성’으로 향하는 돌파구를 열어 전면적으로 개화(開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다’는 규범의 개시(開示)입니다. 부처란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신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나의 생명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화경(法華經)’은 여러 비유(譬喩)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에는 — 어느 가난한 사람이 유복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 즐겁게 이야기하다 그는 잠들어버린다. 친구는 그를 위해 옷 안쪽에 비싼 보주(寶珠)를 몰래 넣고 꿰매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그것을 모르고 친구의 집을 떠난 그는 자신이 보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가난한 생활로 고생을 계속한다. 몇 년이 흐른 뒤, 변함없이 가난한 그를 보고 친구가 놀라서 꿰매어 넣은 보주를 가르쳐주자 가난한 사람은 크게 환희했다 — 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보주’는 알든 모르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갖추고 있는 ‘불성’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불성이란 살아가는 데의 근본규범이고,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나에게 설 장소를 준다면 지구도 움직여 보이겠다.”고 말한 견고한 발판, 즉 ‘아르키메데스의 지점(支點)’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근본규범을 자각한 인간만큼 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매우 좋아하는 톨스토이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연상하면, 작자의 자화상이라고 하는 레빈이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등등, 말하자면 ‘규범(規範)’에의 구도(求道)를 계속하는 가운데 한 농부의 말에서 신경지(新境地)를 여는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인간은 오직 자신의 욕망만으로 살고, 입으로는 오로지 자신의 사복(私腹)을 채우는 일만 합니다만, 포카누이치 같은 사람은 정직하고 곧은 노인입니다. 그 사람은 혼을 위해 삽니다. 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무명(無名)의 농부의 말이 전격(電擊)과 같이 그의 마음을 관통합니다. 혼과 혼의 촉발이라는 점에서는 세계의 문학사상(文學史上)에서도 손꼽히는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실로 ‘혼을 위해서’라고 형용되는 규범을 획득함으로써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생명의 세계가 생생하고도 현란하게 개시됩니다.
이러한 ‘암(暗)’에서 ‘명(明)’, ‘암(闇)’에서 ‘광(光)’으로 회심(回心)의 드라마는 톨스토이의 세계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것은 초기의 《카자크》 등에 황량한 원초의 모습을 띠고 묘사되며,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나 이 레빈의 사색으로 연동(連動)하고 있습니다. 그 고뇌와 시련 끝에 홀연히 열리는 인간적인 대감정은, 오히려 미완성이기 때문에 더욱 중후한 여운을 띠며 청년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교에 대한 톨스토이의 조예(造詣)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자아내는 ‘생(生)의 다이너미즘’은 특히 법화경에 설해진 약동감 넘치는 생명관과 강하게 서로 공명(共鳴)합니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본연적인 개가(凱歌)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자기자신의 확고한 인생관, 사회관, 우주관을 구축하는 데에 인간으로서 증거가 있다고 해도 좋겠지요. 자신이 목적을 만들고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후회 없는 인생을 끝까지 산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 ‘구족(具足)·원만(圓滿)’이란, 개시(開示)된 규범은 결코 부분관이나 차별관이어서는 안 된다 — 즉 인간끼리는 물론이고 자연이나 우주마저도 평등하게 남김없이 구족하는 전체관, 포괄적인 세계관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족·원만’이란, 생명이 세계에서 우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확대하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것은 과학이나 이성(理性)에서 말하는 보편성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말하는 보편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차원에서 자기완결(自己完結)을 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비인칭적이고 획일적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원에서는 확실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사실 과학기술문명은 가속도적으로 세계를 석권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없던 대량사(大量死: 메가 데스)의 비극을 경험한 금세기의 인류는 과학이나 이성의 작용을 절대로 방치하고 낙관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보편성’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공존하고 소우주(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대우주(매크로 코스모스)가 하나의 생명체로 융합하는 ‘공생(共生)’의 질서감각, 코스모스 감각입니다.
‘공생’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연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듯이 인간계든 자연계든 단독으로 발생하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물은 서로 관계하고 의존하면서 하나의 코스모스를 형성하고 유전(流轉)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는 만물이 하나 된 생명감각이 광대하게 확대되는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성에 올바른 위치를 부여할지가 커다란 과제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아도 톨스토이가 묘사한 레빈의 감수성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더운 여름날 숲 속의 풀 위에 드러누워 구름 한 조각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는 혼자 생각합니다.
“무한한 공간에 대한 지식을 훌륭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맑게 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틀림없이 올바른 것이다.”
우주를 ‘무한한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지성의 눈과 더불어 ‘푸른 하늘’이라고 보는 감성도 또한 올바르다고 하는 독백은, 고색창연한 ‘천동설(天動說)’로의 역행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으로 해낼 수 있는 선견적인 근대비판의 결정(結晶)입니다.
더욱이 이후 백 수십 년을 거친 현대과학의 지견(知見)은, 반드시 우주를 ‘무한한 공간’으로 보는 견해가 승리했음을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레빈의 이러한 ‘보편성’의 감각은, 따라서 합리주의가 독점한 황량한 세계가 아닙니다. 기쁨과 치유(治癒), 사랑과 헌신, 연민과 공감 등 인간성의 따스함을 전하면서 생생하게 약동하는 우주생명의 고동(鼓動)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필해야 할 것은 톨스토이가 방사(放射)하는 ‘보편성’이 당시나 지금이나 국제분쟁의 일흉(一凶)인 민족문제의 폐쇄성에 실로 정확한 재검토를 촉구한다는 점입니다.
세르비아전쟁의 참가를 의거(義擧)로 여기는, 불타오른 자기희생에 대한 민족적 열광에 물을 끼얹듯이 레빈은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희생될 뿐만 아니라 터키인을 살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민중이 희생되고, 또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심정으로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혼을 위해서이지, 살인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오.”
이렇듯 생생한 ‘보편성’의 광채 없이는 휴머니즘과 글로벌리즘의 지평(地平)에는 언제까지고 도달할 수 없겠지요. 아울러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은, 타인을 위해 봉사하면서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자아(自我)를 확대하는 속에서만 구축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 ‘소생(蘇生)’이란 사물을 고정화하지 않고 ‘오늘에서 내일로’ 하고 소생하는 창조적 생명의 다이너미즘을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인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기를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사물은 한시도 똑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고,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광석도 언젠가는 마멸(磨滅)하여 파괴되는 운명을 면할 수 없다고 설합니다. 하물며 인간사회는 모두 변화에 변화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현 상태에 안주하려 하는 타성의 껍질을 없애고, 그 내적인 변화의 율동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것만이 만물을 소생시키는 요체가 됩니다.
우리가 신봉(信奉)하는 불법(佛法)에서는 “자신(自身) 법성(法性)의 대지(大地)를 생사생사(生死生死)로 유전(流轉)해가느니라.”(‘어의구전’, 어서 724쪽)라고 설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철된 본원적인 소생의 힘이 인간 자신에 내재한다는 것을 명쾌하게 제시한 말입니다.
‘소생’이란 ‘내발성(內發性)’의 이명(異名)입니다. 이 ‘내발성’은 자칫하면 도그마(독단)(교조주의)에 얽매이기 쉬운 종교에서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간요(肝要) 중의 간요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 점에서 톨스토이의 분신(分身)인 레빈은 ‘신성(神性)의 나타남’을 자신 속에 느끼면서 이렇게 자문합니다. “다른 유대교도나 마호메트교도나 유교도나 불교도 ― 그들은 이 최선의 행복을 빼앗기고 있는 것일까?”
레빈이 실감하는 ‘선(善)의 법칙’은 틀림없이 내발적인 계시입니다. 그 행복은 그리스도교도에 한정된 것인가, 이교도는 어떤가? 그는 이러한 회의(懷疑)를 ‘위험’한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도그마(독단)나 광신(狂信)에 빠지지 않으려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레빈적 회의야말로 내면을 새롭게 응시하며 나날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려고 하는 내발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로부터 인격적인 가치의 추축(樞軸)을 이루는 ‘겸허’ 그리고 ‘관용’을 낳은 모태(母胎)였습니다.
또한 그 ‘내발성’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종교사에는 독선이나 오만이 횡행하고, ‘종교를 위해’ 인간이 서로 상처를 주는 전도(轉倒)가 되풀이되어왔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규범성’에는 딛고 일어설 발판에 대한 확신이 당연히 뒤따르겠지요. 그러나 레빈과 같이 그 ‘규범’의 올바름을 항상 묻는 내성(內省)의 눈이 있어야만 ‘규범’은 화석화(化石化)되지 않고 생생하게 창조활동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겸허함이나 관용이라는 내발적인 인격적 가치로 결실(結實)하지 못한 ‘규범성’은 어딘가 허위나 속임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규범성’과 ‘내발성’은 양쪽이 서로 어울려야만 뛰어난 인격적인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강한 사람일수록 겸허하며, 확신에 찬 사람이 곧 관용적인 사람입니다. 그러한 인격형성을 지탱하고 ‘자신의 주인이 돼라’고 격려하는 것이 진실한 종교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불전(佛典)에서는 “마음만이 중요하느니라.”(어서 1192쪽)라는 간결한 말로 ‘내발성’을 권장합니다.
또한 석존의 생애 최대의 목적을 ‘사람의 행동’이라 해서, 인격의 연마, 완성이 수행(修行)의 안목(眼目)이라고 위치를 부여하였습니다.
다시 논할 것까지도 없이 ‘지구적 연대의 세기’를 향해 종교, 민족, 국가 같은 벽을 초월한 ‘평화를 위한 대화’와 ‘문화·교육의 교류’가 더한층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무원칙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아니라 각자가 이러한 인격형성의 경합, 말하자면 ‘세계시민’의 배출을 경쟁하는 것이 더욱 창조적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좋은 의미에서 경합은 진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창가교육(創價敎育)’의 원점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초대 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싸우다 일흔셋에 옥사(獄死)하셨습니다. 이미 금세기 초에 “인류는 이젠 ‘군사적 경쟁’도 아니고 ‘정치적 경쟁’도 ‘경제적 경쟁’도 아닌, ‘인도적(人道的) 경쟁’의 시대를 지향해야 한다.”고 제창하셨습니다
그 인도적 경쟁에서 제가 경애하는 모스크바대학교의 학생 여러분이 21세기의 톱 주자(走者)로서 씩씩하게 그 자리에 나아가기를 저는 기대합니다. (큰 박수)
이상 불교의 지견(知見)을 기초로 톨스토이의 명작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거대한 코스모스’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저 나름의 접근을 ‘규범성’ ‘보편성’ ‘내발성’의 세 가지 각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쨌든 미래세기를 지호지간(指呼之間)에 바라보며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꾸는 주역, 주축이 되는 것은 ‘인간’입니다. 종교도 철학도, 문화와 정치·경제도 그 일점으로 수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저도 또한 여러분과 손을 잡고, 이 인간부흥의 대도(大道)를 힘이 있는 한 끝까지 달려갈 결심입니다.
끝으로 ‘시심(詩心)의 나라’ 러시아의 아름다운 시(詩) 한 구절을 여러분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대공(大空)에서 대담(大膽)하라!
환희 속에 자신의 사명에 눈떠라!
… … …
보라! 양광(陽光)이
때로 하늘을 금색으로 물들이고
때로 얇은 구름으로 보일 듯 말듯 한다
은빛 달은 은은히 감돌고
전원(田園)에는 봄의 아름다움이 싹트고
장미꽃 봉오리가 부풀어오른다
풀잎 아래는 맑은 물이 흐르고
언덕 위에서는 포도나무 가지가 빛나고
정적 속에 산들바람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다.
환희로써 인생의 꽃을 쟁취하라
하늘의 혜택을 조용하게 받아들이자
이 세상은 나쁜 쾌락과 불행의 골짜기가 아니다
그대여! 행복하여라
미혹되지 말라
모두의 은혜의 근원을 잊지 말라
‘진실’과 ‘법’을 존중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선(善)을 베풀어라
그때 그대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무상(無常)을 떠나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새벽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푸시킨이 노래한 이 시처럼,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습니다. 희망이 있는 한 행복은 빛납니다.
새로운 인류문명의 희망찬 새벽 ― 그 시대를 여러 선생님과 함께, 여러분과 함께 확신하면서 저의 강연을 마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파시바!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