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베이징대학교를 방문하여 많은 교직원과 학생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또한 베이징대학교 최초의 ‘교육공헌상’을 받아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왕쉐전(王學珍) 교무위원회 주임, 우수칭(吳樹靑) 총장을 비롯하여 열석(列席)하신 모든 선생님, 그리고 저의 저작을 간행하시느라 애써주신 베이징대학교출판사의 마쯔잉(麻子英) 사장, 여기에 모이신 학생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카대학교의 교직원, 학생들이 “부디 안부를 전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으므로 전해드립니다. (박수)
아시는 바와 같이 소카대학교는 일본의 대학 중에서 최초로 귀 대학과 학술교류를 맺은 대학입니다. 협정을 조인한 이후 올해로 벌써 10년의 세월을 새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귀국과 귀 대학의 우의(友誼)의 덕택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감사드립니다.
이미 저는 귀 대학에서 명예교수칭호 외에, 일본연구센터에서는 고문으로서의 영예를 받았습니다. 또 이제까지 6회에 걸쳐 귀 대학을 방문할 때마다 여러분은 언제나 변함없는 우정의 미소로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저를 베이징대학교의 일원으로 대우해주신 여러분의 진심에 둘러싸여, 저도 그리운 우리 ‘모교’에 돌아온 듯이 가슴이 설렙니다. 그 ‘모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저는 귀 대학이 더한층 발전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더욱 힘을 다할 결심입니다.
오늘은 ‘교육공헌상’을 받은 기념강연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대학에서 하는 강연은 언제나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싫증이 날 것이고, 짧으면 학문적인 축적(蓄積)이 없지 않은가 하고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웃음) 또한 너무 쉬우면 최고학부의 대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고, 너무 난해하면 그다지 뜻을 음미하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비난할 것입니다. (웃음) 정말 대학에서 하는 강연은 어렵습니다. (폭소)
그러나 오늘은 강연자의 숙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과제에 도전하면서 조금 시간을 얻어 ‘교육의 길, 문화의 다리 — 나의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박수)
이전부터 저는 교육이야말로 ‘나의 인생을 총마무리하는 사업’이라고 마음에 결정하였습니다. 미래를 열고 미래를 육성하는 일도 그 주체는 ‘인간’에 있습니다. 인간을 육성하는 사업이 바로 교육입니다. ‘인간’에게 내재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단련하고, 그 에너지를 가치창조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곧 교육입니다. 이를테면 교육은 사회를 구축하고 시대를 결정하는 ‘근원의 힘’입니다. 특히 현대는 고도로 세분화된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한편 그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인간의 ‘지혜’의 힘, 깊은 인격의 힘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던 ‘국제화’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교육은 금후 한 나라만이 아니라 지구의 미래를 개척하는 대업으로서 더욱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 기대야 할 ‘초석’은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면 저의 뇌리에는 중국 교육사상의 빛에 가득 찬 전통이 떠오릅니다. 저는 거기에서 ‘인간’의 완성을 향한 도도(滔滔)한 ‘정열의 대하(大河)’를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인간교육에 관한 영지(英智)에서 고대 그리스인과 중국인은 쌍벽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성의 완성, 인격의 도야(陶冶)를 지향하는 교육의 ‘이념’, ‘교육과정’을 둘러싸고 양자 모두 정말 정치(精緻)·심원(深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인에게 교육의 주안점 중 하나는 개성의 개발에 있었습니다. 즉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학습자의 자발능동성’을 중요하게 여긴 플라톤이 스스로 주재한 아카데미아(학원)에서, 학습자 상호의 계발과 개성의 발현(發現)을 가져오는 ‘대화’를 중요시한 것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인간교육의 사상이 이곳 중국에서 싹터 크게 꽃피웠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 나라를 유세(遊說)하였으나 정치에 희망을 잃고, 오로지 후진(後進) 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귀국의 선도자(先導者)는 ‘교(敎)’ 즉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육(育)’ 즉 ‘기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계발(啓發)’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분(憤)하지 않으면 계(啓)하지 않고 비(悱)하지 않으면 발(發)하지 않는다.” ― 배우고 괴로워하는 열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결실하지 않는다.
또 “일우(一隅)를 들어 삼우(三隅)로써 반(反)하지 않으면 즉 두 번 다시 하지 않음이라.” ― 사각(四角)인 물건의 한 모서리를 가르쳐서 다른 세 모서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엇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는 등, 솟구치는 배움의 의욕과 자율을 엄하게 요구한 지도법, ‘학문’ 즉 배우는 것과 묻는 것의 양쪽에 같은 비중을 둔 바탕 위에서의 권장(勸奬) 등, 어느 것이나 깊은 인간통찰에서 나오는 탁견(卓見)이며, 중국문명에 깃든 인간교육의 ‘근원적인 형태’에서 발하는 빛을 강하게 느낍니다.
최근 이러한 동양의 교육사상의 광원(光源)에, 세계의 지성인들도 새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드배리 교수는 《주자학朱子學과 자유의 전통》이란 저서에서, 중국사상의 저류에 있는 ‘자유주의’의 계보를 더듬어가면서, 예를 들면 서로 자기의 논(論)을 교환하는 ‘강학(講學)’이라는 교육방식을 통해 길러진 학문의 터전에서의 상호부조(相互扶助)·상호계발 정신을 논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중국의 교육사상에서 제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첫째로 항상 인간을 기축(機軸)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루소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그리스신화에서는, 신들을 위해 인간이 서로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신들이 싸웠으며, 또한 귀국에서도 선철(先哲)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화 현상)을 말하지 않음’이라고 하여, 초월적인 것을 거부한 사실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인간의 내면적 도야를 제일의(第一義)로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천으로 바꾸어가는 강한 윤리성을 띠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예를 들면 오로지 혼의 위계질서를 조절하려고 한 플라톤의 주된 저서는 무엇보다도 《국가론國家論》으로써 구상한 것이며, 플라톤 자신이 만년(晩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불타는 듯한 정치적 관심과 정열을 품어왔습니다.
중국의 전통에서도 유명한 《대학大學》 팔조목(八條目) 중 전반부 — 즉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은 후반부의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조목에 나타난 이른바 ‘평화의 왕도’를 걷기 위한, 빠뜨릴 수 없는 전제(前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제가 굳이 ‘고대 그리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듯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리스사회의 역사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단절이 있고, 주로 문명적·지적 유산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에 비해서 중국에서는 거대한 판도(版圖)와 거대한 인구를 가진 일대(一大)문명권의 에토스(도덕적 기풍)로서, 더구나 30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도 단절되지 않고 계속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인간교육에 대한 정열은 단순히 유교적인 것에 한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교육이라는 인간적 영위(營爲)를 통해서, 카오스(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한결같은 의지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대하와 같은 흐름에는 문화의 발전과 사회안정의 기반을 ‘민중’에서 구해야만 한다는 왕양명(王陽明)의 민중교육론, 또는 명말청초(明末淸初;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격동기에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써서, 학교에서 자치(自治)나 실력본위 인재등용의 필요를 설한 황종희(黃宗羲)의 학교론(學校論) 등, 지금도 주목해야 소론(所論)이 적지 않습니다.
원래 그것이 항상 성실하게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교육의 진흥은 일명 시험지옥이라고 할 ‘과거(科擧)제도’를 낳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그 유교적 교양은 오로지 지배계층만 독점하여 진정 민중의 것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서도 인간의 자기완성에 기대 질서를 형성하려는 중국인의 질서감각, 역사감각, 다시 말하면 우주감각은, 예를 들면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할 때의 영구혁명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여전히 맥박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프랑스에서 중국학의 제1인자로 알려진 반데르메르슈 교수가 “서구문명에 필적하는 어떤 문명형태가 출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 ‘신(新)한자문화권’ 형성을 위한 지하수맥(地下水脈)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느 선철은 “중세적 세계관을 타파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불러온 것은 새로운 세계상(世界像)이 아니라 세계상이 없는 시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계상이 없는 그런 시대가 점차 황혼기를 맞이하는 현대의 교육사상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중국의 전통정신은, 보편적 휴머니즘을 불가결한 기축으로 삼을 새로운 세계상의 형성에 공헌을 많이 할 것임을 저는 믿어마지않습니다.
시류는 지금 중일교류에 새로운 장(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다시 문제 삼는 것과도 통하겠지요.
말씀드릴 것도 없이, 일본은 귀국에서 교육사상을 비롯해 문화 전반에서 대은(大恩)을 입었습니다.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중일교류에 있어 이 일은 일본에 크게 문제제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국가도 오늘날의 지구적인 시대에는 고립하여 살 수 없습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한, 무수한 사람과 국가들에게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은혜’란 인간과 사회의 영위를 서로 지탱하고 키워가야 하는 정신성의 발로이며 인간성의 정수(精髓)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초창기의 베이징대학교에 봉직했던 루쉰은, 일찍이 일본유학시절의 은사에 대한 추억을 명작 《후지노藤野 선생님》에 남겼습니다.
한 번 입은 은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평생 없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란 본질적으로 베푸는 쪽보다도 받는 쪽 ‘마음의 문제’입니다. 문호의 마음에 깃든 스승을 향한 은애(恩愛)의 마음, 저는 거기에서 인간의 고귀한 정신이 연주하는 내적인 곡조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느끼고’ 은혜를 ‘갚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정도(正道)’입니다. 그러므로 ‘문화의 은인’인 중국의 발전과 행복을 위하여 성심성의를 다해 노력하는 것이 일본인에게 더욱더 요구된다고 확신합니다.
중일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습니다. 예로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나라’라고 불려왔습니다. 이런 양국의 깊은 유대를 생각하기 때문에, 함께 활력 있는 진실한 평화와 안정을 위해 힘을 합하는 것이,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의 실현에도 크게 공헌하는 것이 된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우정은 관철해야만 ‘진실한 우정’으로 승화됩니다. 중일우호도 관철해야만 ‘순금의 우호’가 될 것입니다. 양국 사이에 어떤 우여곡절이 생길지라도, 우리는 결코 우호의 밧줄에서 손을 놓으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일우호라는 ‘금의 다리’를 장래에까지 어떻게 반석같이 굳게 하느냐, 영원하게 하느냐 하는 현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나 경제적 왕래도 중요함은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호교류를 더욱 확고히 지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민중과 민중을 맺는 ‘마음의 유대’일 것입니다. 민중차원의 신뢰관계를 소홀히 하면 정치·경제상의 어떤 관계도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민중이라는 ‘대해(大海)’ 위에서만 정치·경제라는 ‘배’가 뜨고 나아갑니다.
민중과 민중의 마음의 유대는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강합니다. 무형(無形)이기 때문에 보편적·항구적인 유대입니다. 그것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 ‘영원’ ‘보편’을 향해 비상하는 날개를 달아주는 ‘문화’의 광채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은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등성’ ‘공감’의 유대를 길러줍니다. 그런 ‘문화’ ‘교육’의 교류만이, 중일의 민중유대를 영원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한층 ‘문화’ ‘교육’교류를 강화하여 중일우호의 ‘금의 다리’에 제2기의 왕래를 —” 이라고.
베이징대학교는 8년 후면 창립 100주년의 가절을 맞습니다. 새로운 ‘제2세기’를 향하여 동양 유수의 전통을 자랑하는 귀 대학이 세계를 위하여 완수할 역할은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귀 대학의 모토에 우리 ‘창가(創價)’의 이상과도 상통하는 ‘창신(創新: 새로운 것의 창조)’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귀 대학의 ‘창신’에 빛나는 장대한 미래를 마음에 그리면서, 저도 더욱 온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박수)
끝으로 오랜 시간 저의 강연을 들어주신 베이징대학교의 여러 선생님, 그리고 내빈 여러분, 신세기를 담당할 지도자인 젊고 위대한 학생 여러분에게 영광 있으라, 행복 있으라 하고 기원드리며 저의 이야기로 대신하겠습니다.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