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며칠 전 베이징대학교에서 ‘평화를 향한 왕도 — 나의 고찰’이라는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8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푸단(復旦)대학교에서도 이러한 기회를 주셔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쑤부칭(蘇步靑) 명예총장님, 미국을 방문 중인 셰시더(謝希德) 총장님, 그리고 참석하신 모든 교수님과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베이징대학교 강연에서는 중국문명의 특징인 ‘상문(尙文)’의 전통이 전쟁과 무력행사로 치닫기 쉬운 경향을 억제하는 힘을 지니는 점, 그리고 그 억제력을 가져오는 전통적인 사고양식에 대해 제 나름대로 한 고찰을 덧붙였습니다.
이번에는 주제를 좁혀, 제가 가장 주목하면서도 베이징대학교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역사관의 문제, 즉 역사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의 깊이라는 점에서는 중국이 세계에서 으뜸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동양이지만 인도 같은 나라는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 중국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역사상의 사건에 집요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 기록해서 문물로 남겼습니다.
책이 많은 것을 가리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합니다. 즉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까지 닿는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역사서는 틀림없이 이 ‘한우충동’이라는 말처럼 매우 방대합니다.
중국에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 또는 ‘차고설금(借古說今)’ 즉 옛날을 빌려 현재를 설한다는 등의 격언을 오랜 세월 동안 존중했습니다. 이 말들은 역사를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또 현대를 비추는 광원(光源)으로서 받아들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중국의 역사관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분명히 혁명 후의 중국에서는 인민대중이 모든 분야의 원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故)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말씀하신 “인민, 오로지 인민만이 세계의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라는 역사관에 서서 대중에게 봉사하는 ‘민중사관(民衆史觀)’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 요(堯)황제와 순(舜)황제의 신화적인 시대를 최고의 모범으로 삼는, 다시 말해 ‘제왕사관(帝王史觀)’이 주류를 이루어온 유가류(儒家流)의 전통적인 역사관과는 명확하게 구분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더불어 역사의식의 깊숙한 곳에 수천년 동안 축적된 전통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리 쉽게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깊숙한 곳을 응시한 루쉰은 인간이 인간을 먹는, 다시 말해 ‘식인(食人)’이라는 착상에서 인간변혁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관점으로는 좋은 의미에서 역사를 존중하고, 역사적인 경험을 거울이나 광원(光源)으로 삼아 현재를 살며 미래의 방향을 정하는 전통적인 역사의식은, 수천년 세월 동안 지금도 맥맥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국의 문물이나 사람의 말에는 자주 정곡을 찌른 글을 고전에서 인용하고, 언제나 저는 느낍니다만, 그것은 역사가 어떤 종류의 교훈성을 내포하면서 현재에 존재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한 그러한 포착방법은, 다시 말해 18세기 이후의 유럽, 특히 19세기 역사주의의 조류(潮流) 중에서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 역사관이나 역사의식과는 분명히 이질적(異質的)입니다. 확실히 역사주의의 조류는 실증성이나 객관성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은 역사를 객체화하고, 자연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의 무모순성(無矛盾性)이었습니다. 그 결과 역사가 어떤 종류의 법칙성을 띠고, 인간과의 생기발랄한 관계를 끊고 홀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근대문명의 위기를 예리하게 예견한 독일의 니체는 “우리는 역사를 인생과 행동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 인생과 행동에서 쉽게 이반(離反)하려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또 아욕적(我欲的) 인생이나, 겁이 많거나, 나약하고 비열한 행동을 재미있게 장식하려고 사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말한 ‘인생’은 ‘인간’과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관만이 독립해 ‘인생’과 ‘인간’이 역사를 창출한 주역이지만,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조연에게 쫓기는 것을 니체가 공격했습니다.
역사가 더 좋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다시 말해 ‘인생’과 ‘인간’을 위한 활동의 근원이 된 중국의 역사의식은 그러한 니체의 공격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차원에 위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이 상징하듯이, 중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사는 냉담한 객관적인 법칙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심각한 질문을 늘 안고 있었습니다.
《사기史記》 중에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 늘 용기와 감동으로 떨립니다.
“주(周)의 문왕(文王)은 은(殷)의 주왕(紂王)에게 체포되었을 때 《주역周易》을 저술했고, 공자(孔子)는 사람들이 자기의 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을 알고 《춘추春秋》를 썼으며, 굴원(屈原)은 초왕(楚王)에게 추방되어 《이소離騷의 시詩》를 노래했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에 《국어國語》를 지었고, 손자(孫子)는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병법(兵法)을 편집했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촉(蜀)에 유배된 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남겼고, 한비자(韓非子)는 진시황에게 체포된 후 《세난說難》 《고분孤憤》을 썼다. 아름다운 ‘시(詩)’ 300편까지 성인 현자가 당시의 세상 형편에 분개해 지은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고난이나 박해가 뛰어난 사서(史書)와 문물(文物)을 낳은 모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모두 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 대저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의 중심사상이었습니다.
역사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은 역사적 기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면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자기역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운명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의연히 흔들림 없는 한 자립한 인간상이 연상됩니다.
불법에 “팔만사천의 법장(法藏)은 자신 일인(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어서 563쪽)라는 글월이 있습니다. 팔만사천은 구체적인 수가 아니라 다수를 의미하고, ‘팔만사천의 법장’은 석존이 평생 설한 모든 법문(法門)을 가리킵니다. 그 방대한 모든 법문이 ‘자신 일인의 일기문서’ 즉 한 인간생명의 작용으로 포착하고 있습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여기서도 또한 훼예포폄(毁譽褒貶)에 흐르지 아니하고, 용감하게 운명에 맞서는 자립한 인간관·세계관의 확립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역사의 흐름은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귀국의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의 말을 빌리면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입니다.
인간 특히 민중이 조역(助役)에 만족한 역사에 하루라도 빨리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종(縱)’으로 자립하는 인간상을 연구하고 확립하면서, ‘횡(橫)’으로는 그러한 인간과 인간을 잇는 세계시민연대의 물결을 천파만파로 넓혀야 합니다.
시대의 급속한 흐름은 ‘우주선 지구호’시대를 맞고 있으며, 세계는 모든 의미에서 긴밀한 일체화(一體化)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든 일본의 역사든 세계사의 운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대의 상황입니다.
명암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역사의 흐름을 희망 넘치는 세기로 개척하려면 인간이 곧 주역이라는 역사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우주선 지구호라는 지구시민의 연대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서로 확인하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강하게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도 또 앞으로도, 중국 그리고 세계의 뛰어난 인재를 80년 가까이 배출한 푸단대학교가 더한층 크게 흥륭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