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곳 베이징대학교를 여섯번째 방문했습니다. 오늘은 4년 전에 이어 다시 강연기회를 주신 존경하는 딩스쑨(丁石孫) 총장님,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과 참석하신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영원히 다시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을 중일우호를 위해 한걸음 더 깊은 유대를 맺는 기념일로 할 결심입니다.
지난번에는 ‘새로운 민중의 모습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중국민중의 근본형상을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평화를 향한 왕도(王道) — 나의 고찰(考察)’이라는 주제로 평소 제가 믿고 실행하는 항구적인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전망을 한 민간인의 위치에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저의 하찮은 강연이 중일 양국의 평화우호를 위해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개인끼리의 사사로운 싸움도 국가 간의 전쟁도 다툼은 자기억제력이 작용하지 않은 때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가차원에서 일단 전쟁의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하면, 유명한 플라톤이나 영국의 철학자 홉스가 국가를 가리켜 인간이 떠난 ‘괴수(怪獸)’라고 비유한 것처럼 자기억제력을 작용케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강대한 군비(軍備)를 소유하고 완전한 수비태세를 갖춘 나라가 마지막까지 수비태세만 견지했다는 국가는 유감스럽지만 아직 들어본 기억이 없다.”는 괴테의 한탄은 그 어려움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군비를 소유하지 않으면 가장 좋지만, 현실적으로 단번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만큼 평화를 외치는 시대는 없지만, 군축(軍縮)을 진전시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은 멀어도 평화를 위해 착실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문화나 문명이 지닌 ‘문(文)’의 힘으로 군비 즉 ‘무(武)’를 컨트롤하는 일이 급선무이겠지요. 그것을 저는 ‘국가의 자기억제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 3000년의 역사는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사를 거시적으로 내려다보면, ‘상무(尙武)’보다 ‘상문(尙文)’의 나라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것은 비교상 상대적인 것으로, 순전히 ‘상무’만 하는 나라가 없는 것처럼, 순전히 ‘상문’만 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주류냐 하는 문제로, 중국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시대를 제외하고는 ‘상문’의 기풍이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분명히 중국도 한(漢)나라 건국 당시와 몽고족이 지배한 원나라 시대는 무력을 전면에 내세운 팽창주의였고, 만리장성이 상징하듯 변경에서는 끊임없이 공방전이 계속된 역사였습니다. 또 국내에서는 치란흥망(治亂興亡)의 역사를 반복해 전화(戰火)의 모습도 일본 같은 섬나라에서 보면 말 그대로 규모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문을 존경하는 정신이 ‘상문’이 되지 못하고, ‘문약(文弱)’으로 떨어져 각 왕조 말기에는 시대정신의 퇴폐를 불러와 나라가 혼란에 상태에 빠진 사실도 저는 잘 압니다. 그 위에 굳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문명사에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드러낸 강대한 수많은 제국(帝國)에 비해, 중국사에서는 무력에만 의존하는 명백한 무단주의(武斷主義)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으로 무단주의가 횡행하다가도 마침내는 문화나 문명의 큰 바다와 같은 힘에 흡수되고 맙니다.
중국을 가리켜 ‘세계에서 제일가는 역사의 나라’라고 하듯이 그 엄청난 사서(史書) 몇군데만 펼쳐보면, 항상 강렬한 윤리성과 윤리감각으로 넘쳐납니다. 그것이 ‘상문’의 나라답고, 힘에 의존한 무력침략을 억제하는 힘도 거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원정이 도리에 반하고 덕에 어긋난다는 사고방식이 중국에 싹튼 시대는 수(隋)·당(唐) 무렵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큰 문명을 현란하게 꽃피운 시대에 이런 사고방식이 생겼다는 것은 문화나 문명의 힘을 측정하는 데에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수(隋) 양제(煬帝)가 고구려 원정을 강행해 민중에게 가혹한 희생을 강요한 무렵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전쟁을 반대하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지또 현종(玄宗) 말년 무익한 국경경영에 막대한 국비와 인명을 소비할 때, 두보(杜甫)의 유명한 시 ‘병거행(兵車行)’ 등에서는 단순히 전쟁을 싫어한다기보다 외국원정을 부덕의 소치로 보는 울림으로도 들려옵니다.
옷 붙잡고 발 구르며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니
곡소리 위로 올라 구름을 뚫을 듯
길을 가던 사람 병사에게 물으니
병사는 기탄없이 징발이 잦다 하네
어떤 이는 열다섯에 북방 황하에 종군하여
마흔이 되기까지 서쪽 둔전을 개간했고
떠날 때는 어려서 마을 촌장이 두건을 매어주었지만
백발에 돌아와도 다시 변방을 지키러 나가네
변방에 흘린 피는 바다를 이루어도
변방을 징벌하려는 무황(武皇)의 의지는 끝이 없네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산동 땅 이백주(二百州)에
천 고을 만 마을에 가시덤불 생긴 것을
출정하는 병사를 대신해 무익한 침략전쟁을 고발한 명시(名詩)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외국으로 출정하는 것이 무도하고 부덕하다는 사고방식과 시대정신이 배양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일본이 중국에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 등을 파견하여 직접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중국의 외교자세 중에서도 특히 조공외교, 조공무역에 단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속국에 종주권을 요구할 뿐 굳이 정복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조공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나라가 신하의 예를 취하는 증거로 공물을 싸 들고 조정에 찾아옵니다. 이에 대해 중국황제는 답례로 중국의 문화적 공예품 등을 하사하는 것이 외교, 무역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이 조공무역의 전제가 된 것이 문명, 문화로써 주변국을 심열성복(心悅誠服)시키려 하는 생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상문사상’과 자부심이 근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주목할 것은 이런 조공무역이 반드시 종주국인 중국에 이익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신이나 수행원의 체재비 등 과도한 비용이 종주국에겐 부담이었습니다. 게다가 황제의 하사품이 항상 공물보다 많아, 종속국은 한 번 조공을 바치면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가로 다섯배에서 여섯배의 이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취한 배경에는 이런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된 중국의 사정을 들 수 있습니다.
대제국의 여유가 여기까지이긴 하지만 참으로 대범한 질서감각입니다. 최근 수년 저는 동유럽 여러 나라를 몇 번 여행하고, 잔인할 정도로 착취한 오스만제국의 흔적에 전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만큼 조공무역에서 볼 수 있는 중국의 대외자세의 대범함과 ‘상문’의 모습이 눈에 띄게 강한 인상으로 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질서감각은 근대유럽의 민족주의와 그것이 낳은 지배와 피지배의 의식구조와도 현저하게 양상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5.4운동’이 들끓는 듯한 상황에서 베이징대학교를 방문한 버트런드 러셀은 중국에 대한 인상을 “‘자긍심을 품기 때문에 싸울 마음이 없다’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중국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중국인의 태도는 관용과 우호적인 태도로 상대에게 예절을 표하고, 상대한테서도 예절로 대우를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에 대한 러셀의 평가에 대해 루쉰 등은 구습이 남아 있는 봉건제도의 부정적인 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하여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다른 문명의 안목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중국문명의 미질(美質)을 표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 또는 국가가 드러내는 본능이나 수성(獸性)을 컨트롤하는 문명의 ‘힘’ 즉 자제력, 억제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힘을 풍부하게 비축하는 것 외에는 군비를 통제하고 마침내 폐기로 이끄는 평화의 길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16년 전, 일본에서 중국의 위협론이 한창일 때, 저는 중일국교정상화를 제언하며 “중국이 직접 무력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일면에는 이런 역사와 전통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중일 양국의 국교는 회복되었고, 유엔에 복귀한 귀국은 “대국주의는 추구하지 않겠다.”고 누차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는 다소나마 귀국의 역사를 알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전략적인 술책 따위와는 무연(無緣)한 발언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중국이 그런 자제력이나 억제력을 만들어내는 배경을 좀 더 파헤쳐보면, 사물에 대한 견해와 사고방식의 원점에 항상 ‘인간’이 있다는 것을 저는 느낍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사상을 상세히 알고 있는 재주가 뛰어난 학자 야마다 게이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의 철학은 오직 인생의 목적을 추구했다. 철학자들의 사색은 인간이라는 관심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자연에 관한 사색까지도 자연주의적 처지에서 인간에 관한 사색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학이었다.”
‘인간이라는 관심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는 말은 인간이 원점이었다는 뜻입니다. 철학에 한정하지 않고, 종교를 비롯해 과학, 정치 등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면의 기조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을 위한 철학, 인간을 위한 종교, 인간을 위한 과학 그리고 인간을 위한 정치입니다. 화복(禍福)을 만들어내는 대하(大河)처럼 중국의 역사에서 인간이라는 좌표축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연한 것 같지만 이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의 세계, 특히 유럽의 중세사회 등에서는 좌표축은 항상 ‘신(神)’이 차지했습니다. 인간은 신의 종이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 영위인 양 보여도 내용은 신을 위한 철학이요 신을 위한 종교, 과학, 정치였던 셈입니다.
이런 사고의 본연의 자세는 귀신이 사라진 근대 이후에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을 대신해 좌표축의 중심이 된 것은 ‘진보’라는 관념이자 과학기술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근대과학의 본연의 자세로서 한가지를 예로 들어봐도 ‘인간이라는 관심영역’에서 일탈했기 때문에 지성(知性)의 자기운동, 자기완결의 소산이 되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본디 저는 과학기술문명의 성과와 은혜를 처음부터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기축이 누락된 과학의 장래에 큰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평화라는 관점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근대국가 간 전쟁의 주된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식민지주의의 배경에도 ‘인간’이라는 기축을 누락시킨 사고형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서구의 근대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인간사회를 ‘문명’과 ‘미개(未開)’로 양분하는 오만한 사고형태가 잘못된 선민의식(選民意識)을 낳았고, 식민지주의를 뒤에서 지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근대문명은 물질적·정신적 소산을 많이 남겼으면서도, 전체의 경향성에서 보면 인간의 야만적인 정열에 대한 자제작용, 억제작용보다는 야만적인 정열을 위장하는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교에서 ‘신(神)’에 해당하는 것을 굳이 중국문학에서 찾는다면 ‘하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은 종교나 철학, 도덕, 과학 등에 가끔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초기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초월적인 실재로 존재했다고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늘’은 선험적(先驗的)인 실재로서 인간을 대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인간에게 딱 들어맞게 인간 쪽에서 질문했습니다.
현대 중국에서 이 ‘하늘’이라는 말이 어떤 어감을 갖는지 저는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아마 여러 해독을 끼친 봉건도덕의 유물로서 받아들이는 면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주목하는 것은 ‘하늘’보다는 질문하는 방법입니다. ‘하늘’이 항상 인간에 들어맞게 내재적으로 내발적(內發的)으로 질문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번 강연에서도 말씀드린 ‘개별을 통해 보편을 본다’는 생활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인간 쪽에서 현실을 통해 ‘하늘’을 질문하고 그리고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부단한 노력과 실천에 무게를 둡니다. 말하자면 ‘정(靜)’보다는 ‘동(動)’의 이미지가 부각됩니다.
이와 반대로 어느 일정한 고정관념을 기준으로 삼아 가치를 판단하려는 본연의 자세는 그것을 너무 고집한 나머지, 관념이라고 하면서도 생생유전(生生流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위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빠뜨리기 쉽습니다. 그 결과 ‘이론신앙’ ‘제도신앙’ ‘효율신앙’을 불러와 살아 있는 인간은 그것에 속박당하고 맙니다.
예를 들면, ‘핵억지력신앙’ 등은 인간 쪽에서 질문이 누락된 점에서 근대의 잘못된 신앙의 정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앙은 인간끼리의 불신과 증오와 공포 위에 성립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핵폐절 따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動)’의 이미지에 관해 루쉰의 작품 《비공非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전국시대의 행동하는 평화주의자로서 유명한 묵자(墨子)를 다룬 내용으로, 일본의 역자(譯者)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쟁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라고 번역했습니다.
노(魯)나라 사람 묵자는 대국인 초(楚)나라가 소국인 송(宋)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동기는 묵자의 고향 사람인 공수반(公輸般)이 성을 공격하는 무기인 운제(雲梯)를 만들어 초왕(楚王)에게 바쳤기 때문에 왕이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묵자는 전쟁을 말리기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초나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살펴보니 송나라는 너무나 가난하고 초나라는 풍요로웠습니다. 무엇을 위한 공격인가 …. 먼저 묵자는 공수반을 만나 전쟁이 어리석은 짓임을 설득합니다. 하지만 이미 초왕을 설득한 뒤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묵자는 공수반을 통해 초왕을 만납니다.
묵자가 말하는 도리에 초왕은 이해하면서도, 공수반이 자기를 위해 운제를 만들었기에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묵자는 초왕 앞에서 공수반과 도상전술(圖上戰術)을 펼쳐 모두 이겼습니다. 결국 공수반이 묵자를 살해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암시하지만, 묵자는 더욱 지혜를 짜 초왕에게 말합니다.
“나의 조언으로 송나라는 이미 철벽수비를 갖췄다. 설령 나를 죽인다 해도 나의 제자 300명이 기다리고 있다.”
초왕은 마침내 공격을 단념했다고 합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루쉰은 수많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도 묵자를 가장 존경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훈훈한 분위기에 풍자가 통하는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특히 초왕이 “나를 위해 운제를 만들어주었기에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대목은 현대의 군비확대론자의 표본을 보는 듯합니다.
제가 왜 《비공》을 말하는가 하면, 묵자의 평화를 위한 행동주의에는 지금도 평화를 위한 돌파구를 여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평화를 위해 움직이고 말하는 ‘동(動)’을 촉발하는 작업은, 설령 멀리 돌아가는 듯이 보여도 불신과 증오 그리고 공포를 신뢰와 우정으로 바꾸는 ‘평화를 위한 왕도(王道)’이자, 반드시 마음과 마음을 여는 회로(回路)를 발견할 수 있음을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대회에 중국펜클럽 회장 바진 씨가 참석해, 대회에 앞서 저도 만나뵈었습니다. 바진 씨는 인사에서 “문(文)을 통해 벗을 만난다.”는 참으로 ‘상문’의 나라다운 말로 시작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합니다. 문학작품도 긴 세월에 걸쳐 전파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펜을 무기로 삼아 진리를 견지하고, 사악을 규탄하고, 암흑세력에 타격을 주고, 정의로운 힘을 결집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운명이 그 손을 잡고 가기만 하면 세계대전도 핵전쟁도 반드시 피할 수 있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은 비록 물방울처럼 미력하게 보이지만 마침내 바위를 뚫고 아니 바위도 밀쳐내는 대하(大河)가 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과감한 행동과 용기 있는 대화를 거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력하지만 저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중국의 미래를 양 어깨에 짊어진 여러분과 함께 평화를 위해 대도(大道)를 걸어가기를 염원하며 저의 강연을 마칩니다.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