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UCLA(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 영 총장과 밀러 부총장의 초대를 받고 미국의 지성(知性)을 대표하는 캠퍼스에서 강연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박수)
앞으로 미국을, 아니 21세기의 세계를 짊어질 여러분에게 만강(滿腔)의 기대를 걸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강사라고 하기보다는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는 벗으로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큰 박수)
지지난해와 지난해 5월,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철학자인 토인비 박사의 초대를 받아 열흘 동안 진지하게 토의했습니다. 저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는 상호촉발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토인비 박사는 현대가 자랑하는 최고지성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인류의 거대한 재산입니다. 그분은 여든다섯임에도 더욱 정정하게 창조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토인비 박사 부부는 언제나 여섯시에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이 시간엔 아직 잠자리에 있을지도 모르고 (웃음) 화장실에 갔다 와서 다시 잠자리에 들지도 모릅니다. (웃음)
두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 침대를 정리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박사는 아홉시가 되면 일이 있든 없든 책상으로 향합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아름답게 늙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젊음이라는 아름다움도 있으나, 늙음이라는 아름다움에는 존엄스러움이 함께하는 아름다움이 감돕니다. 여러분도 아버지 어머니가 아름답게 늙으실 수 있도록 낙제하거나 낙담시키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웃음, 박수)
토인비 박사와 대화할 때 좌우명을 여쭈어본 적이 있습니다. 박사는 “라보레무스.”라고 라틴어로 말했는데, ‘자, 일을 계속하자’는 뜻입니다.
서기 211년에 로마제국 세베루스 황제가 잉글랜드 북부의 동토(凍土)에서 원정 길에 올랐을 때 중병으로 쓰러져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지휘자로서 임무를 계속했으며, 임종하던 날에도 “자, 일을 계속하자.”고 하여 전 군에 좌우명을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연로한 박사가 더욱 젊게 정력적으로 일을 계속하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사상(思想)의 고투’를 계속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움을 거기서 느꼈습니다. 박사와 저는 문명론, 생명론, 학문과 교육론, 문학과 예술론, 자연과학론, 국제문제, 사회문제, 인생론, 여성론 등 폭넓은 주제로 대화했습니다.
대화는 21세기 미래를 전망하며 끝없이 이어져 연 40시간을 넘겼습니다. 제가 일본에 귀국한 후에도 서한으로 토론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제가 박사를 만나 대담을 시작하며 인사를 했을 때 “자 합시다. 21세기 인류를 위해 계속 대화합시다.” 하며, 순간 엄한 표정으로 결의를 담아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 속에 있는 미래세계에 강한 관심을 두고 지성(知性)의 메시지를 주려는 박사의 마음에 저는 감명을 받으며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오늘 저는 박사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결의와 성의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큰 박수)
대화를 마치며 제가 토인비 박사에게 “21세기 인류에게 무엇을 제언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박사는 “20세기에 인류는 과학의 힘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을 해치고 인류를 자멸로 이끄는 것이다. 인류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조절하는 지혜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방종과 금욕을 훈계하고 중도를 걸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이며 특히 ‘중도’라는 말에 끌렸습니다. 왜냐하면 ‘동양(東洋)의 마음’에 흐르는 대승불법(大乘佛法)은 중도주의를 관철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우프헤벤(지양止揚)에 가까운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즉 저는 물질주의와 정신주의를 지양하는 제3의 ‘생명의 길’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현대문명이 초래한 차질을 교정(矯正)하는 방도로서 구체적인 방법론도 서로 논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인 방법론은 그대로 그쳐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찾지 못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어떤 것인가?’ 등에 관해 다시 한 번 원점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함께 통감했습니다. 박사와 대담은 인간론, 생명론 등 근본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생명론에 관한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생명론은 인간이 인간을 알기 위한 기본적인 논의이고, 인간의 생명활동이 바로 문명을 형성하는 근본요인이기 때문입니다.
토인비 박사는 세계대전을 두 번 체험했고, ‘전쟁은 타협할 수 없는 가장 나쁜 제도’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박사가 느낀 관심의 큰 부분을 인간의 생사(生死), 더 나아가서는 생명 속 깊이 두신 것 같았습니다. 저도 형을 전쟁으로 잃었습니다. 저는 전쟁만큼 비참하고 잔혹한 재앙은 없다고 실감했습니다. 이것은 평생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토인비 박사와 저는 생명을 더없이 존엄하게 여기는 사상을 모든 인류가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 일이 급선무임을 강한 공감과 기원으로 서로 확인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21세기는 생명의 근원에 빛을 비추는 세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야만 진실한 의미에서 문명은 과학문명에서 인간문명으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토인비 박사와 저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 생명의 영원성에 대한 문제, 사형론·안락사 문제, 이기주의 문제 등 여러 갈래에 걸쳐 생명론에 관해 대화했는데, 오늘 이 강연에서도 생명론을 총괄적으로 채택해서 여러분과 함께 인류의 전도(前途)를 주시하고자 합니다.
이미 아시는 분이 많을 줄 압니다만, 불법(佛法)은 첫 단계에서 인생을 고(苦)의 집적(集積)이라고 설하였습니다.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든 고통, 그리고 죽음의 고통으로 요약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고통, 원해도 득(得)하지 못하는 고통 등, 인생에는 고통이 충만(充滿)하다고 설합니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반드시 무너져버리며, 그것을 잃은 슬픔이 더해져서 고통을 느끼는 시간은 깁니다. 인류사회에 널리 퍼진 빈부의 차이, 인종·풍속의 차이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실감케 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인간은 인생에서 고통을 느끼는가. 불법(佛法)에서는 그것에 대해 ‘무상(無常)’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무상이란 우주와 인생의 모든 현상으로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원리를 모르는 데서 고통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젊은 사람은 반드시 늙고, 형체가 있는 것은 반드시 파멸되고, 건강하다가도 병을 앓고,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리스의 철인(哲人)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萬物)은 유전(流傳)한다.”고 했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은 강물처럼 흐르며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합니다. 책상, 마이크, 빌딩 등 이 모든 것이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것조차도 많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파괴되고, 저는 강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웃음) 다만 제 몸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웃음)
이러한 ‘무상(無常)’의 원리를 망각하고 그것을 상주(常住)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데 정신적인 고통이 생기는 원인이 있다고 불법은 설합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연인이 있다고 가정할 때, 처음부터 그 연인의 30년 후, 40년 후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교제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폭소) 역시 현재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원하는 것이 인정(人情)입니다. 또 아무리 거대한 부(富)라도, 죽은 후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애써서 얻은 부귀(富貴)를 조금이라도 오래 보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결코 그릇된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연인(戀人)은 항상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갈등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 가장 큰 정신적인 고통을 느낍니다. 부귀를 얻으려고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그 부귀에 집착하여 주위 사람들과 다투고, 부귀를 잃는 고통도 맛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死)’라는 문제도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명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되어, 그 생명을 보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한 집착이 인간에게 모든 고통을 주는 것도 의심 없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늙는 것을 겁내며, 병에 대해 고민하고, 생에 대한 욕심 때문에 끝없는 번뇌의 늪에서 발버둥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은 이런 무상(無常)한 변전(變轉)을 똑바로 보라고 설합니다. 오히려 위대한 용기로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변화하는 무상한 현상을 좇을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그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무상하며, 그러므로 고통의 집적(集積)이며 나아가서는 이 현실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자기자신도 반드시 죽습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시해서 그 속에 있는 것을 포착하라고 불법(佛法)은 가르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무상한 현상에 사로잡혀 번뇌의 포로가 되는 것을 결코 어리석은 행위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인간은 생명이 있는 한, 생명이 존재하는 한 생(生)에 집착하고 사랑을 소중히 하며 이(利)를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종래 불교는 번뇌를 단절하고 탐욕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인식되어, 문명발달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 그것을 저해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무상을 강조하는 한 측면이 부각된 것으로, 이것만이 불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불교의 일면적(一面的)인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진수는 번뇌를 단절하고 집착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설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무상을 깨닫고 체념을 설한 소극적이고 허무적인 것이 아니라, 번뇌나 집착 같은 생명의 작용을 만들어내는 구극적(究極的)인 생명의 실체, 무상한 현실 깊은 곳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통합하고 율동시키는 상주불변의 법이 있음을 가르친 것이 불교의 진수입니다.
즉 무상한 현상에 눈을 빼앗겨 번뇌에 쫓기는 삶은 ‘소아(小我)’에 사로잡힌 삶이며, 그 오저에 있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고 그 위에 서서 무상한 현상을 포용해 나아가는 삶의 자세야말로 대아(大我)에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아’는 곧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 생명의 각종 작용을 발현시켜 나아가는 근본적인 실체를 포착한 ‘법(法)’입니다. 토인비 박사는 이 실체를 철학적 용어로 ‘우주 구극의 정신적 실재(實在)’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을 인격적인 것으로 포착하기보다는 불교와 같이 ‘법’으로써 포착하는 것이 바른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아’가 아닌 ‘대아’에 산다는 것은 결코 ‘소아’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아’가 있음으로써 ‘소아’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집착이 있고 번뇌가 있기 때문에 발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富)에 집착하지 않으면 경제는 발달할 수 없고, 혹한의 겨울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자연과학은 발달할 수 없습니다. 연인을 사랑하는 번뇌가 없으면 문학의 중요한 부분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웃음)
불교 일부(一部)에서는 초기에 번뇌를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육체마저도 불태워버리는 시도까지 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는 생명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실체에서 발현(發現)하므로 없애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동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번뇌에 빠진 ‘소아’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야만 합니다.
진실한 불교는 지금 그 근본이 되는 ‘대아’를 발견했습니다. ‘소아’를 없애버리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소아’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아’를 통제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대아’의 위에 서야만 문명이 올바르게 발달할 수 있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큰 박수)
불교가 무상(無常)을 설하고 사(死)를 주시하라고 가르친 것은, 반대로 상주불변의 법이 실존한다는 진실을 교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컨대 부처는 체념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상주의 법을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시하며 무상을 명확히 깨달은 데는 그 오저에 상주불변의 법이 있으며, 우리의 생명도 그 법칙 위에 서서 운동하는 거룩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육체를 반드시 덮칩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생기(生起)하고 전전(展轉)하는 불멸의 생명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불법(佛法)은 가르칩니다. 그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무상(無常)을 주시하라고 가르칩니다.
불법은 ‘생사불이(生死不二)’를 설합니다. 생도 사도 영구불변(永久不變)으로 흐르는 생명이 나타내는 두 개의 방법으로서 어느 한쪽에 다른 한쪽이 종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그 테두리를 넘어선 ‘공(空)’의 차원에서만이 생사를 지배하는 영원한 구극적 생명이 포착됩니다.
토인비 박사와 그 영원성에 대한 문제를 반복해서 논의했으나, 박사도 ‘구극의 정신적 실재’는 불법이 설하는 ‘공’의 상태가 아니면 포착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공’을 짧은 시간에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無)’라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유’나 ‘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의 척도로 판별할 수 있지만, ‘공’은 그 속에 있는 본원(本源)의 세계를 문제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육체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습니다. 어릴 때의 육체와는 딴 사람과 같다고 해도 좋습니다. 앞으로 인생의 긴 도정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변화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도 크게 변화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자기가 있으며, 그것은 단순히 기억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 개의 ‘생(生)이 있는 개체(個體)’로서의 본질적인 ‘아(我)’의 문제입니다.
이 본질적인 ‘아’는 육체나 정신에 나타나지만 그 자체를 인식하기는 어렵습니다. 육체나 정신을 통제하고 ‘유·무’ 세계의 내오(內奧)에 있는 실체입니다.
불법은 이 본질적인 ‘아’가 우주대의 생명에 통한다고 설합니다. 또 이 ‘아’는 영원불멸의 작용을 하며 어떤 때는 ‘생’의 모습을, 어떤 때는 ‘사’의 모습을 취하는데, 이것이 생사불이(生死不二)라는 사고(思考)입니다. 우리는 그 ‘대아(大我)’를 자신의 생명 속에 가지고 있으며, 우주생명과 함께 호흡하면서 무상(無常)한 세간(世間)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문명을 뒤집어서 보면 우리의 문명은 확실히 이 ‘소아’에 농락당해, 그것을 최대한으로 날뛰게 한 문명이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권화(權化)한 인간의 욕망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석유자원을 퍼올려 거대한 과학기술문명을 창출했습니다. 거대한 빌딩, 고속화한 교통기관, 각종 인공식품 그리고 가장 꺼림칙한 병기(兵器) —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집착과 번뇌를 상징합니다.
그것들이 하는 대로 방치하고 인간을 종속시킨다면 반드시 인류를 자멸(自滅)의 함정에 빠뜨리고 말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폭거를 반성하고 ‘인간’에 눈을 돌리게 된 세계적인 사조(思潮)는,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우려 하는 전조(前兆)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에 지배되어 무상(無常)한 현상세계만을 뒤쫓는다면, 거기에 아무리 지성(知性)이 발휘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상의 오저에 있는, 눈에 띄지 않은 실재(實在)에 눈을 돌림으로써만이 인간은 인간다움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요. (박수)
토인비 박사는 자기의 이기(利己)에 찬 욕망을 ‘마성(魔性)의 욕망’이라고 인식하고, 그것에 상대해서 ‘대아’에 융합하는 욕망을 ‘사랑으로 향하는 욕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성의 욕망’을 통제하려면 반드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적인 자기를 주시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21세기에 경종(警鍾)을 울리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다가올 21세기 문명은 ‘소아’에 지배되어온 문명을 타파하고, ‘대아’를 근거로 무상의 오저에 있는 상주(常住)의 실체를 파악한 위에 서 있는, 원만한 발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인간으로 자립하고, 문명 또한 인간의 문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21세기는 ‘생명의 세기’이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큰 박수)
우리의 인생은, 또한 우주의 모든 현상은 차륜(車輪)이 회전하듯이 한없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번뇌와 욕망의 늪을 헤매며 뛰어갈 것이냐, 확고한 ‘대아’를 깨달은 생명의 대지(大地) 위를 뛰어갈 것이냐에 따라 그 회전은 변화합니다. 그때 비로소 문명은 확고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21세기가 꿈에 본 인간구가(人間謳歌)의 문명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인간 자체에 눈을 돌려 상주불변의, 부동(不動)의, 불변의 강력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야흐로 그 분기점임을 저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20세기 후기에서 21세기에 걸친 현대는 참으로 인간이 진실한 인간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전환기라고 생각합니다. 극론(極論)인지 모르나 인간은 지금까지 지성(知性)을 가진 동물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봉하는 700년 전의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교전(敎典)에 “재능(才能) 있는 축생(畜生)”(‘개목초’, 어서 215쪽)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현대에 와서 이 말씀이 갖는 의미가 극명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성적으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나아가서는 생명적으로도 인간으로서 도약(跳躍)을 완수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그 과제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부과되어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 인간으로서 자립할 길을 모색해야 하며, 저는 그것을 불법에 의해서 ‘생명의 여로(旅路)’를 개시(開始)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미증유의 전환기에 선 젊은 건설자·개척자로서, 각자 ‘인간자립의 길’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위하여 참고가 될까 하여 불법이 가르친 영지(英智)의 일단을 피력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지표(指標)가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