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 Words of Wisdom 희망찬 내일을 위한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명언

  • Dialogue with Nature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사진 작품, 자연과의 대화

  • The Life Story of Daisaku Ikeda 이케다 다이사쿠 생애

인터뷰 2008. 11 / 월간조선 인터뷰

“이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

아널드 토인비, 고르바초프, 저우언라이(周恩來), 마거릿 대처, 인디라 간디, 헨리 키신저, 프랑수아 미테랑, 넬슨 만델라 등 세계의 지도자들과 교우하며 세계 평화를 주제로 대화를 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 21세기의 철학ㆍ문학ㆍ종교ㆍ교육을 말하다

‘활자의 힘’이 인간 정신 고양에 큰 도움, ‘文의 힘’은 영원하다

한국을 ‘文化大恩의 나라’로 칭송, 在日 한국인 참정권 보장 주창

서울올림픽 때 舊소련과 중국의 올림픽 참가와 지원 약속 받아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리더의 조건은 솔선수범. ‘자애’와 ‘봉사’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

이케다 다이사쿠
  • 1928년 도쿄 오타구 출생.
  • 夜學으로 동양상업고교, 대세학원(現 후지대학) 졸업.
  • 1960년 창가학회 3대 회장 취임, 소카대학(1971년)ㆍ창가여자단기대학(1985년) 설립.
  • 저서 : <인간 혁명의 세기로> <20세기 정신의 교훈> <희망의 세기를 향한 도전> 등 50여 권의 대담집 발간.
  • 상훈 : 세계 27개 국가로부터 국가훈장.

SGI를 아세요?

필자가 아는 사람 중 특별한 종교가 없는 남녀 10명에게 SGI(국제창가학회)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 중 8명은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2명은 “국제창가학회 아니냐”고 했다. 모르겠다는 8명에게 “SGI가 국제창가학회의 영어 약자이고, 국제창가학회는 일명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蓮華經)로 불리는 종교”라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SGI가 한국에 뿌리내린 지 근 반 세기가 되었고, 회원이 10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에 10명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적지 않은 신도에 제법 긴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SGI에 대해 낯설어 하는 이유는 우선 이 종교가 비교적 조용히 포교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온 종교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쓰고 볼 것을 우려해 회원들 각자가 자기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SGI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에 대해서는 그리 낯설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종교 지도자로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세계 유명인사들과 대담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SGI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 승려인 니치렌(日蓮)이 주창한 佛法(불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대승불교 단체다. 니치렌의 불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설하고, 우주생명의 근본법인 법화경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세계적 인물들과 교우

지난 5월 도쿄 하치오지에 있는 소카대학에서 중국 옌안대학이 수여하는 종신교수 수여식 에서 기념 연설하고 있는 이케다 선생님

1960년 창가학회 제3대 회장에 오른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니치렌의 불법을 기조로 세계 평화 구현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
SGI를 세계적인 종교로 키운 이도 이케다 회장이었다.

그는 서른두 살에 회장에 취임한 이후 54개국을 순방하며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고르바초프 前(전) 소련 대통령,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
헨리 키신저 전 美(미) 국무장관,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 수많은 지도자들과 세계 평화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대담 내용은 50여권의 책으로 엮여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한국에는 토인비와 나눈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가 2003년 출간됐다. 이케다 선생님은 석학들과의 대담 외에 젊은이와 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도 수없이 했다. 그 덕에 세계 27개 나라로부터 국가 훈장을 받았고, 570여개 도시로부터 명예시민증, 243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와 명예교수 자격을 받았다. 젊은 인재 육성을 위해 일본과 미국에 소카대학도 설립했다.

SGI는 현재 전 세계 192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회원이 2000만명에 이른다.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있는 이케다 회장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했고, 에너지가 넘쳤다. 한국의 고전을 즐겨 읽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고 있었다.

한국의 나이로 팔순입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많은 분들의 염려 덕분에 80세를 넘었습니다. 건강하게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아내도 ‘지금이 가장 건강 하시네요’라며 기뻐할 정도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병마와 싸웠습니다. 결핵을 앓으면서도 전쟁 중이라 근로동원이나 군사훈련에 나가야 했고, 치료나 요양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도 “서른 살까지 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걱정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제 쓰러져도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孔子(공자)는 ‘70을 從心(종심)이라 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교육자였던 공자의 심경을 저 나름대로 헤아려 80세를 정의하면 ‘청년과 함께 미래를 연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최근 들어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 역시 교육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창립한 소카대학교에는 한국의 우수한 영재들이 찾아와 배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한국에 ‘행복유치원’을 개원했지요. 한국은 문화ㆍ교육의 나라입니다. 한국과 문화ㆍ교육의 교류가 한층 다양하고 넓어지고 있어 매우 기쁩니다.

저술 작업에도 열성적이라고 들었습니다.

토인비 박사를 비롯해 세계의 지성들과 문명을 논하는 대담집을 발간해 온 것이 어느덧 50권이 되었습니다. 제주대 총장이셨던 趙文富(조문부) 선생과도 두 권의 대담집을 냈고, 지금은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과 나눈 두 번째 대담을 엮고 있습니다.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의 대담도 진행했고요. 그 밖에 우리 학회 기관지인 <세이쿄신문>에 소설 <新(신)인간혁명>을 연재하고 있고, 각종 매체에 발표할 원고를 준비하는 시간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위대한 독립 지도자 金九(김구) 선생님은 ‘문화의 힘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다른 나라에도 행복을 전파한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화와 善(선)을 가져다주는 ‘문화의 힘’은 양질의 활자문화가 아닐까 생각해요. 활자문화의 쇠퇴가 두드러지는 현대에 ‘언론의 힘’을 복권시키는 것은 세계적인 과제입니다. 여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매일 펜을 쥐고 있지요.

이케다 회장께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게 여겨질 만큼 좋은 습관이 있습니까.

특별한 습관은 없지만 20여년 전부터 틈틈이 걷거나 체조를 하는 등 몸을 부단히 움직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청년들을 만나 격려하는 일도 지금껏 쉬지 않고 계속해 온 일입니다. 이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이나 도다 2대회장이 실천한 우리 학회의 전통입니다. 동양에는 靑出於藍(청출어람)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어요. 청년들을 자기보다 나은 인재로 키우는 것이 창가학회의 교육 이념이자 전통입니다.

<춘향전>, 李退溪, 尹東柱 글 즐겨 읽어

이케다 선생님(왼쪽)은 1971년 유럽ㆍ북미 방문 중 영국 런던에서 아널드 J. 토인비 박사(오른쪽)와세계 평화를 주제로 대담을 나누 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이며, 그럴 때 기분은 어떻습니까.

32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이 된 저는 항상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과 만나 왔습니다. 토인비 박사와 처음 만났을 때 박사는 83세, 저는 44세였습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만났을 때는 총리가 76세, 제가 46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는 분 대부분이 저보다 어리더군요. 저우언라이 총리가 ‘젊은 당신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의 저야말로 저우언라이 총리와 같은 마음으로 젊은 분들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제가 경애하는 퍼그워시회의(핵무기와 세계 평화에 관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회의.
창시자인 조지프 롯블랫 경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에 퍼그워시회의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편집자 주)의 롯블랫 박사는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 오키나와에 있는 저희 연수원까지 와 주셨습니다. 박사님께서 서거하시기 2년 전에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네요.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많은 분들이 내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하지만 나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헛된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까요. 미래를 향해 항상 앞으로 나가고 싶습니다’라고 했어요. 저도 지금 같은 심정입니다.
조선시대의 3대 시인으로 평가되는 朴仁老(박인로) 선생이 남긴 ‘立岩(입암)’이라는 시조가 떠오릅니다. ‘江頭(강두)에 屹立(흘립)하니 仰止(앙지)에 더욱 높다/風霜(풍상)에 不變(불변)하니 더욱 굳다/사람도 이 바위 같으면 大丈夫(대장부)일까 하노라’ 언제나 이 바위처럼 강하고 신념에 찬 삶을 살고 싶습니다.

최근에 대담을 나눈 석학은 어떤 분이며,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지난 여름 미국의 전통 있는 교육연구기관 ‘존 듀이협회’의 짐 게리슨 회장(버지니아공대 교수), 래리 히크먼 전 회장 (서던 일리노이대 카본데일 캠퍼스 듀이연구센터소장)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듀이 박사는 마키구치 초대 회장과 도다 2대회장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행복을 추구하고 대화를 중요시하는 휴머니스트라는 점에서 박사의 철학과 창가교육의 이념은 깊이 통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마침 대담 날짜가 8월 12일, 유엔이 정한 ‘국제청소년의 날’이어서 교육을 테마로 대화했습니다. 듀이 박사가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에 경종을 울린 것도 화제가 되었죠. 창가학회 초대 회장과 2대회장도 일본의 군부 권력과 맞서 옥중투쟁을 했기에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케다 회장께서는 독서를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즐겨 보시는 책은 어떤 것입니까.

‘독서는 성숙한 인간을 만든다’ ‘지식인은 文字香(문자향)과 書卷氣(서권기)가 흘러야 한다’, 이것은 ‘歲寒圖(세한도)’로도 유명한 추사 金正喜(김정희) 선생의 신조였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구인데, 독서하는 데 큰 자극이 되었죠.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철학자 듀이의 책과 청년 시절부터 애독해 왔던 에머슨 문집입니다. 휘트먼의 시집 <풀잎>도 다시 읽고 있지요. 그밖에 톨스토이와 괴테 전집은 항상 곁에 두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전 <춘향전>도 즐겨 읽는 책입니다. 李退溪(이퇴계), 신사임당, 尹東柱(윤동주), 柳寬順(유관순), 安昌浩(안창호), 韓龍雲(한용운) 등의 글은 제가 청년들에게 자주 읽어주는 명문들입니다.

시대 변해도 ‘文의 힘’ 영원할 것

1974년 중국을 두 번째 방문한 이케다 선생님이
베이징 시내에서 저우언라이(왼쪽)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28년 도쿄 오타구에서 가난한 김 제조업자의 7남 1녀 중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기아와 질병으로 불우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인간의 生死(생사) 문제가 항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창가학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이 敗戰(패전)으로 혼란스러웠던 1947년 8월, 스승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를 만나면 서다. 이후 도다 선생님의 출판 사업을 도우면서 인문, 사회, 자연, 과학,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사사했다. 그는 “도다 선생을 모시고 있는 것 자체가 내게는 더 없이 좋은 교육이었고, 無形(무형)의 자산이었다”고 말했다.

도다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선생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요.

물론입니다. 제 사상의 98%는 은사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제 나이 열아홉 살에 스승을 만났지요. 생명철학을 추구했던 선생님은 내가 품고 있던 모든 의문에 대해 성실하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으셨습니다. 솔직히 종교에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분의 인격에 매료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죠.

창가학회와 인연을 맺기 전,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은 무엇이었나요.

소년시절, 집 앞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습니다. 봄이 되면 활짝 핀 벚꽃을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죠. 소년인 저는 언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벚나무를 수만 그루 심으리라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 꿈은 소카대학교 캠퍼스 등 곳곳에 벚나무를 기념 식수함으로써 결실을 맺었지요.

지금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고 후세에 남길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문화의 힘’ ‘활자의 힘’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는지 저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잡지 <모험소년>과 <소년일본>의 편집장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패전 후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소년소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고 싶다는 염원으로 심야까지 원고 작업에 매달렸던 일은 그리운 추억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글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는 소원은 여전합니다.

핵무기 사용자는 사형시켜야

이케다 선생님은 戰後(전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스승 도다 선생님의 출판업이 어려워지면서 빚 독촉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1954년 6월 무렵에 쓴 그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오슬오슬 추운 하루였다. 생활비도 쪼들린다. 오늘 날씨와도 같다. 하루 종일 재미없다. 이상하게 죽음이 자꾸 예감된다. 이것이 병마라고 하는 것인가? 信心(신심)을 닦은 지 7년, 최대의 시련이다. 오늘 저녁은 특히 괴롭고 쓸쓸하다. 지금 한 사람의 벗도 없고 응원도 없다. 힘은 시시각각으로 약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여기서 죽는 것은 싫다.’

그는 이 시기를 “개인적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때였다”고 회고했다.
“생각해 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습니다. 전후 상상을 초월한 인플레이션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중소기업의 도산이 기록적인 수치에 달했습니다. 격동의 거센 파도 속에서 선생님의 사업도 점차 기울어 출판물은 잇달아 폐간됐죠.”

출판사가 문을 닫자 그는 은사가 경영하는 신용조합 일을 담당하게 됐다. 다니던 야간학교까지 단념하고 일에 몰두했지만 경영은 갈수록 악화됐다. 얼마 되지 않아 채권자들이 밀어닥치고 월급이 끊기자 도다에게 신세를 지고 있던 제자들마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회사를 떠났지만 그는 남았다.

“저는 분노의 치를 떨며 ‘비록 나 혼자가 되더라도 선생님을 지키겠다, 선생님께서 승리하실 날을 열어 보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곤경에 처했을 때야말로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수행 기간이었다고 생각해요.”

1957년 스승 도다 선생님은 5만명의 청년들이 운집한 요코하마 미쓰자와 경기장에서 “原爆(원폭), 핵무기를 사용하는 자는 인간의 생존권리를 침범하는 악마이고 괴물이다”라며 ‘원폭 금지선언문’을 낭독했다. 불자로서 사형을 반대하던 도다 선생님은 이날 원폭을 ‘절대악’으로 단정하고 원폭 사용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대국들이 핵무기 개발과 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도다 선생님의 선언에는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魔性(마성)을 근본부터 타파하자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인류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스승 도다 선생님의 사상은 그대로 이케다 회장에게 스며들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舊(구) 소련의 코시긴 총리를 만났을 때 핵폐기 문제부터 거론했고, 당시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과의 대담 때는 1000만명 핵폐기 서명을 전달했다.
창가학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 군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고, 國神(국신) 숭배를 거부했다. 이때문에 스승 도다 선생님은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다.

스승의 힘

200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과 회견하고 있는 이케다 선생님(오른쪽)

도다 조세이 선생님이 서거한 1958년 창가학회 회원은 100만 세대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했다. 창가학회가 공중분해될 것이라는 세간의 예견은 빗나갔다. 이케다 회장이 취임한 후 모임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다. 1975년 1월에는 세계 52개국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SGI로 거듭났다.

육체적으로 한계가 있었음에도 포교에 열정적이었다고 들었는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스승 도다 선생님의 소원은 이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구상을 실현하고 싶다는 것이 61년 동안 일관돼 온 저의 원동력입니다. 스승은 세계의 평화, 문화, 교육운동의 방법을 구상하고 그 실현을 하나하나 저에게 의탁하셨습니다. '학회도 신문을 내자!'  '대학을 만들자!' 등. 은사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셨을 때(1915년)에는 회원을 75만 세대로 늘리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청년의 힘으로 이룩하자'고 맹세하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죠."

스스로에 대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저는 가난한 김 제조업자의 아들로서 자신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 이상으로 훌륭하게 될 수 없어요. 잘난 체하는 인간은 싫습니다. 인류의 99%는 민중이고, 서민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민중과 함께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 저의 신조이자 긍지입니다."

자신의 신앙심에 의혹을 품거나 회의를 가진 적은 없습니까.

신앙의 길에 들어선 초기에는 ‘生(생)과 死(사)’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불법으로 풀 수 있는지 사색을 거듭하는 나날이었죠. 신앙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많았습니다. 만약 종교가 신(근본)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면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정신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종교는 사회에서 유리되고, 독선이나 광신에 빠질 수도 있죠.

자신이 믿는 신에 끝없이 의문을 가져야 종교가 건강하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저의 은사 도다 선생님은 항상 ‘信(신)은 이치를 구하고 이치는 신을 깊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치’란 논리성, 즉 ‘의문’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묻는 것은 등나무 줄기처럼 상호적이면서 상승적으로 영향을 주며 정신성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연장은 지성이고, 지성의 연장은 신앙이죠. 진정한 종교는 인간을 ‘무지’와 ‘어리석음’의 어둠에 가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예리한 ‘지성’에 눈 뜨게 함으로써 賢者(현자)로 만들어 가는 것이죠. 이것이 불법을 만나 6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 온 저의 확신입니다.

민중의 종교로 전파

이케다 선생님(오른쪽)은 1996년 6월 북중미 방문 중 뉴욕에서 전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가운데)와 대담을 나누었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 SGI 회원이 두 번째로 많은 나라다. 한국에 창가학회 가 전파된 것은 1960년대 초,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신심을 권유 받거나 학회의 간행물을 통해 信心(신심)을 접하면서 라고 한다. 이후 회원들은 스스로 국내에 조직을 결성하고 좌담회를 개최하면서 불법 유포에 힘쓰기 시작했다.

한국 SGI 관계자는 “특권층이나 성직자에 의한 것도 아니고, 상하 관계의 조직 형성이 아닌 민중에서 민중으로 넓혀진 자연발생적 형성은 한국 SGI가 민중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SGI는 보급 초기 일본에서 발생한 종교라는 이유로 적지 않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1960~70년대만 해도 신문이나 방송 매체에는 ‘노래하는 종교 창가학회’ ‘군국주의 倭色(왜색)종교’라는 말이 종종 등장했지요. 급기야 1964년 1월에는 내무부장관 명의로 ‘이 종교의 집회와 포교를 금한다’는 행정처분이 내려졌고, 문공부는 ‘창가학회는 邪宗敎(사종교) 집단’이라는 낙인까지 찍었죠. 이때 입은 이미지 손상이 아직까지 100%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당시 정부는 한국 SGI 간부들을 ‘외환관리법 위반’ 죄목으로 체포했지만 정작 심문과정에서는 ‘남묘호렌게쿄’를 믿지 않으면 풀어 주겠다는 식으로 회유와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SGI는 현재 전국 350여개의 문화회관에서 100만명에 육박하는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헤쳐 온 한국의 투혼과 저력에 감탄하며 이케다 선생님은 한국을 세 차례 방문했고, 한국을 ‘文化大恩(문화대은)의 나라’로 칭송할 정도로 한국에 우호적이다.

그는 일본 내 극우세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在日(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을 주창하는 등 재일 한국인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 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구 소련과 중국을 방문, 올림픽 참가와 지원 약속을 받아내 서울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제전이 되도록 도왔다. 그는 일본 내 한국 전문가로 불릴 정도로 한국 역사와 문화에도 정통하다.

SGI가 회원을 둔 전 세계 192개국 중에서 한국은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회원이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도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보도를 접한 후 마음 아파하시며 불자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불법을 포함해 일본은 한국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를 배웠지요. 니치렌 대성인은 ‘달은 서쪽에서 나와 동쪽을 비추고, 해는 동쪽에서 나와 서쪽을 비추니 불법 또한 이와 같으니라’고 하여 ‘佛法西還(불법서환)’이라는 사상체계를 구축하셨습니다.

이는 불교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과 한국에 닿았고, 東漸(동점)의 종착역이라고 할 일본에 전해진 소위 ‘佛敎東漸(불교동점)’에 대한 보은의 마음에서 기초하는 것입니다. 저는 불법의 가르침과 은사의 비원을 가슴에 품고 한국에 대한 보은, 그리고 아시아 각국과의 우호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마음의 교류를 도모해야 함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죠.

SGI 헌장에는 인간주의에 기초한 ‘세계시민 정신’ ‘관용 정신’ ‘인권 존중’이라는 지침 아래 인류 사회의 번영에 공헌할 것을 지향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한국의 SGI 회원들은 이 정신을 살려 ‘국토 대청결 운동’이나 ‘良書(양서) 증정 운동’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공헌해 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SGI 발전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친이 한국어 가르쳐줘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전 서울에서 한때를 보냈습니다. 제가 소학교 때 아버지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셨고, 일본의 옛 도읍이었던 ‘나라(奈良)’가 한국의 ‘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일러 주셨죠. 아버지를 통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한국 속담도 알게 됐습니다. 이 말에는 예의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정신이 담겨 있지요.
그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일본은 횡포하고 거만하다”며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일본의 처사에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가 한국과 우호를 결의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들었습니다. 따로 공부하신 건가요.

저는 예전부터 문화와 예술, 학문, 불교 등이 한국에서 전해진 것에 진심으로 경의를 품고 있었죠. 니치렌불법에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스승이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백제가 일본에 불법을 전한 것은 6세기 중엽, 백제의 성명왕(성왕) 때라고 전해지고 있죠. ‘아스카(飛鳥)’와 ‘텐표(天平)’ 등 일본 문화의 발전은 6세기 중엽 한반도 문화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李御寧(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께서는 16세기 이후 활발해진 한반도와의 문화 교류가 에도시대 일본을 무력주의에서 문화주의로 바꾸었다고 명찰하고 계시더군요.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어떤 민족의 언어와 문학을 깊이 아는 자는 결코 그 민족의 적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창립한 소카대학에는 한국에서 온 수많은 유학생이 배우고 있고, 일본 학생 중에는 ‘한글’을 이수하는 학생이 많아요. 창립자로서 서로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고 우정을 키워 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한국은 文化 大恩의 나라

2008년 5월 일본을 국빈 방문 중인 후진타오 중국 국가수석과 도쿄도 내에 있는 숙사에서 회견하고 있는 이케다 선생님(왼쪽)

일본은 여전히 한국에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어떤 분야에서든 일본에 밀리면 분통해 합니다.
이런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한국을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의 민중을 진심으로 경애하고 있지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경쟁의식 배경에는 근대 군국주의 일본의 만행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화대은의 나라’인 한국을 짓밟고 괴롭혀 왔던 역사는 사죄하고 또 사죄해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에 깊이 새겨 왔습니다.

한국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지요? 일본에도 그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습니다만 에도시대에는 한일 관계가 200년 넘게 우호적으로 지속됐죠. 일본은 한국과 깊은 신의와 우정을 맺어야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한자문화를 비롯해 언어나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은 지금도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다. 그는 “양국이 앞으로 더 많이 대화하고 마음을 나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제의 나라’로 발전해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계 여러 대학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강연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학생들로부터 어떤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까?

지금까지 미국 캘리포니아대(LA), 하버드대, 러시아 모스크바대, 중국 베이징대, 프랑스 학사원 등 여러 대학과 학술기관에서 30회 넘게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홍콩 중문대에서는 ‘중국적 인간주의와 전통’에 대해, 이탈리아의 명문 볼로냐대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눈과 인류의 의회―유엔의 미래에 대한 고찰’을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이 모든 강연의 공통점은 불법을 기조로 한 인간주의와 평화사상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呂運亨(여운형)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래는 청년의 것이고, 청년은 미래의 상징, 전진의 정신이다. 청년만이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상을 대담하고 용감하게 실현해 나갈 수 있다’고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청년은 ‘건설’의 다른 이름이며 ‘혁신’의 숨결입니다. 저는 청년을 사랑합니다. 청년의 결의는 아름답고 청년의 성장은 모두의 희망이기 때문이죠. 제 청춘 시절을 돌아보며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좀 더 다양한 독서와 공부를 하지 못한 것, 몸을 더욱 단련하지 못한 것, 다가오는 글로벌 시대에 대비해 어학 공부에 매달리지 못한 것 등이죠.”

그는 일본의 청년들에게 한국의 인권투사인 咸錫憲(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인용할 때가 많다며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은 이겨내는 자에게는 옥을 닦는 돌과 같은 것이다’라고 적기도 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는 SGI의 기본 이념이자 철학이다. 이케다 회장의 스승 도다 선생님은 행복을 ‘상대적인 행복’과 ‘절대적인 행복’으로 분류한 다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상대적인 행복은 물질적인 욕망을 만족시켰을 때 느낀다. 이런 행복은 획득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환경이 바뀌면 사라져 버린다. 절대적인 행복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데서 온다. 이런 행복은 어떤 고난과 폭풍이 몰려와도 삶의 의욕을 잃지 않고 마치 파도타기를 즐기는 것처럼 늠름하게 끝까지 살아가는 데서 찾게 된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행복의 기본 조건은 무엇입니까?

한국 현대 회화의 어머니였던 羅蕙錫(나혜석) 선생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자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하셨죠. 이 말씀을 작년 3월, 저는 소카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줬습니다. ‘행복의 샘터는 자신의 가슴에 있다’고요.
제가 경애하는 韓龍雲(한용운) 선생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기셨죠. ‘쌓인 눈과 한풍에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것이 매화라고 한다면 황폐해진 세상의 시련 속에서 행복을 찾는 자는 勇者(용자)이다’라고.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생명력이야말로 진정한 행복 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이끄는 대화기술

1959년 8월 도쿄 나카노지부 좌담회에 참석하여 회원들을 격려하는 젊은 날의 이케다 선생님(중앙)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로 인한 범죄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저의 은사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석존, 그리스도, 마호메트 등 각 종교의 창시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열면 이야기는 빠를 것이다’라고. 교리를 놓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모두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진정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모든 종교 문제는 종교의 본래 목적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생기죠.

(이케다 선생님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에 빗대 종교의 폐단을 설명했다. )
그리스의 전설적인 강도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자신의 침대로 유인해 붙들어 맨 후 침대의 크기에 맞춰 신장이 짧을 때는 늘리고 길 때는 머리나 다리를 잘라 버렸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교의나 이데올로기에 맞춰 인간을 규정하고 억압하고 재단한다면 그야말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비극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니치렌 대성인은 종파와 상관없이 민중의 행복과 세계 평화만이 인류가 번영하는 길이라고 가르치셨죠. 종교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종교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21세기 종교의 요건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종교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계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대화의 필요성’을 자주 거론하셨습니다.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대화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9월 베이징올림픽이 성공리에 폐막됐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모인 선수들이 같은 룰 아래 그동안 단련해 온 힘과 기술을 정정당당하게 겨뤘지요. 이것도 하나의 훌륭한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올림픽 야구에서 한국은 全勝(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특히 결승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이자 한편의 드라마였지요. 전 세계인이 이 드라마를 보며 흥분하고 감동했다는 것만으로도 스포츠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큰 역할을 한 셈입니다.

대화에도 스포츠 정신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스포츠 무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페어플레이 정신이듯 대화의 기본 역시 공정하고 성실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란 서로의 공통점과 보편성을 찾아가는 한 과정입니다. 나라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기쁨이 대화의 즐거움이죠. 불가에서는 ‘生老病死(생로병사)’의 四苦(사고)를 이야기합니다. 살아가는 고통, 늙어가는 고통, 병든 고통, 죽는 고통, 이 네 가지는 인생의 근본과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만인에게 공통된 인생의 근본 과제를 더듬어 가다 보면 어떤 사람과도 이야기가 통합니다.

안창호 선생님도 대화의 달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대화는 새로운 것을 배워서 스스로의 세계를 넓히는, 살아있는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 공생의 봄을 기다리며

1958년 3월 도다 제2대 선생님 곁에서 광선유포를 위해 애쓰는 당시 청년실장인 이케다 선생님(왼쪽)

조직은 돈과 사람이 많아지면 권력화되고 부패하기 쉽다고 합니다.
종교단체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조직을 건강하게 지탱하기 위해서는 형식주의와 무사안일주의,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부패와 타락을 막아야 합니다. 저의 은사는 조직이 부패하지 않으려면 청년들의 의견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퇴영적, 보수적 조직이 되지 않도록 젊은 인재를 잇달아 발탁해야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조직이 된다는 것이 었습니다. 개혁이 없는 곳은 진보도 없는 법. 항상 새로운 인재를 키워 개혁하는 것만이 부패와 타락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청년을 키우면 조직과 자신이 젊어지고 건강해지게 마련이죠. 그래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보다 환경오염이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시대입니다.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요?

분단의 시대’에서 ‘공생의 세기’로 가고 있는 만큼 에토스(도덕적 기풍)를 배양하는 것이야말로 종교가 짊어져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문명과 문명이 만나서 충돌과 폭발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공생융합의 방법을 찾아가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오랜 인류사의 벡터(Vectorㆍ방향성)였으니까요.

‘공생’이란 과제는 인간세계에 한하지 않습니다.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명해 보는 시대를 맞고 있어요. 지구라는 무대에서 이제 인간만이 ‘주역’으로 연기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물과의 협연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온 거죠. 불교의 緣起(연기)사상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연기사상의 핵심은 ‘삼라만상은 서로 어우러진 가운데 성장하고 존재한다’는 것이죠. 인간은 자연환경과 여러 가지 관계의 끈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계는 ‘관계성의 직물’이죠. 환경오염은 그 직물을 더럽히고 잡아 찢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만물과 공생하는 시대로 한시바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SGI는 세계인과 손잡고 ‘분단의 겨울’을 넘어 ‘만물 공생의 봄’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리더의 덕목은 '자애'와 '봉사'

평소 존경해 온 리더가 있습니까?

수많은 지도자와 대화를 거듭하면서 어느 한 분도 빠짐없이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만, 감히 한 분을 꼽는다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입니다.

저우언라이 총리와는 1974년 12월에 만났습니다.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 중국과 소련 간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죠. 그해 저는 민간인 자격으로 소련에 이어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병환으로 요양 중이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셨죠. 회견 장소는 병원이었습니다. 총리는 일본에서 제가 ‘日·中(일·중) 수교’를 주장한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訃音(부음)이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의 일이었죠.

차세대를 이끌 리더는 어때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리더의 조건은 ‘솔선수범’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남을 시키기보다 내가 먼저 나서야 하고, 누구보다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민중의 행복을 기원하고 민중을 위해 희생하는 ‘자애’와 ‘봉사’야말로 리더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더로서 스승인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도다 선생님은 천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농담을 잘하고,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분이었죠. 스승에게 저는 ‘너는 도쿄 토박이라서 사람이 너무 좋아’라고 자주 주의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훈계였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1954년 8월, 은사의 고향인 홋카이도의 아쓰다 촌을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은사는 제게 ‘다이사쿠, 나는 일본의 광선유포(廣宣流布;민중의 행복과 평화)의 반석을 만들 테니 너는 세계 광선유포의 길을 열어라’라고 말씀하셨죠.

‘이 바다의 저편에는 넓은 대륙이 펼쳐져 있다. 세계는 넓다. 거기에는 고뇌에 허덕이는 민중이 있다. 아직도 전화(戰禍)에 떨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동양은 물론 세계에 묘법(妙法)의 불을 켜라. 나를 대신하여.’
패전 후 일본에서 민중을 격려해 오신 은사는 생애 단 한 번도 해외에 나간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은사를 대신해서 저는 세계를 돌고 돌았지요. 은사가 꿈꾸었던 세계 민중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회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내 마음속에 언제까지 살아 있을 스승과 대화하면서 평화ㆍ문화ㆍ교육의 큰길을 끝까지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SGI가 걸어온 길

SGI의 역사는 가마쿠라막부 시대의 승려 니치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233년 12세 때 세이쵸사(淸澄寺)로 출가해 불가의 경전을 섭렵했다. 그 결과 석가모니가 설파하고자 했던 것은 ‘생명’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만물을 꿰뚫고 있는 생명은 법화경의 핵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확신했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남묘호렌게쿄’를 암송하고, 그 의미를 마음속에 간직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니치렌은 부패하고 탐욕적인 종교를 비판하고 막부 정권에 바른 말을 하다 61세를 일기로 입적한다. 그의 불법을 전수 보존한 이는 6명의 제자 중 막내였던 승려 닛코(日興)다. 닛코는 후지산의 작은 절에서 스승의 뜻에 따라 종파를 발전시켜오던 중 1912년 종파 이름을 ‘日蓮正宗(일련정종)’으로 바꾼다(日蓮宗ㆍ일련종은 스승의 뜻을 거부한 나머지 5명의 제자가 만든 것으로 일련정종과 전혀 다른 종파라고 한다).

일련정종 내부에 교육자 중심의 신도 모임인 창가교육학회가 결성된 것은 1930년. 이후 창가학회는 승려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신사참배를 하는 등 군국주의 정권에 야합하자 일련정종에서 벗어나 독립단체로 발전한다. 니치렌의 불법을 근본으로 인간변혁과 새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 창가교육학회 결성 의의였다. 초대 회장은 교육자이자 작가였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2대 회장은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다. 두 사람은 군국주의에 타협하기를 거부하다 1943년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투옥됐다. 이후 마키구치 선생님은 고문으로 獄死(옥사)하고, 도다만 출옥했다.

1951년 도다 선생님은 戰後(전후) 학회의 재건을 결의, 학회 명칭을 창가학회로 바꾸고 2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창가학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회원수가 70여만명에 이르렀던 1956년에는 창가학회가 추천한 전국구 후보 3명이 의회에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공명당이 창당됐지만 정부와 탄광노조의 탄압으로 곤욕을 치렀다. 탄광노조는 자신들이 추천한 후보가 패하자 ‘종교의 정치 참여’라며 창가학회 회원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 과정에 선거전을 진두 지휘한 이케다 선생님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15일 동안 구속됐다가 훗날 학회 측의 법정투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60년 스승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제자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창가학회 3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1975년 창가학회의 세계화를 선언, 명칭을 SGI(국제창가학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에 창가학회가 전파된 것은 이케다 회장이 취임할 무렵인 1960년대 초. 성직자나 선교사가 아닌 일반 민중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전파됐다고 한다. 이후 신도들 간에 서로의 고민과 경험을 주고받는 좌담회를 통해 신도수를 늘려왔다. 특별한 성직자 없이 좌담회 중심의 신도 모임을 갖는 것은 SGI의 특징이다.

한국 SGI는 초창기(1960~1970년)만 해도 언론으로부터 ‘노래하는 종교 창가학회’ ‘군국주의 왜색종교’ ‘침략종교’라는 오해를 받으며 탄압을 받았다. 1964년 1월에는 내무부장관 명의로 ‘이 종교의 집회와 포교를 금한다’는 집회정지 행정처분이 내려졌다. 이에 창가학회 측은 국가를 상대로 한 ‘종교 탄압과 신교의 자유에 대한 소송’을 제기,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창가학회의 포교를 위한 집회 및 통신 연락과 간행물의 반입·배포·취득·열람을 금지한다는 처분을 취소한다’는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한국 SGI는 다양한 환경운동과 문화행사 등을 통해 조용히 포교 활동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