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 Words of Wisdom 희망찬 내일을 위한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명언

  • Dialogue with Nature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사진 작품, 자연과의 대화

  • The Life Story of Daisaku Ikeda 이케다 다이사쿠 생애

어머니의 사랑 1967. 1 / 일본 여성잡지 주부생활에 게재된 수필 중

1895년에 태어난 나의 어머니 이치,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 어머니는 도쿄 외곽에서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어머니는 우리 8남매는 물론 2명의 양자까지 입양해서 키우셨다. 이제 어머니의 아들들이 모두 가정을 꾸렸고, 하나뿐인 딸도 결혼하여 어머니에겐 총 13명의 손주가 있다.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매우 소박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모든 자식들을 건강하게 잘 키워내셨다. 승리한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나도 모르게 늘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어머니의 인생이 항상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특히 젊을 때 어머니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다. 아버지 네노기치는, 1956년에 돌아가셨는데, 너무나 완고하고 고집스러우셔서, 친척들과 이웃들 사이에서 ‘고집불통’으로 알려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한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인내심이 필요했을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도쿄 남쪽에 위치한 오모리에 살았다. 어머니는 또한 가업인 김 제조업을 도우셨다. 김 제조업은 끔찍할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도시의 가정주부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노동이다. 지금도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한겨울에 매일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하셨다. 감기에 걸렸을 때조차 쉬지 않고 일하셨다.

자녀들의 교육에 관해서, 어머니는 그다지 특별한 욕심이 없는 듯 했다. 커서 성공해야 한다거나, 높은 학력을 가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던 적이 없었다.

가식이라곤 전혀 없었던 어머니가 항상 하신 말씀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세상에 나가 사회생활을 해보니, 결국 이 두 가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뽐내지 않았던 어머니, 어머니의 유일한 행복은 그저 모든 자식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데 있었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어머니는 바로 그런 분이셨다.

태평양전쟁의 악몽과 비극이 계속되던 시기,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 가족의 삶 또한 많이 고통스러웠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되어, 어머니의 일을 덜어줄 수 있는 나이가 된 4명의 형들은 하나둘 군대로 징집되었다. 일왕을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소환되었다고 했다. 전쟁 중인 국가의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였다. 나의 어머니 또한 단 한차례도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다. 한 명 또 한 명의 아들을 외국으로 보낼 때마다 미소 띤 얼굴로 배웅하셨다. 과연, 당시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어머니에게는 특히 존경스러운 점이 있다. 많은 자녀를 키워야 했지만, 음식을 나눠주는 일에서부터 아이들 간의 싸움을 해결하는 일까지 모든 일에서 어머니는 매우 공평하셨다. 실제로 어머니는 뛰어난 판사요 중재자였다. 모든 자식들 중에서 내가 가장 병약했기에, 보살핌도 가장 많이 받았고, 걱정도 가장 많이 하셨다. 전쟁 후, 야학을 다닐 때, 어머니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언제나 나를 기다리셨다. 그리고 우동 한 그릇을 따뜻하게 데워주시며, “힘들었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셨던 그 한마디의 말씀에서, 나는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식인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에게 나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