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어느 무더운 여름 저녁, 나는 도다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나의 나이 19살. 일본 전역이 그러했듯, 도쿄 역시 점령군의 통제하에 놓여있었다. 황궁의 남쪽 전역은 불타버린 광활한 벌판과 같았고, 황량한 밤이 되면 여기저기 흩어져 급하게 지은 판잣집 사이로 혹은 많은 사람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던 공습대피소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깜박거렸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 살며, 김 양식업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간신히 가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전쟁 후에도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생업을 이어갔다. (네 명의 형 중에서, 큰형은 전사하고, 다른 형들은 아직 해외에서 송환되지 못한 상태였다.) 가난과 궁핍의 한가운데 일본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민주주의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구세력과 권력가들이 하나둘 비틀거리다 무너져갔다.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은 뭐라도 깨우칠 나이가 되면 철저하게 국가주의와 일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주입되었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고, 이제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매일 걱정과 조바심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황폐해져 갔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붙잡을 수 있는 뭔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친구들 두세 명과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각자 전쟁 통에 간신히 구한 책을 가져와 독서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문학, 철학 서적, 위인전, 과학 서적 무엇이든 손에 닿는 것이라면 집어삼킬 듯이 읽어 댔다. 그리고 서로 의견을 나눴다. 책을 읽은 후 끝없는 토론이 이어졌지만, 시대의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친 순간, 독서를 통해 찾았다고 생각한 정신적 지지와 확신은 한순간에 녹아버리곤 했다. 이 독서모임 외에, 가끔 나를 찾아오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생명철학’에 관한 모임에 초대받았다. 바로 그때 처음으로 도다 조세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호기심에 불타, 나는 독서모임 친구 몇몇과 함께 모임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40대의 한 중년 남성을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으나, 매우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굵은 안경 너머로 불빛이 반짝였다. 그의 넓고 튀어나온 이마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았으나, 곧이어 일상생활에 관한 문제부터 당시 정치적 이야기까지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며 거침없이 이야기해갔다. 그의 이야기를 좀 이해하겠다 싶은 순간, 갑자기 어려운 불교용어가 다시 나왔다. 아무튼, 내가 받은 인상은 매우 특이하고 익숙하지 않은 철학 같다는 느낌이었다.
분명 전형적인 종교지도자의 설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단지 철학에 관한 강연도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구체적이었고, 평범한 예를 들며 깊은 진실을 설명해갔다. 그 방 안은 중년남성과 주부들, 어린 소녀들, 건장한 젊은이들로 가득찼다. 모두 도다 선생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완전히 몰입한 채 경청하고 있었다.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열기와 힘이 넘치고 있었다.
도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말투로 이야기했으나, 따뜻함이 느껴졌다. 골똘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을 때,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 몹시 당황한 나는 시선을 떨구곤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그를 쳐다보았을 때는, 그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만났었던 느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멈추었을 때, 데려간 친구가 선생님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그렇군, 그렇군.” 이라고 말하며, 선생님께서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셨고, 안경 너머 선생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하셨다.
“몇 살인가?”
“19살입니다.” 묘한 친근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향수에 젖으신 듯, “내가 도쿄에 처음 상경한 나이가 열아홉이었지. 나는 홋카이도에서 왔다네.
대도시로 처음 올라온 시골 촌뜨기였지.”라고 얘기하셨다.
선생님은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피우며, 은단(銀丹)을 씹고 있었다. 어느새 선생님께 나는 인생과 사회의 문제 등 당시 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올바른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참된 애국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천황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불법은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나의 질문은 이어졌고, 선생님의 대답은 매우 솔직하고 명쾌했으며 빠른 두뇌 회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색함이나 회피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질문 하나하나에 핵심을 찌르며 명확히 설명했다. 선생님의 대답에 만족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리를 찾을 날이 곧 다가올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도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 열흘 후인 8월 24일, 나는 니치렌불법의 신도가 되어, 도다 선생님께서 이끄는 창가학회의 회원으로 입회했다. 조금씩 조금씩 불법철학의 진리와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고, 도다 조세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보기 드문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한편,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는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대략 1년 후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1949년 1월의 일이었다. 일은 매우 힘들었다. 일본의 경제는 전쟁의 패배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고, 인플레이션도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이 도다 선생님의 사업체와 같은 소규모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심각했다. 1949년 말부터 1951년 여름까지 매일매일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하나둘씩 도다 선생님의 회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결국 나 혼자 남아 채권자를 상대해야 했다. 비록 나의 건강과 경제 상황이 거의 붕괴될 지경이었지만, 나는 결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도다 선생님을 지키겠다고, 지옥의 끝까지라도 선생님을 따르겠다고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나는 도다 선생님을 믿었다. 나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올바른 가르침을 믿었다. 그리고 끝까지 이를 관철하겠다고, 투쟁하겠다고 결의했다.
“나는 사업에서 실패했을 수도 있으나, 인생에서 실패하지는 않았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선생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깊이 자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재건이 시작되었다.
도다 선생님의 사업과 창가학회 재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인 내가 이러한 결정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셨다. 도다 선생님께서는,“이제부터 내가 자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몇 년 동안 나는 도다 선생님의 자택에서 혹은 이른 아침 회사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끈기 있게 나에게 법, 정치, 경제, 물리학, 화학, 천문학 그리고 중국 고전 등, 외국어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모든 과목을 가르쳐주셨다. 마치 선생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나에게 모두 전수하려고 결심하신 듯했다.
도다 선생님의 학식은 대부분 독학으로 얻은 것이다. 홋카이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조수로 일하며 독학으로 준 교원자격을 취득하여, 유바리 탄광지역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9세에 도쿄로 상경하여, 인생의 스승이 될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를 만났다. 야학으로 중등 4년 과정을 마친 후, 주오대학에서 공부했다.이처럼 도다 선생님은 독학으로 공부하셨다. 그에게 학교란 배우는 곳이라기보다 그가 이미 습득한 배움에 대한 증명서를 주는 곳이었다. 특히, 수학에 매우 뛰어나 한동안 시습학관이라는 사설학교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또한 도다 조가이라는 이름으로 <수리산술지도>라는 책도 집필했는데, 시험을 준비하던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백만 부 이상 판매되어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애정 어린 추억으로 이 책을 기억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과목에 덧붙여, 도다 선생님은 열정을 담아 매우 심도 있게 불법의 생명철학 또한 가르쳐주셨다. 선생님께서 불교경전과 니치렌 대성인의 저작을 상세히 강의해주실 때, 불법의 가르침과 현대의 다양한 사상체계 간의 관계에도 주목하셨다. 이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선생님의 강의 외에도, 어찌 보면, 창가학회 재건을 위한 선생님의 노력, 그리고 매일매일의 선생님의 삶 자체가 진심으로 주어진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선생님의 강도 높은 훈련에 부응하기 위해 부지런히 인내하며 최선을 다했다. 선생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흡수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사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나는 힐난의 대상이었다.
뒤돌아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도다 선생님의 존재가 내게 얼마만큼의 의미를 지니는가에 그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작고하신 도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 창가학회 회장이 되고, 불법의 진실된 가르침을 넓히는 광선유포라는 전대미문의 과업을 계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단 한 순간도 나의 정신에서 나의 마음에서 이 위대한 지도자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 최대의 행복은 도다 선생님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선생님을 따른 일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의 제자로서 사제관계를 지속한 일이다.